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일보 23일자 오피니언면 '포럼'에 신중섭 강원대 교수(서양철학 전공)가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를 둘러싸고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현재 고등학교에서 사용되고 있는 교과서가 ‘좌편향’이라는 지적은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고등학교 교과서가 우리 미래 주인공들의 생각과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는 확신 아래 민간 단체인 교과서포럼은 그동안 연구와 발표를 통해 ‘좌편향’ 교과서의 문제점과 위험성을 줄기차게 주장해 왔지만 정부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좌편향’ 교과서가 버젓이 고등학교 교과서로 채택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문제의 교과서를 정부가 허용해 주었기 때문이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중·고등학교에서 사용되는 교과서의 적합성 여부를 검정 심사할 수 있는 합법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다. ‘좌편향’ 교과서를 집필한 것은 대학교수와 교사들이지만 그것의 승인 여부는 교육과학기술부의 일이다. 현재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가운데 ‘좌편향’적인 내용이 포함돼 있다면 그 책임은 전적으로 교육과학기술부에 있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좌편향’ 교과서를 바로잡아, 자라나는 미래의 주인공에게 올바른 역사관과 정당한 우리 역사를 교육하려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아쉬운 것은 정부가 ‘좌편향’ 교과서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이를 국가 차원에서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주체적으로 시작하지 않고, 대한상공회의소, 교과서포럼 등 민간 단체와 국방부·통일부 등 일부 정부 부처가 현재 초·중·고등학교에서 사용하고 있는 일부 교과서가 좌파적 시각에서 기술돼 있다며 바로잡을 것을 요청한 뒤에 교육과학기술부가 국사편찬위원회에 상세한 분석을 의뢰했다는 것이다.

    교과서의 문제는 그것이 ‘좌편향’이냐 ‘우편향’이냐가 아니라 우리 헌법 정신의 위배 여부다. 특히 지적으로 성숙하지 못하여 자기 판단 능력이 완성되지 않은 어린 학생들에게 잘못된 내용을 교육하는 것은 어떤 논리와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그동안 우리 교육은 정치 권력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정권이 교체되면 정권의 정파적 이익에 맞춰 교과서를 개편했다. 교과서에 원칙적으로 정파의 이해 관계가 배제돼야 하기 때문에 정치권이 교과서 문제에 개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좌편향 교과서 논란을 잠재우고 바른 교과서로 가기 위한 첫걸음은 ‘바름’의 기준을 올바르게 설정하는 것이고, 그것은 대다수 국민의 동의에서 시작한다.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좌편향’이니 ‘우편향’이니 하는 논란이 발생하고, 권력 의지로 교과서의 내용을 수정하거나 교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우선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이 기준을 바로세우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일이다. 우리 나라는 헌법에 명시된 바와 같이 자유·민주 공화국이기 때문에 교과서의 정당성도 여기에 기초해야 한다. 현행 교과서가 ‘좌편향’인가 아닌가 하는 것도 명백하게 헌법에 기초하여 판단돼야 한다. 현재 교과서가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원리를 부정하고 있다면 그것은 명백하게 헌법의 근본 정신과 어긋난다. 그것은 ‘편향’이 아니라 헌법을 파괴하는 것이다. 만일 현행 교과서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북한 체제의 우월성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편향이 아니라 이 나라의 존립 근거를 허무는 것이다. 현재 ‘좌편향’ 교과서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교과서가 만일 이런 교과서라면 그것은 수정이 아니라 폐기돼야 마땅하다.

    헌법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좌편향’의 존립을 인정하는 ‘균형’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균형을 논의할 것이 아니라 헌법과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대한 입장을 따져야 한다. 국가가 정파의 이해를 떠나 헌법 정신에 입각하여 교과서 문제를 처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