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연히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하루에 엄청나게 많은 접속자가 들어 온다는 블로그를 찾게 되었다. 대체 그 블로그가 누구의 블로그이며 어떻게 꾸며놨길래 그렇게 많은 이들이 접속을 하는지 궁금해서 그 블로그의 주인을 찾아보았다.
     
    그 블로그의 주인은 열린우리당 성남시장 후보인 이재명 씨(이하 이씨)이다. 믿어지지 않지만 5월 5일 오후 4시 20분 현재 이씨의 네이버 블로그 접속자 수는 8만 5천여명에 이른다.

    소년노동자 출신으로 장애를 딛고 일어선 이씨

    물론 8만 5천명이란 수치가 반복해서 접속하는 인원을 모두 합쳐 계산한 것인지 IP가 같은 접속자는 1번 접속한 것으로 처리되는 시스템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씨의 블로그에 적어도 2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5월 5일 접속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아무리 정치인이라 해도 개인의 블로그로서 일 2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접속한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전반적으로 보면 이씨의 블로그에 대중을 열광시킬만한 무슨 특이한 프로그램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러나 이씨의 살아온 길은 대중들에게 아련한 감동을 줄만한 것이었다.

    이 블로그의 주인 이씨는 64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 이씨는 혹독한 가난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부친과 형을 따라 서울로 상경했다. 이제부터는 그가 쓴 그의 인생사를 직접 읽어보도록 하자.

    이씨의 고단한 인생사

    아래 내용은 이씨가 자신의 웹사이트에 직접 쓴 글이다.

    텔레비젼을 보다가 "김C"라는 연예인을 본 적이 있습니다. 무언가 세상을 향해 시큰둥한 얼굴을 보여주면서 거침없는 말투에 좀처럼 보기 드문 사람이란 느낌이 들었지요.

    오락프로그램에 나와서는 방송국 소속의 아나운서와 게임을 벌이며 "정규직과 일용직의 대결"이라는 말을 아주 아무렇지 않게 던지기도 해서 방송을 하던 사람이나 그걸 지켜본 사람들을 놀라게도 했었습니다. 또 어느날은 아침방송에서 자신의 방송이 탐탁치 않으면 주파수를 다른 곳으로 맞추시라 했던가요?

    툭툭 내뱉는 말 같지만 그의 말 속에서 저 밑바닥에서 건져낸 팔딱팔딱 뛰는 생생함과 세상 사람들을 품어안는 따뜻한 시선이 있었습니다.

    그저 객기 부린다거나 톡톡 튀어보자는 식의 언행이 아닌 그 무엇이 있다는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죠. 들려오는 소리나 신문에서 밝힌 성장 과정이나 그 동안의 살아온 방식을 보자니 그는 "길 위의 사람' 이더군요.

    "길 위의 사람"이라고 제가 그를 이름 붙이는 것은 저 역시 그와 같은 사람이라는 느낌 때문입니다.

    제법 그럴 듯한 학연과 지연 없이는 어디에 명함 한 장 내밀기 힘든 한국 사회에서 그 흔한 학벌 하나 없이, 든든한 부모 재산 없이 그저 검정고시를 거치고 경력이라고는 남의 이름으로 공장노동자 생활한 것이 전부인 제가 가진 것은 오로지 "길" 위에서 온몸으로 온맘을 다해 배운 것들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생존을 위해 습기차고 어두운 공장에서 하루를 꼬박 어린 몸을 구겨놓고 일을 했으며 턱없이 모자라는 그나마 제때에 주어지지 않는 월급을 받기 위해 길거리로 뛰쳐나온 노동자들과 어깨를 함께 하였고 분명 국민이 주인인 시대는 되었건만 여전히 그들 위에 군림하고 제 뱃속 채우기에 급급한 행정관료들과 싸우느라 여전히 저는 길 위에 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책상물림으로 절대 배울 수 없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함께 그 길 위에 서 있을 때에만 배울 수 있는 "길 위에서 하는 공부"가 오늘의 저를 키웠습니다.

    그래서 그 배움은 누구도 흉내낼 수 없고 거침없는 용기와 힘을 줍니다. 저와 같은 땅, 같은 하늘 아래서 살고 있는 이웃과 기쁨과 아픔을 함께 할 수 있는 넉넉한 마음과 그들과 함께 한다면 바로 이 곳에서 아름다운 세상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저는 배웠습니다.

    세상을 품을 수 있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이름뿐인 지식이 아닌 진정 세상을 보는 따뜻한 눈과 결코 저버릴 수 없는 희망뿐임을 저는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길들여지지 않은 자가 길에서 체득한 경험과 힘, 소망은 그 누구보다도 힘이 세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하루 해가 지도록 돌투성이뿐인 밭에서 돌을 골라내느라 허리 한번 펴보지 못했던, 집어내는 돌들이 쌀 한 톨이고 감자 한 알이었으면 좋겠다는 헛된 상상을 하던 그 거친 땅,육지의 섬이라는 경상북도 안동의 한 깡촌마을이 제 고향입니다.

    숟가락 쥘 새도 없이 손으로 허겁지겁 밥을 입 안 가득 쑤셔넣는 거지 아이를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어느 날인가 텔레비젼 드라마 속에 한 아이가 그렇게 밥을 먹더군요.

    순간, 제 가슴 저 안쪽 어딘가에서 툭 떨어지는 서글픔.... 주린 배를 그저 채우고
    싶은 간절함, 채워도 채울 수 없는 허기를 기억합니다.

    그래서 제게 고향은 서러움과 배고픔으로 기억하는 아픈 기억의 땅입니다.

    거칠고 메마른 땅을 파헤치던 거친 손마디 밖에 남은 게 없던 제 어머니는 그날도 보리 한 줌, 좁쌀 한 줌 넣고 밥도 아닌 죽을 끓이려던 저녁 무렵 저를 낳으셨답니다.

    그날이 대체 10월 22일 이었는지 23일 이었는지, 고생으로 뼛골이 빠져 정신이 없으셨다는 어머니는 제가 세상에 나온 날을 정확히 알지 못하십니다. 9남매의 일곱째, 태어나지 않았으면 어머니의 그 지독한 고생을 조금이나 덜어드릴 수 있었을까요?

    무지랭이 농사꾼으로 땅 밖에 모르고, 제 식구들 먹여 살리느라 낮밤을 모르는 친구의 아버지가 부러웠습니다. 당시로서는 대학 중퇴라는 거창한 학력을 가졌던 아버지는 쌀도 돈도 되지 않는 바깥일만 몰두하셨습니다. 두 발을 대지에 굳건히 딛고 선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싶고, 허기진 내 배를 채워줄 아버지가 그리웠습니다.

    1976년, 초등학교를 마치자 마자 중앙선 완행열차를 타고 청량리에 내려 다시 239번 버스를 타고 구종점에 내리니 새벽, 상대원1동 아버지와 형이 마련한 단칸방으로 터벅터벅 걸었습니다. 큰길가에 몇 채의 집만 드문드문 있는 진창길... 그것이 제가 성남에 첫발을 디뎠을 때의 기억입니다.

    그 새벽에 걷던 진창길만큼 성남에서의 생활은 저를 끝없는 고통으로 끌어당겼습니다. 목걸이를 만드는 가내공장(네, 익숙한 이름은 마찌꼬바입니다)에서 초보(시다)로 취업해서 납땜질을 하고 그 일이 익을 무렵이 되니 사장은 야반도주를 해서 석달치 월급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밤 열시까지 야근에 새벽 두시까지 철야작업을 밥 먹듯 하던 "동마고무"라는 회사에 앞집 사는 학생 이름을 빌려 모자란 나이를 속이고 들어갔습니다만 모터 벨트에 왼손이 감기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아직도 손톱아래엔 그 때 미처 빼지 못한 고무가루가 희미하게 남아있습니다.

    다음해 들어간 회사는 상대원1동 공단에 있던 냉장고를 만들던 "아주냉동"이란 회사였습니다. 용접 기술이라도 배워보고 싶은 욕심에 들어갔던 회사에서 용접은 해보지도못하고 함석 절단을 했습니다. 절단기에 잘려 꿈틀대는 손가락을 집어들고 믿을 수 없는 현실에 헛웃음을 짓던 절단공을 보던 시절이었습니다.

    차갑게 굳어버린 보리밥 한 덩어리나마 동료와 나눠 먹으며 공장 앞산을 뒤덮은 진달래를 바라볼 때 그 꽂빛깔은 왜 그리 서글프던지요.

    상대원 시장을 터전 삼아 아버지는 시장 청소부로, 어머니와 여동생은 시장 2층 화장실 청소를, 다른 형제들은 모두 공장을 다녔습니다.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다들 제 몫의 생존을 위해 싸우듯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공장에서 , 시장 바닥에서 돌아와 좁디 좁은 셋방에 몸을 누이며 그나마 가족 모두 함께 하고 있다는 그 사실 하나로도 기쁜 나날들이었습니다.

    고된 공장생활에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산업 사고 속에서 하루하루 희망도 없이 살아가는 공장 선배들의 거친 심정은 때로 저같은 어린 후배들에게 모진 폭력으로 불거져 나오기도 했습니다. 때로 악에 받쳐서 대들기도 하였지만 그것은 뒤에 닥쳐올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