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0일 기자회견을 통해 자진 사퇴 의사를 밝힌 김석기 경찰청장 내정자(서울지방경찰청장)은 회견 직후 대전현충원애 들러 용산 철거민 난동 사건때 순직한 고 김남훈 경사의 묘역을 참배했다. 

    김 청장은 참배 후 한 언론사 기자와 만나 "전후(戰後) 화염병과 쇠파이프가 난무하던 일본은 1969년 도쿄대 야스다 강당 점거와 진압사건을 계기로 불법·폭력시위와 결별했다"며 "모든 분야에서 일본을 따라잡은 한국이 왜 시위 문화만은 40년 전 일본을 극복하지 못하느냐"고 했다. 그는 "비록 나는 사퇴 하지만 이번 사건이 법과 원칙을 바로 세우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야스다 강당(安田 講堂)
    일본 동경대학교 혼고캠퍼스에 있는 강당. 정식 이름은 동경대학 대강당. 수용 인원은 1144석. 동경대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야스다 재벌이 창시자 야스다 센지로의 이름을 숨기는 것을 조건으로 건설해 기부했지만 야스다가 암살된 이후 그를 기려 야스다 강당으로 불리게 됐다. 도쿄대학 건축학과의 우치다 요시카즈(이후 총장)가 기본 설계를 맡고, 제자 기시다 히데토가 건설을 맡았다. 1921년에 기공한 뒤 관동대지진으로 공사가 중단됐다가, 1925년 7월 6일 준공됐다.

    1968년 전공투 학생들에게 점거됐다가 불탄 채 94년까지 폐쇄됐다. 94년 보수공사가 끝난 뒤 다시 공개됐다. 동경대는 1991년부터 이곳에서 졸업식을 치르고 있다.
    김 청장이 말한 '야스다 강당' 사건은 1968년 1월18일 그 전 해부터 동경대를 점령하고 있던 좌파학생 운동조직 '전학공투회의'(전공투·全共鬪)와 신좌파 소속 학생들이 야스다 강당을 점거한 채 경찰에 맞서다 진압된 사건을 말한다. 

    당시 화염병과 몽둥이 등으로 무장한 좌파 학생들은 헬리콥터까지 동원한 경찰을 향해 새총으로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격렬히 저항했다. 이들은 이튿날 강당이 불길에 휩싸이면서 결국 진압됐다.

    야스다 강당 사건 이후 일본 국민의 분노를 한몸에 받은 일본 학생운동 세력은 급격히 위축됐다. 그 중 일부 잔존 세력은 점점 과격화하면서 급기야는 운동을 전쟁으로 규정하고 무기를 들고 무장투쟁까지 벌이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적군파로 이름을 바꾼 이들은 70년에 요도호 납치사건을 저질렀고 72년에는 연합적군파가 출연해 내부 의견 차이를 빌미로 동료 14명을 살해해 암매장하는 발악을 벌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 사건 여파로 일본 학생운동은 결국 완전히 궤멸됐다.

    아래 사진은 용산 철거민 난동 사태에서 나타난 모습과 비슷한 야스다 강당 사건 당시 사진(유튜브에서 캡처)






    아래 사진은 용산 철거민 난동 사건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