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0년대 중반 쯤 됐지 않았나 싶다. 뭐 대단한 것도 아닌 사연으로 군사재판에서 헌법이 금한 소급법(遡及法)으로 15년 형을 선고받고 벌써 여러 해 째 복역하고 있던 때였다. 안양교도소 당국이 그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개명된 시책 하나를 폈다. 재소자들에게 일간 신문까지는 아니더라도 주간지를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래서 접하게 된 것이 <주간한국>이었다. <주간한국>은 당시의 진부한 구각을 깨고 언론사상 처음으로 뉴스와 엔터테인먼트를 결합한 주간 저널리즘의 시대를 열어 가고 있었다. 
     거기서 나는 매주 연재되는 고정 칼럼 하나를 신선한 충격과 함께 만날 수 있었다. 서독(西獨)에 가 있는 최정호 기자의 <藝>라는 공연예술 기행이었다. 해박하고 산듯하고 세련된 문장과 내용이 나를 인문 교양 예술의 황홀한 현장으로, 그것도 옛날 아닌 리얼 타임 유럽의 살아 있는 무대로 이끌어 갔다. 어쭙잖은 초급 사회과학에 몰두했던 나의 20대를 서서히 졸업시키는 데 자극을 준 상징적인 모멘텀 중 하나였다. 그러나 나는 그 기사를 꼬박 꼬박 다 읽을 수는 없었다. 워낙 징역 사느라 바빠서...

      몇 해 뒤, 지금으로부터 이미 20년 전에 외과 수술을 받다가 유명을 달리한 나의 가까운 친구이자 초창기 현대자동차의 중견으로 있던 신항수 군이 뜻밖에 찾아와 주었다. 아무도 내 근처에 얼씬거리는 것조차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던 그 시절, 그의 방문은 여간 고마운 것이 아니었다. 면회가 끝날 무렵 그는 말했다. “책 몇 권 넣었어. 인상파 미술 화집하고, 최정호 씨의 <藝>하고...” 나는 순간적으로 반응했다. “어, <藝>가 책으로 나왔어?” 장정이 고급스럽고 화사하게 엮어진 책이었다. 나는 두고 두고 그 책을 몇 번이나 읽었다. 함께 옆방에 계시던 송지영 선생도 빌려 읽으셨다. 


     그로부터 한 7~8년 지나서였을까. 나는 <월간중앙> 차장으로 중앙일보사에 근무하고 있었다. 하루는 새 주간이 부임해 왔다. 최정호 교수였다. 연세대 교수 겸, 중앙일보 논설위원 겸, <월간중앙> 최정호 주간. 그 때 그 <藝>의 최정호 기자하고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나. 인연 있는 사람과의 조우는 이래서 정해진 시간표인 모양이다. 최정호 주간의 인상은 <藝>의 문장 그대로, 멋스러운 딜레탄트의 모습이었다. 굵은 안경테에, 팔꿈치에 가죽을 댄 홈스펀 자켓 차림으로 파이프를 손에 쥔 30대 중반의 ‘유럽형 인텔리’-첫 만남이 그렇게 이루어졌다.  


     최정호 주간은 편집회의 때 "그렇게 좁게만 들어가지 말고 좀 높히 띠워야지...“라고 말하곤 했다. 때는 서슬 푸른 유신 선포 직전, 나는 여전히 정치경제학적인 개입론자였다. 그럴 때마다 인문학적, 미학적 개입론자인 최정호 주간의 안목은 <월간중앙>의 격(格)을 한결 운치 있게 높혀 놓았다. 
     최정호 주간이 그 때 강조하던 편집 화두 가운데 하나는 ‘삶의 질’이었다. 압축성장이 한창 진행 중이던 70년대 초에 이미 최 주간은 ‘그 시대 이후’의 주제를 멀리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래서 나에게는 편집회의 이상의 대학원 수업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 대학원 시절은 그렇게 오래 가지 않았다. 최정호 주간이 <월간중앙>을 떠나 논설위원실로 복귀했기 때문이다. 이상한 것은 나 역시 얼마 되지 않아 최정호 주간을 흉내라도 내듯 논설위원 발령을 받았다. 유신이 선포된 바로 그 해 늦가을의 일이었다.

     논설위원이 된지 불과 4~5개월만인 1974년 4월 초순, 나는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이라는 태풍인지 광풍인지에 휩쓸려 중앙정보부에 연행 되었다. 긴급조치와 내란죄를 위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상군법회의를 거쳐 대법원에서 20년 형을 선고하고서도 고작 10개월만에 구속집행 정지라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편법으로 석방한 것을 보면, 그 사건이 과연 어떤 사건인지를 족히 헤아릴 만했다. 
     안양교도소에서 다른 많은 반(反)유신 정치범들과 함께 석방되던 날, 교도소 앞마당은 출감자들을 맞이하는 환영 인파와 취재진들로 붐볐다. 송구스럽게도 그 가운데는 최정호 선생을 포함한 중앙일보 논설위원실 선배들이 함께 와 계셨다. 그 분들은 추운 날씨에도 불고하고 거의 하루 종일을 기다렸다고 한다. 최정호 선생은 나의 어머니, 아내, 두 아이가 추워하는 것을 보고 "이리 오라"며 그들을 근처 조그만 바람막이 귀퉁이로 안내해 주었다고도 한다. 이렇게 해서 1975년 2월, 나는 다시 중앙일보 논설위원실로 생환할 수 있었다.
     최정호 선생은 몇 달 뒤 중앙일보를 떠났다. 그리곤 다시 몇 해 뒤 조선일보 비상임 논설위원으로 부임했다. 그로부터 5년여-나 역시 또 최정호 선생을 흉내라도 내듯, 1981년 1월 1일자로 조선일보 논설위원실로 따라갔다. 신군부가 등장한 직후였다. 인연은 현재진행형이었던 셈이다.

      최정호 선생은 항상 똑같은 지성적 차분함을 지키는 그 모습 그대로였다. 나도 그 무렵 20~30대적인 체질을 졸업 하고 40대의 성찰적인 안목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1차적 확신의 단계에서, 그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단계로, 그래서 보다 종합적인 세상 보기의 단계로-. 이 과정에서 최정호 선생은 아주 가까이도, 아주 멀지도 않은 거리에서 본인이 의식하지는 못했겠지만, 나의 컨닝 행위의 한 귀한 레퍼런스(reference)로 비쳐지고 있었다.
     최정호 선생은 독일로 건너가면서 조선일보를 떠났다. 그러나 나는 그 때는 또 따라가지 않았다. 그 후 자주 만날 기회는 없었다. 그러나 나는 최정호 선생이 인텔리로서, 문필가로서 자신의 명예를 묵묵히 지켜내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아마도 최정호 선생 역시 “저 친구 죽을 둥 살둥 하면서도 그래도 죽지 않고 버티네...”라고 콤멘트 했을 것도 같다.

      세월이 지나면서 나는 나와 최정호 선생이 문필인으로서 한 가지 공유하는 바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유럽 식 정치 지형(地形)을 기준으로 해서 볼 때, 계몽된 보수주의-자유주의와, 온건 사회민주당을 양안(兩岸)으로 하는 '절제(節制)'의 영역이 데모크라시의 가장 차선적인 제자리라고 보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 세상에 최선이란 없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이러한 설정은 한국의 1980년대 상황에서는 '당장의 것'이라기보다는 민주화 이후의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민주화는 왔다. 그리고 이념적인 조류의 추(錐)가 한 쪽 끝에서 다른 한 쪽 끝으로 급격하게 스윙 했다. 이럴 때 자유로운 지성은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카이저와 비스마르크가 군림했을 때 자유로운 지성은 '불온한 급진'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그러나 볼셰비키의 제3 인터내셔널이 유럽 상공에 저회 했을 때, 자유로운 지성은 좌 쪽 스탈린주의에 대한 방파제 몫도 해야 했다. 1987년 이후 한국의 자유로운 지성-조금 보수 쪽으로 기우뚱 한 것이든, 조금 진보 쪽으로 기우뚱 한 것이든-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은 처지에 직면했을 성 싶다. 
     최정호 선생의 논조와 나의 논조 또한 그런 시대적인 타겟 이동의 궤적을, 숨길 이유 없이 드러냈다. '최정호 칼럼'은 보다 정제된 것인 데 비해 '류근일 칼럼'은 한결 격(激)했던 차이는 있었지만-. 아마도 이제는 우(右)의 수준을 격상 시키고 좌(左)의 구태(舊態)를 털어내라는 또 하나의 논제를 공유해야 할 때일지도 모르겠다. 

     산업화 민주화, 정보화, 40여년-그야말로 질풍노도 같은 파란만장의 풍상이었다. 최정호 선생과 나는 앞서거니 뒷서거니 일정한 간격을 두고서였지만, 그런 치열한 세월을 반세기 가까이 함께 한 선후배 동시대인이었다. 그 분의 희수는 그래서 나 자신의 '감개무량'으로도 다가온다. 이 연륜에 이르신 지금, 40년 전 저서 제목 그대로, 더할 나위 없는 예(藝), 기예(技藝)의 지예(至藝)-줄여서 예(藝)의 경지를 더욱 만끽하실 것을 소망해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