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 대부분 떠나고 적막감만… 한때 사람들로 북적였던 흔적도서울시 "안전성 D급 건축물이기 때문에 철거 후 공원 등으로 조성"아파트 측 "시에서 제시한 보상금 적어… 납득 못하는 입주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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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유의 분위기로 영화 <친절한 금자씨>, MBC 예능 <무한도전>, 넷플릭스 드라마 <스위트홈>의 촬영 장소가 된 아파트가 있다.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아파트 중 하나이자 부촌의 상징이기도 했던 회현제2시민아파트(회현시민아파트). 1970년 준공돼 반 세기 이상 서울의 역사와 함께한 이 아파트는 올해 철거가 확정돼 이제 그 모습을 볼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지난 18일 오전 9시, 서울지하철 4호선 회현역 3번 출구에서 남산 방향으로 이어진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랐다.10여 분을 걸었을까, 저 멀리 세월의 풍파를 맞고 우두커니 서 있는 회현시민아파트가 보였다.아파트 입구에는 '서울시는 SH공사를 내세워 회현시범아파트 저가 보상을 철회하고 시장원리에 맞는 보상을 하라'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 한 쪽이 뜯겨진 채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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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에 도착하니 왜 이곳이 영화·드라마의 촬영 장소로 쓰이게 됐는지 알 수 있다. 어린 시절의 향수가 느껴지는 공간이면서, 동시에 서민의 애환이 묻어 있는 곳이며, 이제는 입주민 대부분이 떠나가고 을씨년스러운 공기가 압도하는 묘한 곳이었다.아파트 내부로 들어서자 공기가 한층 더 무거워졌다. 대낮임에도 아파트 복도에는 전등이 들어오지 않아 어두웠다. 폭염이 계속되고 있었지만 아파트 내부는 서늘한 기운이 맴돌았다.각 가정집 앞에는 가스 계량기가 있었는데, 그 앞에서 끊어진 가스관과 굳게 잠긴 밸브는 더이상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듯했다.입주민 대부분이 떠난 이곳은 시간이 정지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복도 벽면에 붙은 전기 검침표는 2018년에 멈춰 있었고, 소화기 점검표 역시 2019년 이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먼지가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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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컴컴한 긴 복도 끝에 난 작은 창으로 한 줄기 햇볕이 들어오고 있었다. 모든 것이 멈춰 있는 듯한 아파트 복도 내부는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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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때 이곳에도 어린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울렸다는 흔적이 옅게나마 남아 있었다. 아파트 복도 벽 한 편에 어린이들이 쓴 것으로 추정되는 짓궂은 낙서들이 있었다. 그 옆에는 '착한 어린이는 낙서도 안 하고 휴지도 안 버립니다'라는 표어도 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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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현제2시민아파트는 'ㄷ' 자 구조로 돼 있어 아파트 중앙에 중정이 형성돼 있다.그러나 현재 이곳에는 잡초가 자라 있었고, 계단에는 녹색 이끼가 겹겹이 끼어 있었다. 주민들이 남기고 간 오래된 장독대가 중정 구석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건물 바깥쪽에는 잡초가 무성한 공터가 있었다. 이름모를 잡초와 덩굴로 뒤덮인 낡은 그네가 한때 이곳이 놀이터였음을 짐작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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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파트에는 아직 소수의 입주민이 살고 있다.30년째 이 아파트에 살고 있다는 김모(40대·여) 씨는 "옛날에는 애들도 많았고 살기 편했다. 그러나 재개발 이야기가 나온 후 관리가 안 되면서 급속히 노후화가 진행됐다"고 한다.김씨는 그러면서 "어머니가 여기서 오래 사셨다. 어머니가 이곳을 너무 좋아해 계속 살고 싶어 하시지만 연세도 많으신 데다 아파트도 철거 수순을 밟고 있어 곧 이사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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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입구에서 출근을 서두르던 이모(60대·남) 씨는 회현동 일대에서 평생을 살았는데, 이 아파트에서만 20년 정도 살았다고 한다.이씨 역시 "요즘은 사람이 거의 없어 썰렁한 분위기"라며 "총 352가구가 있는데 이제 다 떠나고 50가구도 채 남지 않았을 것"이라고 알려줬다.이씨는 그러면서 "입주민이 듬성듬성 있다 보니 단열이 안 돼 겨울에는 엄청 춥고 동파도 빈번하다. 반대로 여름에는 벌레나 쥐가 들끓는다"고 불만을 드러냈다.심지어 "복도에 불이 다 꺼져 밤이 되면 한 치 앞도 안 보여 입주민들은 스마트폰 플래시를 켜고 다니지만 외부인들은 들어오기를 꺼려해 배달 직원도 오지 않는다"고 이씨는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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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현제2시민아파트 관리운영위원회 박용수 회장은 서울시의 해당 아파트 재개발 방침에 불만이 많은 듯했다. "서울시에서는 이곳에 공원을 만든다고 했다. 그러나 바로 뒤에 남산이 있는데 왜 공원을 만들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현재 중구에는 주거지가 별로 없어 주거공간을 좀 더 마련해서 인구를 더 채워줘야 하는데 거꾸로 가는 듯하다"는 것이다.박 회장은 그러면서 "서울시에서 이주 입주민에게 제시한 보상금은 2억원 미만인데 너무 적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입주민은 그 보상액을 납득하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목속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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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관계자는 "1970년에 완공된 회현제2시민아파트는 안전 규정상 D급 이하의 건축물이다. 건물의 안전도를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철거 수순을 밟고 있다"고 말했다.이 관계자는 "아직 소수의 세대가 거주 중인데, 현재 원만한 협의를 진행 중이다. 입주민이 모두 이주하면 철거 공사를 시작할 방침"이라고 설명했다.이 관계자는 그러면서 "서울시는 해당 부지를 도시 경관을 회복하기 위한 목적으로 공원 형태로 조성할 계획이다. 주거지로 사용하는 계획은 현재로서는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