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7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양상훈 논설위원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한나라당이 이길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길 수밖에 없다는 이유도 정말 많다. 그러나 앞으로 그 반대 이유도 하나 둘씩 생길 것이다.

    열린우리당 의원 23명의 탈당으로 연말 대선에서 한나라당 후보가 지난 대선 때처럼 또 기호 1번이 되게 됐다. 우리나라 정치에서 ‘기호 1번’이 주는 심리적 상징성이 있다. 기호 1번은 강자(强者), 기호 2번은 약자(弱者)다. 1번은 가진 자, 지키는 자이고 2번은 없는 자, 도전하는 자다.

    우리 유권자들은 약자의 도전을 응원한다. 1997년 대선에서 DJP 연합이 기호 2번으로 승리한 때부터 지금까지 일곱 번의 전국 규모 선거가 있었다. 그 중 기호 2번이 여섯 번 승리했다. 기호 1번이 딱 한 번 이긴 2000년 총선도 사실은 기호 2번이 약진한 선거였다.

    ‘한나라당=강자, 기호 1번’은 반(反)한나라당 쪽에서 바라던 구도다. 앞으로 반한나라의 주축은 열린우리당이 아닌 신당(新黨)이 될 것이다. 신당은 노무현 대통령과 헤어진 다음에 민주당과 합치는 길로 가게 된다. 정권을 잡았던 여당의 이미지는 희미해지고 그럴듯한 약자의 기호 2번으로 재탄생할 것이다.

    “현 정권에 대한 국민의 반감이 너무 크기 때문에 이번엔 쇼가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람들이 많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시간이 가면 국민의 관심은 차츰 바뀐다. 이제 곧 ‘노무현 대 한나라당’의 대결 구도는 과거사가 된다. 한나라당에 유리했던 많은 이유들은 그 순간에 상당수가 의미가 없어진다. 2002년 대선 때도 그랬다.

    5년 전 이맘때 김대중 대통령의 지지도도 23%로 최악이었다. 온갖 게이트에다 마지막에는 아들들 비리까지 겹쳤다. 지역 기반만 없었다면 그의 지지도도 지금의 노 대통령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대선 국면에 들어가자 현직 대통령과 정권의 실정(失政)은 어느 순간 관심사에서 벗어났다. 야당이 “정권 심판”을 외쳤지만 먹혀 들지 않았다. ‘김대중’은 잊혀지고 세상의 관심은 ‘기호 1번 이회창 대(對) 2번 노무현’의 대결로 옮겨갔다.

    선거 승패를 결정하는 우리나라 특유의 지역적·심리적 기본 요인이 있다. 이 기본 요인이 근본적으로 바뀌기엔 5년은 너무 짧다. 우리 사회의 대세를 형성하는 심리는 ‘배고픈 것보다 배 아픈 것이 더 싫은’ 특성이다. 나쁘게 말하면 남 잘되는 꼴 못 보는 심리고, 좋게 말하면 밥보다 도덕에 더 민감한 심리다. 이념적으로는 자유보다는 평등에 기울어져 있는 특성이다. 2002년 대선 때 노무현 후보는 ‘배 아픈 것이 더 싫은’ 우리 사회의 심리에 잘 맞아떨어지는 사람이었고, 이회창 후보는 사람들 배 아프게 하는 사람이었다. 큰 승부는 거기에서 났다고 본다.

    현 정권의 실정(失政)이란 주로 국민을 배고프게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화가 난 국민들이 많지만 어느 순간 배 아픈 일이 발생하면 대세는 바뀔 수 있다. “그래도 설마” 하는 분들은 2002년 대선 때 이회창 후보의 ‘빌라게이트’를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100평이 넘는 빌라의 3개 층을 이 후보와 그 아들, 딸이 각각 쓰고 있는 것으로 드러난 ‘사건’이다.

    이 후보는 당시 지지율 1위였지만 많은 보수적인 사람들조차 그때 이 후보를 다시 보았다. 당시 정당팀장으로 취재했던 필자는 빌라게이트가 2002년 대선에서 한 분수령이었다고 믿는다. 우리 국민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지금도 한나라당이 가진 무기는 배고픈 것을 해결해 주겠다는 것이고, 배 아픈 것을 건드릴 수 있는 무기는 반(反)한나라당이 주로 갖고 있다. 배고픈 것을 해결하겠다는 당이 기호 1번이 되고, 배 아픈 것에 호소하는 당이 2번이 됐다. 한나라 대 반한나라의 인적 구성, 지역적 배경, 이념적 색깔에다 기호 1, 2번까지 지난 두 번의 대선 대결구도와 비슷하게 되돌아가고 있다. 1번이나 2번이나 싸움은 이제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