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7일자 오피니언면에 실린 이 신문 강천석 주필의 칼럼 '헛방 이후―정동영과 이회창의 딜레마'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복권(福券)의 재미는 낄낄대며 맞춰보다 버리는 재미다. 낙방한 복권을 지갑에 넣고 다니며 두고두고 애석해하거나 헛방이 됐다 해서 생업을 포기하고 복권 회사를 찾아가 항의하는 사람은 없다.

    정치복권도 마찬가지다. ‘김경준 복권’이 복권도 그냥 복권이 아니라 ‘사기 복권’이라는 것이 검찰 수사 결과다. 김경준에게는 ‘횡령’ ‘주가 조작’ ‘사문서 위조’ ‘위조문서 행사’죄가 적용됐고, 이명박 후보의 이른바 ‘3대 의혹’에 대해선 ‘무혐의’ ‘사실 무근’ ‘무혐의’ 판정을 내렸다. 여론조사는 검찰 수사 결과를 ‘믿는다’보다 ‘믿지 않는다’가 조금 더 많거나 비슷한 것으로 나타났다. 1년여 동안 매일 밤 TV를 지켜보노라면 누구나가 김경준과 그의 처 그리고 누나 에리카 김의 조곤조곤한 말씨에 긴가민가할 지경이었다. 그게 하룻밤에 씻겨 나갈 리 없다. 김경준네 식구들은 ‘서울 회견’의 파괴력이 ‘LA회견’보다 몇 배가 클 텐데도 뭐가 그리 겁나 서울을 마다하고 굳이 LA 화상(畵像)인터뷰에 매달리는지 모를 일이다.

    더 이상한 것은 다른 후보들 움직임이다. 투표일은 이제 12일 남았다. 이대로 가면 상당수 국민은 BBK의 흙탕물을 뒤집어쓴 채 투표장으로 향하게 된다. 다른 후보, 특히 메이저리그 소속인 정동영·이회창 후보는 이 상황이 자신들에게 유리한지 불리한지를 신속히 판단해야 한다. 어쩌면 검찰 발표를 믿지 않는 국민이 믿는 국민보다 많거나 비슷하다는 사실에 은근히 기대를 걸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건 오판(誤判)이다. 검찰 발표 다음날 여론조사는 이명박 지지율 4.7% 상승, 정동영 0.5% 상승, 이회창 0.5% 하락으로 나타났다. 미세하지만 피해는 예상대로 이회창에게 돌아갔다. 이명박 지지율이 앞으로도 계속 솟아오를지는 의문이지만, 검찰 발표를 믿지 않는 국민이 정동영의 응원군(應援軍)이 될 지는 몰라도 이회창의 응원군은 되지 못하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명박의 지지 기반은 노무현 정권 5년의 실정(失政) 기록이다. 국민은 청계천 복원과 버스노선 개혁에 끌려서만이 아니라 노무현 대통령과 가장 차별되는 후보를 고르다 고르다 이명박 주변까지 밀려든 것이다. 그러다 보니 위장 전입도, 위장 취업도 허물로 비치지 않는다는 이상(異常)현상마저 나타났다.

    이명박과 이회창은 다같이 노 대통령의 반대편 인물이다. 한쪽의 지지가 높아지면 다른 한쪽의 지지가 줄어드는 식으로 지지율이 연동(連動)돼서 움직인다. 어떤 시점에 이르면 쏠림현상이 나타날 가능성도 있다. 전략적으론 검찰 수사에 죽기 살기로 대들어야 할 사람은 이회창이다. 그러나 그럴 경우 ‘미스터 법(法)대로’의 이미지가 함께 풍비박산 날 리스크를 각오해야 한다.

    정동영은 노 대통령과 같은 쪽 인물이라서 이명박과 이회창의 지지도 변화와는 직접 비례(比例) 관계에 있지 않다. 오히려 이명박 지지도 급상승이 반한나라당 세력을 응집시킨다는 점에선 ‘적대적(敵對的) 의존관계’라고 부를 만도 하다. 이명박 지지율 상승이 정동영 지지율 상승을 유도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번 정동영 지지율의 약(弱)상승은 검찰 발표의 결과 때문만이 아니라 정동영과 문국현의 단일화 가능성이 거론되면서 문국현 지지층이 일부 정동영 지지로 이동한 영향도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노 대통령의 5년 세월은 이명박의 최대 우군(友軍)이자 정동영의 최대 적군(敵軍)이다. 따라서 정동영의 유효(有效) 전략은 중간층 유권자들에게 노 대통령과 같은 쪽에 서있지만 품성과 정책은 딴판이라는 걸 보여 주는 것이다. 여기에 문국현, 나아가 이인제와의 단일화 효과가 겹치면 정동영 지지율은 현정권 지지율인 30%에 육박하거나 넘어설 수 있다.

    정동영을 난감하게 만드는 현실의 벽(壁)은 냉담하게 식어버린 40대(유권자의 22.5%)와 거리를 방황하는 20대(유권자의 19.4%) 백수들이다. 5년 전 노무현 후보에게 당선 도장을 찍어주었던 40대는 자기들 손으로 만들어낸 정권 아래서 봉급은 9.3%, 세금은 13.7%가 오르는 기막힌 일을 겪었다. 무직가장(無職家長) 255만명의 상당수도 40대다. 이념을 뱉어버린 지 오래인 40대의 70% 가까이는 이미 이명박·이회창 쪽으로 가출(家出)했다. 20대의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무직자(無職者)이거나 비정규직이다. 스스로를 ‘88만원 세대’라고 부르는 이들에게 정동영의 구애(求愛)가 먹혀들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렇다고 종합부동산세 벼락을 맞은 38만명의 주류인 50대와 60대에게 눈인사를 보내봐야 별 무소득일 게 뻔하다. 비상(飛上)을 꿈꾸기에는 어깨에 얹힌 노무현 5년 세월의 짐이 여전히 너무 무겁다.

    이런 두 사람 공동의 딜레마가 정동영과 이회창으로 하여금 휴지가 돼 버린 ‘김경준 가짜 복권’을 여태 만지작만지작거리게 하고 있는 진짜 배경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