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신문 14일자 여론면에 이 신문 손석춘 기획위원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이완용은 억울했다. 매국노로 손가락질을 하는 무식한 백성에 연민을 느꼈다. 모든 게 그들을 위한 길이었다. 친일로 뚜벅뚜벅 걸어간 것도 고뇌 끝의 결단이었다. 어차피 자주국방이 불가능한 나라였다. 경제 자립이 어려운 조선 사람에게 일본과 합병해서 잘살게 해준 것도 자신이었다. 역사적 평가도 솔솔 우호적이다. 과학적 학문을 내건 서울대의 어느 수량경제학자는 일제 강점기에 근대화가 이뤄졌다고 부르댄다. 어찌 이완용이 억울하지 않겠는가.

    이완용이 더 씁쓸한 것은 조선일보 김대중 고문 탓이다. 김 고문은 이완용을 보기로 들며 노무현 대통령에게 ‘오판의 죄’를 물었다. 외교권을 일본에 넘겨준 ‘오판’의 연장선에서 김 고문은 노 대통령의 ‘대역죄’를 살천스레 추궁한다. 김 고문이 오판이라 판단한 것은 전시 작전통제권 환수다.

    김 고문은 줄기차게 한-미 동맹이 살길이라고 외쳤다. 물론, 그만은 아니다. 부자 신문의 논객들이 곰비임비 “아니 되오”를 합창한다. 언론인만도 아니다. 여기저기 ‘애국인사’들의 성명이 꼬리를 문다. 평생 학문에 전념했음을 자처한 ‘원로 교수’도 있다. ‘현실 발언’을 삼가며 학자적 ‘양심’을 지킨 그가 마침내 입을 연 게 전시 작통권 문제다. 군부독재가 민주시민을 투옥하고 학살할 때도 침묵하던 철학자까지 남우세스럽게 ‘현실 참여’를 했다. 딴은 박종철을 고문으로 죽인 경찰 총수까지 언죽번죽 나서는 판이다. 그런데 대체 저들은 누구에게 “아니 되오”를 외치는 걸까.

    미국은 딴 궁리를 한 지 오래다. 전시 작통권을 넘기며 생색에 잇속도 챙긴다. 다만, 이 땅의 자칭 ‘민족지’가 “가장 섹시한 남성”으로 노래했던 도널드 럼스펠드 미국 국방장관의 ‘감미로운 목소리’에 귀기울일 필요는 있다. 럼스펠드는 “솔직히 북한을 남한에 당면한 군사적 위협으로 보지 않는다”며, “북한의 재래식 군사력을 남한이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놀라운 증언이다. 하지만 미국 고위관리들의 익명 발언까지 언제나 금과옥조로 여겼던 저들은 럼스펠드를 사부자기 묵살한다. 비축해놓은 유류가 바닥 수준인 조선인민군이 첨단무기로 무장한 대한민국 국군을 상대로 침략한단다. 조국의 전시 작통권이 미국에 있어야 안전하다고 부르짖는 무리들 앞에서 이완용은 왜 자신이 매국노인지 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김 고문처럼 자신을 비난하며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윤똑똑이들을 볼 때 이완용의 고독은 사무친다.

    그뿐인가. 노 정권은 어떤가. 극우와 극좌를 싸잡아 비난하길 즐기는 이병완 비서실장은 또 특급호텔에서 특별 강연을 했다. 이 실장은 전시 작통권 환수에 반대하는 언론을 비판한 뒤, 곧바로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비난했다. 그는 “을사늑약이라는 망국적 비극이 왜 일어났는가” 묻고 일본보다 개방이 한발 늦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개방하지 않는 나라는 모두 망했다”며 거듭 힘을 주었다.

    전시 작통권을 대한민국이 지니면 나라가 망할 듯 호들갑 떠는 김 고문과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는 이 실장의 논리는 꼭 닮았다. 상황 부풀리기도 어금지금하다. 전시 작통권 환수에 ‘적화통일’을 우려하는 지독한 사대주의자의 단순논리 앞에 어떤 토론이 가능하겠는가. 자유무역협정을 반대하는 사람을 쇄국주의로 몰아치는 저 ‘개혁주의자’와 대화가 가능한가.

    현실을 곧추 볼 때다. 미국이 대한민국의 전시 작통권을 가져야 나라가 산다는 저 부라퀴들을 보라.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맺어야 대한민국이 산다는 저 권력자들을 보라. 그래서다. 이완용을 위한 변명을 쓴다. 분노를 머금고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