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신문 7일치 '편집국에서'란에 이 신문 정의길 국제팀 기자가 쓴 '박근혜의 부시 따라하기'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조지 부시 공화당 후보와 앨 고어 민주당 후보가 대결한 2000년 미국 대선이 본격화되기 전이다. 미국의 정치학자 대부분은 고어의 승리를 예측했다. 고어가 부통령으로 일했던 빌 클린턴 민주당 정부의 경제성과 때문이다. 전후 사상 최장의 호황기가 지속 중이었다. 미국 경제의 고질적 병폐인 재정적자도 해결됐다. 

    그 해 열린 96차 미국 정치학회에서 선거전문 정치학자 7명 중 6명은 고어의 승리를, 1명만이 박빙 승부를 추론했다. 이들 모두 별개의 통계작업을 진행했지만, 고어가 52.9~60.3%의 득표로 이긴다고 결론이 나왔다. 당시 부시의 선거를 지휘한 칼 로브 백악관 정치고문은 “그들이 맞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통계모델이 고어의 승리를 예측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 대선의 승리자가 고어가 될 것임을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부시의 선거운동은 두 가지에 초점이 맞춰졌다. 정책이 아니라 후보의 인물에, 그리고 상대방 우세 지역 탈취였다. 고어는 잘난체하고 거만한 인상이었다. 불교사원이 개입된 선거자금 모금에서 잡음도 있었다. 로브는 고어를 ‘여기서는 이 말 하고, 저기서는 저 말 하는’ 정치꾼으로 공격하기로 했다.

    이는 철저한 여론조사를 통해 나온 전략이었다. 2월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절반 정도가 고어는 ‘당선되기 위해서라면 무슨 말이라도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고어가 정치인인 이상 이 정도 반응은 당연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후보에 대한 부정적 정보를 알려준 다음 지지를 묻는 전화 여론조사 ‘푸시콜’ 결과, 고어가 의외로 취약했다. 고어의 부정적 정보를 들은 응답자 3분의 2 이상이 그의 정직성이 의심스럽고 당선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고어가 상대방 흠집만 내는 선거운동을 한다고 생각한 사람도 절반이 됐다.

    고어가 네거티브 캠페인에 취약하다는 것이다. 이는 그에 대한 유권자의 기대치가 높았기 때문이다. 그 해 3월12일 기자회견에서 부시는 “부통령은 당선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말하는 사람이다”라는 말을 20분 동안 네 번이나 반복하며 고어 비방에 나섰다. 선거판은 부시와 고어의 인물 됨됨이로 초점이 변했다. 지지율도 부시 우세로 돌아 선거 막판까지 지속됐다.

    올해 초 박근혜 의원 진영이 지지율 선두를 달리던 이명박 전 서울시장에게 검증론을 불쑥 들이댔다. 그리고 선거판을 주도하던 이 전 서울시장의 업적과 집행력은 많이 흐려지고, 그의 과거 행적이 이슈가 되고 있다. 정책에서 인물로 선거의 초점이 바뀐 것이다. 50%를 넘던 그에 대한 지지율도 두 달 만에 40% 초반으로 떨어졌다. 어느 정도 고어와 닮은꼴이 되어 버렸다. 무엇보다도 그는 ‘검증’이란 틀에 걸린 것 같다. 자신의 결백을 아무리 주장해도, 자신을 검증해야 한다는 상대방의 메시지만 전달하는 형국이다.

    이 전 시장은 또 현재 미국 대선의 선두주자인 공화당의 루돌프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과 닮은꼴이다. 줄리아니도 뉴욕시장으로서 성과는 높으나, 세 차례 이혼 등 복잡한 개인 행적이 뇌관으로 놓여있다. 고어를 반면교사로 삼고, 줄리아니의 행보를 유심히 볼 것이다.

    박 의원 진영의 부시 따라하기는 검증이란 틀을 만드는 데 성공했으나, 지지율 변화는 아직 크지 않다. 추가적인 검증 공세가 필요하단 얘기다. 무엇보다도 지금은 본선이 아니다. 박 의원이 지금처럼 보수정당인 한나라당에서 승리하고자 더욱 오른쪽으로 가고 검증 공세를 강화하면 본선에서 입지가 줄어들 수 있다. 부시처럼 중도를 끌어 올 ‘온정적 보수주의’ 같은 틀을 만들 여지가 남을지 의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