• 1장 격랑속으로 (30)

     손탁 빈관(賓館)의 방 안에 나까지 셋이 둘러앉아 있다.
    9월 말의 오후 7시경이어서 창밖은 이미 어둠이 짙게 덮여졌다.

    머리를 든 내가 윤치호와 이상재(李商在)의 얼굴을 차례로 보았다.
    둘은 독립협회의 회장과 부회장이다.

    「제가 앞장을 서겠습니다.」
    불쑥 내가 말하자 윤치호는 외면했지만 이상재가 말했다.
    「이보게, 괜찮겠는가?」
    「예에, 선생님.」

    이상재의 시선을 받은 내가 말을 이었다.
    「군중들의 반응이 좋지 않습니까? 앞뒤 재지않고 저는 밀어 붙이겠습니다.」
    이상재와 윤치호가 서로의 얼굴을 보더니 제각기 머리를 끄덕였다.

나는 이들에게는 돌격대장이나 같을 것이다.
윤치호는 나보다 10살 연상인 1865년생이었으니 34세요, 이상재는 25살이나 연상인 1850년생으로 49세인 것이다.
두 분 모두 1881년 신사유람단으로 함께 일본을 견학한 인연이 있는 개화지식인들이다.

그때 이상재가 긴 숨을 뱉고나서 말했다.
「지난 달 폐하께서 외국인 용병을 도로 돌려보낸 후에 심기가 좋지 않으셔, 조심해야 될걸세.」
이상재는 개혁에 앞장서 있으면서도 임금에 대해서는 사석에서라도 극존칭을 쓴다.

나는 잠자코 시선만 내렸다.
그렇다.
임금은 조선땅에 들어온 용병 30명에게 일년분 수당을 지급해주고 며칠 만에 다시 돌려보냈다.

내 격렬한 비판이 몰고 온 여론 때문이다.

임금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듣지 않아도 알겠다.

이윽고 머리를 든 내가 둘을 향해 말했다.
「두 분께 누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우리는 며칠 후에 개최 될 만민공동회에서 수구파 대신 7인을 퇴진시키고
독립협회가 주장하는 헌의6조(獻議六條)를 관철시킬 예정인 것이다.

나는 만민공동회에서 대표연사로 나설 작정이다.

그때 윤치호가 말했다.   
「우남, 당분간은 거처를 옮기도록 하게. 어디, 마땅한 곳이 없다면 내가 주선해주겠네.」

「열흘 전에 옮겼습니다.」
쓴 웃음을 지은 내가 둘을 번갈아 보았다.

박무익이 거주하는 남대문 밖 염(鹽)동의 세칸짜리 초가로 옮긴 것이다.
그 곳에는 의병 여덟명이 거주하고 있었으니 궁궐 안의 임금보다 더 안전할 것이었다.
그러자 이상재가 나를 응시한 채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대는 조선을 다시 일으킬 동량(棟梁)중의 하나일세. 몸을 보중하게.」
「감사합니다. 선생님.」
머리를 숙여보인 내가 둘에게 묻는다.
「박공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그러자 둘이 서로의 얼굴을 보더니 대답은 이상재가 했다.
「그건 우리도 모르겠네.」
그리고는 이상재가 길게 숨을 뱉는다.

박공이란 박영효(朴泳孝)를 말한다.
갑신정변의 주역, 그리고 지난번 갑오경장때에도 정권에 참여했다가 두 번째 망명길에 오른 친일개화파, 황제에게는 역적이지만 추종하는 개화당 인사들이 많다.

내가 문득 생각난것처럼 말했다. 
「민중은 황제를 따릅니다. 황제 욕하는 백성은 보지 못했습니다.」
어른들 앞이니 황제 칭호를 붙여야 옳다.
그들은 속으로 한(恨)이 있더라도 겉은 예의를 갖춰야 되는 인품들이다.

내가 말을 이었다.
「황제가 욕심을 버리시면 가능하다고 여러분이 말씀하시더군요. 그런데 두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말을 멈췄다. 둘이 외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