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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4일 오후 7시40분쯤 서울외곽순환도로 청계요금소. 하이패스 차로를 황급히 건너던 김모(49)씨를 고속버스가 치었다. 김씨는 인근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사망했다. 김씨는 하이패스를 통과하려다 차단기가 가로막자 당황해 차를 세우고 정산하기 위해 되돌아오던 중이었다.

    고속도로 순찰대에 따르면, 이번 사고는 지난 한 달 사이 두 번째 벌어진 하이패스 차로 사망 사고였다. 지난달 24일에도 하이패스 차로에서 앞서 가던 1t화물차가 급정거하는 바람에 승합차를 운전하던 김모(54)씨가 뒤에서 들이받아 사망했다. 조사 결과 화물차 운전자는 하이패스 단말기 전원이 빠져 차단기가 올라가지 않자 급제동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이패스는 고속도로에 드나들 때 요금소에서 차를 멈추지 않아도 되도록 한 무인(無人) 정산 시스템이다. 2000년 시범 도입돼 2007년 12월엔 도로공사가 전국 영업소로 완전 개통했다. 지난 4월까지 하이패스 단말기를 설치한 차량이 228만5347대에 이른다.

    그런데 지난해 8월부터 요금 미납률 해소 등을 이유로 하이패스 차로에 차단기를 설치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도로공사가 지난해 8월 이후 지난 4월까지 8개월여 동안 발생했다고 집계한 사고만 98건이다. 간단한 접촉사고는 제외하고 추돌사고 등 비교적 큰 사고만 집계했는데도 이렇다.

    ◆하루 오작동 1000건 넘어

    이처럼 사고가 많이 생기는 이유는 하이패스 오작동 때문이다. 19일 도로공사가 밝힌 하이패스 오작동률은 0.11%로, 1000건당 1번 정도 오작동이 생긴다. 비율 자체는 높지 않지만 지난 4월의 하루 평균 하이패스 이용차량이 113만대임을 감안하면 하루에 1244번 오작동이 발생하는 셈이다.

    서울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박모(48)씨는 음식 재료를 구하러 일주일에 2번꼴로 지방을 내려간다. 고속도로 이용이 잦은 그는 "차단기 때문에 놀랐던 게 3~4차례는 된다"고 했다.

    "한번은 차단기가 열리지 않아 하이패스 차로에서 급정거를 하려 했는데, 뒤 차가 바짝 쫓아오는 바람에 그냥 차단기를 뚫고 지났습니다. 그제야 차단기가 스티로폼 재질이라는 걸 알았죠."

    도로공사측은 설치한 차단기가 스티로폼 같은 연성(軟性) 재질이라 혹시 차단기가 오작동으로 열리지 않아도 일단 차단기를 치고 통과한 뒤 요금을 나중에 내면 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차단기를 설치한 것 자체가 오히려 사고 위험을 높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교통연구원 첨단교통연구실 이재준 박사는 "차단기가 아무리 연성 재질이라도 운전자들은 심리적으로 눈앞에 가로막는 물체가 있으면 급정거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하이패스 사고가 계속되자 고속도로순찰대는 지난 5월 초 도로공사에 "하이패스 안전 차단바(bar) 제거 등 시설개선을 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차단기 제거하는 게 낫다"

    도로공사로부터 차단기 관련 연구 용역을 맡았던 교통문화운동본부 박용훈 대표는 "차단기는 체납 차량을 규제하기 위해 필요했던 부분이고, 이용객들에 대한 홍보가 부족해 혼란이 커진 측면이 있어 대국민 교육과 홍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도로공사측은 홍보 부족을 인정하고, 운전자들이 자발적으로 하이패스 차로에서 규정속도(시속 30㎞)를 지키고 주의 운전해 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하이패스 사고를 줄이기 위해서는 차단기보다 다른 대안을 마련하는 게 낫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말 '하이패스 사업평가'를 진행한 국회예산정책처 안태훈 평가관은 "차단기 작동으로 급정거하는 차량을 줄이기 위해서는 정산이 안 됐다는 것을 표시하는 '경고등'을 부착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했다. 하이패스 미납 차량 발생 문제는 요금소마다 카메라를 설치해 단속하고 있으니 차단기는 없애도 된다는 것이다.

    한국교통연구원 이재준 박사는 "하이패스 통과 차량의 속도를 줄이는 게 목적이라면 톨게이트 근처 도로를 유도봉 등을 이용해 구불구불하게 지나도록 만들어 속도를 자연스럽게 줄이는 게 나은 방법"이라고 말했다. 현재 도로요철·안내표지·시선유도봉 등을 설치해 놓았지만, 전문가들은 속도를 더 줄이기 위해 과속 방지턱까지도 검토해볼 만하다고 지적했다.

    외국의 경우 차단기가 설치된 경우 저속 운행하거나 정차 후 운행토록 단속하고 있다. 이탈리아는 차단기는 설치돼 있지만 일단 정차한 뒤 차량이 통과하도록 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는 주마다 다르지만 차단기가 설치되지 않은 지역이 많다. 또 일본은 차단기는 설치됐지만 시속 20㎞로 서행하도록 하고 있다.

    우리도 시속 30㎞ 규정은 있지만, 실제 통과 속도는 60㎞ 정도로 실질적인 단속 건수는 없는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