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9년 5월23일 아침에 자살한 이는 노무현 전 대통령만이 아니었다. 한국의 언론이 동반자살한 날로 기억될 것이다. 이런 나의 주장에 대한 증거물이 있다. 바로 ‘나’이다. <언론은 보도기사에서 ‘자살’이라고 해야지 ‘서거’라고 쓰면 안 된다>는 나의 글(chogabje.com)을 놓고서 ‘고인에 대한 폄훼’ 운운하면서 비판한 이들 중엔 기자들이 많았다. 
     
    그 무렵 한 공영방송 기자가 전화를 걸어왔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를 자살이라고 써야 한다고 주장하셔서 여론의 뭇매를 맞고 계시는데, 이와 관련하여 인터뷰를 하려 합니다." 
     
    내가 반문(反問)하였다. 
     
    "여론의 뭇매라고요? 나는 여론의 뭇매를 맞은 적이 없는데요. 철부지들이 욕설을 하는 경우는 있는데, 이건 여론이 아니예요. 저한테 걸려오는 전화는 찬성이 훨씬 많아요. 여론의 뭇매,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려는 겁니다." 
     
    "언론이 자살을 자살이라고 보도하여야 한다는 이야기는, 태양은 동쪽에서 뜬다는 주장과 같은데, 왜 내가 해명을 합니까? 기자가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합니까?" 
     
    신문에 '투신 서거' 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기자들은 자살이란 말을 쓰기 싫어하였다. 두려워하였다고 해야 맞을지 모르겠다. 이탈리아의 위대한 물리학자 갈릴레오는 17세기에 지동설(地動說)을 주장하였다가 교황청에 불려가 종교재판을 받고 말년을 연금된 상태에서 지냈다. 실명(失明)하고 죽었다. 종교가 과학을 탄압하던 시절이었다. 
     
    "언론은 자살을 자살이라고 써야 한다"는 주장은 "지구는 태양 주변을 돈다"는 주장과 같은 진리이다. 나는 21세기 한국에서 갈릴레오처럼 비판 받는 존재가 되었다. 더구나 기자들로부터! 21세기의 기자는, 갈릴레오를 재판한 교황청을 비판하는 기사를 써야 할 터인데, 갈릴레오한테 전화를 걸어 "왜 지동설(地動說)을 주장하여 여론의 뭇매를 맞습니까?"라고 따지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의 기자들은 온갖 물질적, 기술적 풍요를 누리고 있으나 그 정신세계는 중세 암흑기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자살이라고 표기할 자유를 말살하려는 세력은 김정일을 위원장이라고 부르지 않을 자유도 말살할 수 있는 이들이다. 독재는 국민의 양심이나 사(私)생활엔 간여하지 않지만 공산주의나 파쇼 같은 전체주의는 양심과 사생활도 통제한다. 노무현씨의 죽음을 서거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욕하는 기자들은 언론사를 떠나야 한다. 가슴에 괴벨스나 김일성을 품고서 진실을 전할 순 없는 것이다. 
     
    영국 소설가 조지 오웰은 스탈린과 히틀러, 공산주의와 파쇼를 같은 부류(部類)로 본 사람이다. 그는 기자들에게 참고가 될 만한 말들을 남겼다. 
     
    공산주의를 고발한 소설 ‘1984년’에서 그는 <2+2는 4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는 희망이 있다>고 하였다. 스페인 내전(內戰) 때 유럽의 좌익 지식인들을 따라서 공화파 편에 종군(從軍)하였다가 공산주의자들의 본질을 본 그는 이 사실을 소설로 썼다. 좌익 득세 분위기가 두려워 이 소설의 게재를 거부하는 잡지 편집장에게 그는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 신념이 사실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지금 언론계로 파고든 좌경세력은 언론을 자신들의 파괴적 신념을 실천하는 도구로 악용한다. 사실 위에 정의(正義)가 서야 하는데 정의(正義) 위에 사실을 세우려 하니 언론이 선동기관화되고 기자는 선전원이 되고 언론 문법에 맞지 않는 기사가 넘친다. 
     
    MBC, KBS, SBS, 한겨레, 경향신문뿐 아니라 보수신문들도 겁을 먹고 국민장 기간에 “2 더하기 2는 4”라고 말하지 못하였다. 절망적 상황에서 그래도 진실의 불씨를 지켜간 이들은 김동길, 변희재, 이장춘, 이동복, 조갑제닷컴, 프리존뉴스, 올인코리아, 국민행동본부 같은 ‘소수의 의인(義人)들’이었다. 국민장이 끝나자 ‘군중폭란(暴亂)의 공포’에 사로잡혔던 보수신문들이 제 자리로 돌아오고 침묵하던 국민들이 발언하기 시작하면서 정부와 공권력도 제 정신을 차리기 시작하였다. 작년 촛불난동 과정과 비슷한 전개(展開)였다. 
     
    언론의 정도(正道)를 지키려고 애쓰는 몇 개의 신문과 몇 개의 인터넷 매체를 제외하고 한국의 신문, 방송, 인터넷 세상에 과연 언론인이나 기자라고 부를 수 있는 이들이 있는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 조사를 받을 때는 열심히 비리(非理)혐의를 파헤치다가 자살하니 순간적으로 표변, 같은 입으로 그를 성군(聖君)으로 만드는 기술과 양심을 가진 이들을 기자나 언론이라고 부르고 그렇게 대우해주는 것은, 괴벨스를 방송통신위원장에 앉히는 것과 같은 국가적 자살행위이다. 
     
    국민들이, KBS와 MBC 선동일꾼들을 기자로 간주하고 그들의 보도를 경청하는 것만큼 심한 자기모멸은 없을 것이다. 한국 언론의 정상화 운동은 국민들로 하여금 MBC와 KBS를 선동기관으로 정확하게 인식하도록 하는 데서 출발하여야 한다. 
     
    기자와 선동꾼의 결정적 차이가 있다. 기자는 오보(誤報)를 하면 사과하고 바로잡는다. 선동꾼은 MBC의 PD나 기자들처럼 오보(誤報)와 조작을 하고도 뉘우침은커녕 이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 때 한국언론학회가 KBS와 MBC의 편파보도를 수치화한 자료가 있다. 
     
    [KBS는 국회의 탄핵의결 이튿날 ‘탄핵정국 국민에게 듣는다’와 ‘대통령 탄핵-대한민국 어디로 가는가’에 57명을 출연시켰다. 22명이 탄핵반대 입장, 한 명만이 탄핵 찬성 입장이었다. 22-1의 편향성이었다. 이 두 프로엔 65건의 인터뷰가 소개되었는데 60건이 탄핵반대, 5건이 탄핵찬성이었다. 60-5의 편파성이었다.]
     
     [MBC 앵커 멘트의 47.6%가 탄핵 반대 집단을 두둔한 반면, 찬성 집단을 두둔한 멘트는 단 한 건도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신강균…」에서 방송된 11건의 리포트는 한 건도 빠짐없이 탄핵 반대를 두둔한 리포트를 한 것으로 나타났다. 극단적 편향성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KBS는 2002년 대선(大選)을 앞두고 7월24일부터 95일 동안, 뒤에 가짜로 밝혀진, 김대업의 이회창(李會昌) 후보 아들 병역(兵役) 관련 폭로 사건을 101건이나 보도했고, 8월 한 달에만 하루 평균 2.3건씩 모두 70건을 집중 보도하여 지지율을 곤두박질치게 하였다. 
     
    김대업 사기폭로, 두 여중생 사망 촛불시위, 탄핵사태, 광우(狂牛)난동, 그리고 이번의 자살 미화(美化)를 주도한 KBS, MBC가 좌파정권을 만들고, 그 정권을 지켜냈으며, 이젠 이명박 정부를 공격하고 있다. 이런 발작적 선동을 통하여 그들은 언론의 원칙을 파괴하고 국민교양을 무너뜨렸으며 법질서를 흔들고 있다. 한국의 어린 민주주의와 공동체의 규범을 파괴하는 ‘공공의 적(敵)’이 ‘공영방송’을 자칭한다. 지금 한반도에서 정신적으로 가장 부패하고 타락한 6대 집단이 있다면 김정일 정권과 KBS, MBC, 그리고 웰빙정당 한나라당, 깽판정당 민주당, 반역정당 민노당이 아닐까? 
     
    정권이 방송을 장악한 것이 아니라 방송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KBS와 MBC를 1년간 문을 닫게 한 뒤 국민들의 정신건강과 학생들의 애국심과 법질서의 수준을 조사하는 실험을 한다면 ‘놀라운 개선(改善)’이란 답이 나올 것이다. KBS와 MBC가 발작적으로 선동하면 건전한 국민들 중 반 정도는 속아 넘어간다. 
     
    이명박(李明博) 정부가 이들의 만행을 응징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들을 언론기관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들의 본질을 직시(直視)하고, 이들을 선동기관과 선전원으로 간주하여 법대로 처리하지 않는 한 용기도, 대책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KBS와 MBC가 있는 한 한국인들은 “2 더하기 2는 4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릴 수 없다. 언론의 이름으로 언론의 자유를, 공영(公營)의 이름으로 공동체를 파괴하는 이 괴물을 어떻게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