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 23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김순덕 편집국 부국장이 쓴 '우상과 이성의 뒷담화'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미국의 한 교수가 매사추세츠공대(MIT) 학생을 상대로 실험을 했다. 한 학기에 세 개의 과제물을 제출하되 A그룹엔 세 차례의 마감일을 미리 스스로 정해서 지키게 했고, B그룹엔 학기 마지막 날까지 내기만 하면 된다고 했으며, C그룹에는 교수가 정한 세 번의 마감일을 꼬박꼬박 지키라고 했다.

    과제물의 완성도는 일단 제쳐두자. 마감일에서 하루 늦어질 때마다 점수를 깎았을 때 최상의 성적을 얻은 그룹은 어디였을까.

    인간에 대한 믿음이 흔들린다

    MIT에서 행동경제학을 가르치는 댄 에이릴리 교수의 이 실험에서 제일 성적이 좋은 집단은 강제규정을 뒀던 C그룹으로 나타났다. 최대한의 자율성을 준 B그룹은 막판에 과제물 세 개를 놓고 쩔쩔매다 마감일을 놓쳐 성적이 최악이었다. 적당한 간격을 두고 직접 마감일을 선택하게 한 A그룹은 중간이다. 아직 젊지만 지적이고, 최고의 명문대에 입학하기까지 자기절제력도 상당했을 대학생들도 그랬다.

    “인간은 자유의지와 이성을 믿고 싶어 하지만 실제론 나약하기 그지없어 ‘외부의 힘’이 필요하다”는 그의 결론은, 부인할 수 없기에 더 밉다. 이성적으로 찬찬히 따져보면 뭐가 옳고 얼마나 이득인지 충분히 알 만한데도 내 마음을 마음대로 하지 못해 그르친 적이 사람마다 몇 번은 있지 않던가.

    대학 과제물 마감이야 교수의 교육관이나 학교의 건학 이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지식경쟁력 확보라는 목표가 분명한 대학이라면 교수가 엄격한 마감일을 정해 주는 게 최상일 것이고, “공부가 다냐” “대학이 취업 준비기관이냐”라고 믿는다면 마감일이나 과제물을 아예 없애도 괜찮을 터다.

    하지만 이 연구결과를 국가에 대입해 보면 얘기는 달라진다. 집권세력 치고 국정 목표나 정책이 잘못됐다고 믿는 정권은 없다. 그래도 정부 명령대로 국민이 꼼짝없이 따라야만 하는 국가는 권위주의 정권이다. 블라디미르 푸틴같이 막강 카리스마를 지니지 않는 한, 국민의 지지를 받기 힘들다. 

    그렇다고 시장기능만 믿고 정부는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상황으로 급변해 버렸다. 인플레이션 걱정 없고 금리도 낮아 돈이 마구 넘쳐나던 골디락스 글로벌 경제는 지난해 우리가 끼어보지도 못한 사이 막을 내렸다. 미국 대통령선거 유세에서 시장 중심의 세계화를 버리고 국가 주도의 보호주의로 돌아서야 한다는 주장이 세를 얻을 정도다.

    그래서 인간의 비합리성을 충분히 아는 행동경제학자들은 좌파의 큰 정부도, 우파의 작은 정부도 아닌 ‘스마트 정부’를 강조하고 나섰다. 국민이 이성적으로 선택하면 분명 국리민복을 주는 제도를 정부가 만들되, 하기 싫으면 빠져도 되도록 하자는 주장이 자유주의적 개입주의(libertarian paternalism)다. 제도 자체는 평안감사 뺨치므로 가만히 있으면 혜택을 누릴 수 있지만 굳이 싫다면 ‘안하면 되고’라는 거다. 

    평안감사도 안할 자유를 허(許)하면

    내 자식이 나보다 잘살기를 원하는 나라에선 경제성장에 힘쓰게 마련이고, 성장률을 높이기 위해선 생산력 향상이 필수이며, 그러자면 경쟁력 있는 휴먼 캐피털이 절실하다. 이 때문에 경쟁이라는 외부의 힘을 도입하는 게 세계적인 추세다. 그래도 경쟁도, 경쟁력도 싫다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미국 시카고대 교수 리처드 탤러와 카스 선스테인의 최근 저서 ‘팔꿈치로 슬쩍 찌르기(Nudge)’식으로 하면, 수준 낮은 공립학교가 가장 향상될 수 있도록 교육에 경쟁을 도입하고 성과를 공개하되 그게 싫으면 안 갈 수 있는 선택권을 보장하자는 거다. 여기에 뒤처진 이들을 위한 사회적 배려를 갖추면 좌파든 우파든 괜히 찬반논란으로 밤낮을 지새울 이유가 없어진다.

    지금 세계화와 시장경제, 경쟁력과 이성은 함께 달려가고 있지만 전혀 다른 가치관을 지닌 사람에게는 한낱 우상(偶像)으로 보일 수 있다. 어느 쪽이 우상(愚相)이든 누가 누구의 발목잡기는 말았으면 좋겠다. 싫으면 안하면 되는 자유를 누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