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 만주·연해주 무장 독립군 처리… 일본은 백군 지원 중단 밀약공산주의자 이동휘, 소련 등에 업고 임정 공산화·독립군 소련군 예속 추진고려혁명군과 고려공산당 상해파 갈등… 고려혁명군 홍범도, 상해파 학살에 가담
  • ▲ 이 서류는 소련 정부가 홍범도에게 발급한 일종의 복지혜택 인증서다. 인증서는
    ▲ 이 서류는 소련 정부가 홍범도에게 발급한 일종의 복지혜택 인증서다. 인증서는 "1930년 1월13일 소련 인민위원평의회 중앙집행위원회(소련의 최고 의사 결정기구)의 칙령에 의한 것"임을 확인하고 있다. 서류 우측 증명사진 하단부에는 이 서류가 1930년 3월25일부터 적용되는 '前 붉은 군대와 빨치산 및 가족이 수혜를 받을 권리에 관한 인증서 발급절차'라는 법령의 의거, 발급됐음이 기록돼 있다. 즉 서류는 홍범도가 1919년9월부터 1922년10월까지 참전군인으로서 협동농장에 대한 혜택의 수혜대상임을 확인하는 인증서로 해석된다.ⓒ사진은 2019년 2월22일자 고려일보에서 캡처
    홍범도의 유해 송환과 '대한민국장' 추가 서훈은 많은 국민들로 하여금 '자유시참변'을 생각해보게 하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다. 

    홍범도는 국민들에게 '봉오동전투'의 영웅으로 칭송받는다. 하지만 자유시참변은 그의 무장독립운동 공적마저 상쇄하는 '흑역사'로 평가받는다.

    홍범도, 무장독립운동 공적에도… 자유시참변은 '오점'

    1921년 6월28일 러시아 스보보드니(자유시)에서 발생한 자유시참변은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통칭 고려혁명군)와 고려공산당 상해파 사이의 갈등이 폭발해 일어난 비극이다.

    그러나 자유시참변을 같은 공산 계열 한인 독립군들 간의 상호 충돌로만 해석하는 것은 제대로 된 원인 파악과 책임 소재를 불분명하게 한다는 지적이 따른다.

    우선 자유시참변은 볼셰비키의 쿠데타를 완성하려는 레닌의 흉계, 그리고 레닌의 지원을 등에 업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집요하게 공산화하려 했던 이동휘를 빼놓고는 논하기 어렵다는 것이 관련 학계의 설명이다.

    이동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 시절인 1920년, 소련 정부로부터 100만 루블을 지원받고 '대일한로공수동맹'을 체결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세기 초 국제정세 변동과 한인 무장독립운동" 신효승, 연세대 박사학위 논문, 2018) 1917년 뉴욕타임즈 100만 루블 광고는 당시 달러 가치로 환산할 경우 대략 30만불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0년 물가 폭등 전인 데다 현재 통화 가치에 직접 대입하기는 어렵지만 참고할 수 있는 내용이다.

    백색내전이 한창이던 당시, 소련 적군(赤軍)에 백군(白軍)을 지원하는 일본군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이동휘·레닌 간 비밀협약은 시베리아에 출병 중인 일본과 싸움에서 한국 독립군을 양성, 지원하겠다는 명분이었다.

    하지만 ▲임시정부의 공산화 및 선전활동 전개 ▲소련군에 한국 독립군 예속 등 장차 대일 작전 시 소련정부와 공동 행동을 취할 것 등이 전제조건이었다.
  • ▲ 이동휘ⓒ보훈처 블로그
    ▲ 이동휘ⓒ보훈처 블로그
    이동휘, 임정 공산화와 소련군에 독립군 예속 협약

    같은 해 홍범도와 김좌진 등이 이끄는 항일 무장 독립군은 봉오동전투(6월)와 청산리전투(10월)에서 일본 정예 부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곧바로 일제의 보복(경신참변)이 자행됐다.

    경신참변으로 그 해 10월 초에서 11월 말까지 8개 현에 거주하던 한인 중 3693명이 피살됐고, 171명 체포, 부녀 강간 71명, 가옥 손실 3288채, 학교 손실 41개교, 교회 손실 16곳 등 참혹한 피해가 벌어졌다. 항일 무장 독립군은 경신참변 등 일본군 토벌대의 보복으로 활동 근거지를 다시 모색해야만 했다.

    이때 레닌의 지원을 받은 한인사회당 이동휘는 만주·연해주 등 각지에 흩어진 한인 독립군에 스보보드니(자유시) 집결을 선전했다. 소련정부가 소규모 단위로 분산된 한인 독립군의 통합과 신식 무장을 도와 주기로 약속했다는 것이었다. 나아가 레닌이 구상한 인터내셔널 오트랴드(국제군)를 편성하는 데 독립군을 가담시킨다는 약속도 있었다.(<대륙의 분노-노병의 회상기> 김홍일, 문조사, 1972)

    요컨대 한국 공산주의의 아버지 격인 이동휘는 100만 루블의 대가로 임정의 공산화와 한인 무장 부대를 소련 적군에 넘겨주는 조약을 맺고 독립군들을 자유시로 집결하도록 한 것이다.
  • ▲ 블라디미르 레닌.ⓒ위키백과 캡처
    ▲ 블라디미르 레닌.ⓒ위키백과 캡처
    레닌의 흉계… 일본 대신 '독립군 처리' 약속

    그러나 독립군을 적군 산하로 예속시키고 자유시로 유인한 것은 레닌정부의 계략이었다. 당시 일본과 소련은 중국 베이징에서 캄차카반도 연안의 어업권 문제에 관한 양국 간 어업조약을 체결하면서 만주·연해주 일대의 한일 독립군 '처리'를 약속했다.

    일본은 백군 지원을 포기하고 철군하는 대신 안전한 퇴로를 보장받아야 했고, 소련도 러시아 전역을 차지하기 위해 일본의 철군이 시급했다. 소련은 일본의 요구를 수용했다.

    1921년 6월 자유시에 집결한 한국 독립군단은 4500여 명으로 추산된다. 한인 무장 부대는 민족주의·공산주의·무정부주의 성향 등 다양한 세력이 망라됐다. 하지만 이들은 크게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고려혁명군 통칭)와 고려공산당 상해파로 나뉘어 주도권을 둘러싸고 반목했다.

    양 파의 갈등은 소련군의 '무장해제'·적군 편입 요구 등으로 격화해 6월28일 자유시참변이 발생했다. 소련군과 고려혁명군은 무장해제와 적군 편입을 거부하는 상해파를 향해 장갑차·대포 등을 동원,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했다. 일련의 갈등 과정에서 홍범도는 고려혁명군 편에 섰다.

    광복군 참모장을 지낸 김홍일 전 육군 중장은 당시 독립군 700~800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은 부상, 1000여 명은 시베리아 벌목공으로 끌려갔다고 기록했다.(김홍일, 상동)

    즉, 자유시참변은 일본 대신 독립군 처리를 약속한 레닌의 흉계와, 레닌의 지원을 받은 이동휘의 선전, 한인 독립군 간 갈등 등이 겹치면서 벌어진 비극이었다. 한일 독립군은 통합된 무장 독립부대를 꿈꾼 곳에서 역설적으로 사실상 궤멸돼 해방 때까지 재기하지 못했다.
  • ▲ 러시아 스보보드니에 위치한 제야강이 23도에 기온에 얼어있다. 1921년 6월 28일 스보보드니 체스노코프역(당시 소련 수라세프카 역)에서 일어난 '자유시 참변' 현장에서 빠져 나온 독립군 대부분이 이 강을 건너다 빠른 물살에 휩쓸려 숨졌다.ⓒ러시아 스보보드니=뉴데일리 이기륭 기자
    ▲ 러시아 스보보드니에 위치한 제야강이 23도에 기온에 얼어있다. 1921년 6월 28일 스보보드니 체스노코프역(당시 소련 수라세프카 역)에서 일어난 '자유시 참변' 현장에서 빠져 나온 독립군 대부분이 이 강을 건너다 빠른 물살에 휩쓸려 숨졌다.ⓒ러시아 스보보드니=뉴데일리 이기륭 기자
    홍범도, '무장해제 거부' 독립군 공격하는 고려혁명군 편에

    홍범도는 참변이 일어난 해 11월27일부터 30일까지 '중대범죄자'로 분류한 참변의 포로들(상해파 등)을 유죄 판결하는 재판위원으로도 활동했다.(<한국사회주의의 기원> 임경석, 역사비평사, 2014) 이듬해 2월에는 모스크바에서 레닌을 면담하고 참변에 관해 보고했다.(독립기념관 홈페이지) 여기서 레닌은 홍범도에게 금화 100루블, 군복 한 벌, 홍범도 이름이 새겨진 모젤 권총을 하사했다.

    홍범도는 레닌에게서 받은 이 권총으로 독립지사 김창수·김오남을 사살하기도 했다. 그는 1923년 8월 하바롭스크에서 '참변 당시 적군에 맞서 싸우지 않았다'고 추궁하며 자신을 공격한 두 사람(사할린부대 출신)을 사살하고 감옥에 갇혔으나 레닌의 증명서 덕분에 석방됐다.('[군사대로]독립군 영웅 홍범도의 인생 최대 오점은 자유시 참변', 뉴시스, 2021년 8월22일자)

    1927년에는 소련 공산당에 정식으로 가입했고, 이후 소련정부에 충성했다. 1941년 독·소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73세의 노령에도 전선으로 보내 달라고 당국에 요청하기도 했다.

    홍범도는 소련정부의 혜택을 받으며 여생을 안락하게 보낸 것으로 전해진다. 소련정부가 홍범도에게 발급한 복지혜택 인증서에는 "이것(서류)을 소지한 홍범도는 전(前) 빨치산으로 1919년 9월부터 1922년 11월까지 제5군 제1고려인대대(군부대 혹은 파견/분견대)에서 복무"했다고 적혀 있다. 또한 "한카이스키 지역의 '전(前) 붉은 군대와 빨치산 및 가족에 대한 증명서 발급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혜택을 부여한다"고 씌여 있다. 한카이스키 지역은 스탈린의 강제이주 명령 전, 홍범도가 제대 후 정착했던 곳이다.

    인증서류에 그의 빨치산 복무기간을 1919년부터 기재한 것은 의문이 남는다. 하지만 1922년 11월까지라고 기록된 부분은 홍범도가 자유시참변(1921년) 당시 적군 편에서 공로를 세운 점을 소련정부가 인정한 것으로 해석되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