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손구원 통일안보중앙협 회장 ⓒ 뉴데일리
    ▲ 손구원 통일안보중앙협 회장 ⓒ 뉴데일리

    이승만 대통령 제44주기 추도식이 열리던 지난 18일 국립현충원 현충관. 손구원 통일안보중앙협의회 회장은 남다른 감회로 행사를 지켜보고 있었다.
    손 회장의 고향은 평안남도 순천. 6.25 전쟁에 인민군으로 남침했다가 국군의 포로가 된 그는 거제포로수용소에 수감됐다가 반공포로로 분류되어 부산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1953년 6월18일 원용덕 당시 헌병사령관이 지휘한 반공포로 석방 작전으로 자유의 몸이 됐다.

    “이 대통령은 새 삶을 주신 분이죠. 어떻게 그 은혜를 잊겠습니까?”

    손 회장은 “당시 반공포로들이 이 대통령에게 석방시켜달라는 혈서나 탄원서를 많이 보냈다”며 “우방국인 미군에게 총을 겨눈 결심은 참 힘들었을 것”이라며 고마워했다. 그는 "당시 이 대통령의 결단은 전 세계 자유진영이 찬사를 보낸 쾌거"라고 말했다.

    “당시 부산수용소는 4중 철조망이었어요. 헌병들이 침투해 그 철조망을 제거하고 우리더러 ‘나오라’고 소리를 치더군요. 미군이 사격을 해 반공포로 몇 명은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이 작전으로 2만 7389명의 반공포로들이 자유를 찾았다.

    “북한이 고향이긴 하지만 공산 치하에서 자유와 인권이 유린되고 폐쇄된 통제사회에서 겪은 뼈아픈 경험이 저를 남한을 택하게 했습니다.”

    손 회장은 인민군 장교단의 끈질긴 귀환 설득과 북한에 남겨진 직계가족에 대한 모진 협박에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자유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꼈고 수용소 내에서의 친공포로들의 잔학상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친공포로들이 있던 곳은 말 그대로 지옥이었어요. 버젓이 김일성 초상화에 인공기를 걸고는 매일같이 인민재판을 했습니다. 군가를 부르며 행진도 했어요. 심지어는 반공 포로들을 잡아 죽이곤 생매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유적공원으로 꾸며진 거제포로수용소는 당시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친공포로들은 수용소 근처의 민간인이나 피란민을 돈으로 매수하여 외부의 게릴라를 통해 북한과 연락을 취하고 전언(傳言)이나 투석(投石), 시호통신(視互通信)등으로 타지역과 연락하여 암암리에 조직을 만들고 정보를 교환하였다. 또 그들은 대수롭지 않은 일도 시비거리나 투쟁의 대상으로 삼아서 저항의 빌미로 만들었다. 이처럼 친공포로의 조직이 위협적인 세력으로 형성되자 한편으로 반공포로들도 단결하게 됨으로써 양자가 충돌하기 시작했다. 

  • ▲ 친공포로들이 반공포로를 학살하고 암매장한 장소. ⓒ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
    ▲ 친공포로들이 반공포로를 학살하고 암매장한 장소. ⓒ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

    친공포로들의 대표적인 반공포로 학살은 1951년 9월 17일 있었다. 제77수용소에 있던 친공포로의 해방동맹 본부는 비밀리에 대원들을 모아놓고 “북한군과 중공군이 대공세를 취하여 부산이 벌써 북한 공산군 수중에 들어 왔으며, 그 중 선봉대로서 1개 대대가 거제도에 상륙하여 포로들을 해방시키려고 전진 중에 있다”고 그들을 현혹시켰다. 그리고 거제도에 상륙할 그 선봉부대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투쟁 실적이 있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그 투쟁 실적이란 것이 '반동분자들을 색출하여 처단' 하는 것이었다.

    이 같은 선전 선동에 속은 친공포로들은 수용소마다 반공포로들을 찾아내 인민재판을 한 후 즉석에서 타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전 수용소에서 희생된 반공포로가 300명에 달했다.

      “말 그대로 지옥이었어요. 오죽했으면 수용소장이던 돗드 소장까지 납치됐겠습니까?”

    손 회장은 “수용소가 아니라 인민군 막사 같은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고생 끝에 찾은 자유였지만 수용소를 나와 보니 막막했다.

    “석방은 시켜줬는데 사후 대책이 없어요. 누구네 집에 가서 머물라고 하는데 다같이 어렵던 시절, 밥 한 끼 신세가 편할 리 없지요.”

    석방된 반공포로들은 파출소에 가서 밥 얻어먹고 새우잠을 자며 지내다 대부분 군에 입대하거나 경찰에 지원한다.

    손 회장 역시 경찰에 지원해 지리산 빨치산 토벌에 참가하기도 했다.

  • ▲ 반공포로 석방을 1면톱기사로 보도한 조선일보 지면. ⓒ 뉴데일리
    ▲ 반공포로 석방을 1면톱기사로 보도한 조선일보 지면. ⓒ 뉴데일리

    “반공포로들은 북한으로의 귀환을 포기하고 남한에 남았지만 호적도 없었어요. 당연히 병역의 의무가 없음에도 군과 공비토벌 전투경찰 등에 자원입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호적도 없는, 대한민국 국민도 아닌 이들은 군과 경찰로 싸우다 수없이 많이 희생당한다.

    “전사해도 호적이 없으니 아무 곳이나 묻으면 끝이지요. 3만에 이르는 반공포로 중 그렇게 죽은 동지들이 많습니다.” 

    거제수용소 시절 ‘대한반공청년단’이란 이름으로 뭉쳤던 이들은 전쟁 뒤 통일안보중앙협의회라는 이름으로 지금에 이르고 있다. 매년 석방기념일인 6월18일 반공의 날과 음력 9월9일인 중양절에 모임을 갖고 합동위령제를 지내며 서로를 위로하며 지낸다. 또 북한의 현안이나 안보와 관련,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반공포로들은 나름대로 한국 정부에 공헌한 바가 큽니다. 그럼에도 정부의 현행 귀순자법에서 제외되어 법의 보호를 전혀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손 회장은 가족을 버리고 남한을, 자유를 택한 이들에게 국민이며 정부가 최소한의 관심이라도 가져주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