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권 대부' 장기표-'주사파 핵심' 민경우…"文정권 인물들, 운동권 아냐"'임대료 논란' 김상조·박주민 사태에…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그들의 문화""1987년 6월항쟁 기점으로 운동권은 나뉘어… 6월 이후의 민주화운동 과장돼"
  • 참여정부 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타결을 저지하는 운동권 단체가 있었다. '한미FTA저지범국민운동본부(범국본)'였다. 2006년 3월 300여 시민단체로 결성된 '범국본'은 한미 FTA 저지를 위한 시위·연설 등을 주도했다. 이들은 우리 먹거리를 미국시장에 개방하면 농민들의 삶이 어려워진다는 등의 주장을 거리에서 외쳤다. 그러나 범국본 한편에서는 부동산 등 '현실적 이야기'가 오갔다고 한다. 

    "(범국본) 정책본부 옆에서는 운동권 교수라는 사람들이 '오늘 아파트를 얼마에 샀다' '(당신의) 아들이 어느 대학에 갔는가' 등의 이야기를 했다. 이들은 10여 년 후 문재인 대통령 후보의 캠프에 갔다. 이들은 만나면 '혁명' 같은 이야기를 했던 것이 아니었다. 장기표 선생과 달랐다." 범국본 정책기획팀장으로 일했던 민경우 수학연구소장이 들려준 경험담이다.

    '운동권 대부' 장기표 선생과 민경우 소장은 우리 사회에 잔존하는 북한 추종 분위기 및 '변종 운동권'의 민낯을 비판하는 대담을 지난 3월23일부터 수차례 진행했다. 장 선생은 1960년부터 투쟁해온 인물이다. 수차례 옥고를 경험한, 운동권의 살아 있는 '대부'로 평가받는다. 

    민 소장은 범국본 활동 외에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남측본부에서 사무처장으로 활약한 '주사파 핵심'이었다. 그러다 지식인들의 위선적 태도, 연평도 포격 등을 목도한 후 운동권 비판 대열에 합류했다.

    본지는 이들의 대담을 지난달 12일부터 차례로 보도했다. 첫 순서는 '1970년대 운동권의 사상적 경향과 운동권에 미친 리영희 선생의 영향'이었다. 이어 4월19일과 4월26일 '북한 참상에도 침묵하는 위장 진보 지식인들' '북한의 민낯, 그리고 친북적 사고구조의 대안'을 차례로 전했다.

    이들의 네 번째 대담은 지난 4월1일 이뤄졌다. 공교롭게도 3월 말 정부·여당 인사들의 '부동산 논란'이 불거진 뒤였다. 

    김상조 전 청와대 정책실장은 지난해 7월 서울에 보유한 자신의 아파트 세입자에게 전셋값을 1억2000만원 올려 비판받는 중이었다.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같은 시기 서울 소재 자신의 아파트 월세를 세입자에게 85만원 올려 받아 논란을 일으켰다. 

    이들이 과거 세입자 보호를 위한 임대료 인상 제한 등에 앞장섰다는 이력이 있는 만큼 비판은 거셌다.     

    이번 대담에서는 이들의 이중적 행태는 물론, 장 선생과 민 소장이 목격한 문재인정부 인사들의 위선적 행태가 주로 담겼다. 민 소장이 묻고, 장 선생이 답했다.

    -민경우: 최근 김상조 전 청와대 정책실장과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화두가 됐다.   

    "이들은 민주화운동을 한 대표적 인물들은 아니지만, 소위 민주화세력 정권이라고 하는 문재인정권에서 실세다. 그런 면에서 김상조 전 실장과 박주민 의원이 민주화운동의 타락한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내로남불'의 전형이다. 이들은 '전세금을 올리면 안 된다'고 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올렸다."

    -김상조 전 실장과 박주민 의원은 운동권활동을 얼마나 했나? 또 이들의 위치는 어느 정도였는가?

    "이들이 민주화운동을 했는지 모르겠다. 이들뿐 아니라 현재 문재인정권 인물들 중 민주화운동, 민주화투쟁을 제대로 한 사람들이 별로 없다. 세대적으로도 586 그룹은 나이로 기준으로 했을 때에도 민주화운동을 제대로 한 이들이 아니다.

    가령, 임종석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1987년 6월항쟁 이후 (운동권에) 참여했다. 6월항쟁 이전과 이후는 하늘과 땅 차이다. 1987년 6월항쟁 이전의 경우, 징역을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맞는 것이 문제였다. 6월항쟁 이후 (운동권에 대한) 고문이 없어졌다. 징역도 오래 살지 않았다.

    노영민 전 청와대 비서실장 등 (문재인정권) 사람들은 6월항쟁 이후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는 이들이다. 6월항쟁 전에 제대로 고생하면서 고통을 겪은 이들과 전혀 다르다."

    -(6월항쟁 전에 운동을 한) 이들은 여전히 '혁명' '사회변혁' '인류평화' 등을 이야기한다.  그렇지 않은(6월항쟁 이후 운동한) 사람들은 집을 사고 자식을 키우는 이야기를 한다.

    "이인영 통일부장관이나 노영민 전 실장 등(문재인정권 인사 중 운동권에 있던 이들)을 안다. 이들의 행태는 이기적이다. 이들의 문화 자체가 그렇다. '조국 사건'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조국 전 법무장관이 특별히 잘못한 것이 있는가. 애들 공부시키기 위해 부모로서 최선을 다한 것 아닌가(라고 합리화한다)…

    김상조 전 실장, 박주민 의원 등은 돈을 숭상하면서 운동권을 했다는 소리를 하면 안 된다. 김상조 전 실장은 이미 다 알려진 이야기지만 전세보증금을 8억5000만원에서 9억7000만원으로 올렸다. 김 전 실장이 예금한 돈은 14억원이나 있었다. 김 전 실장이 봤을 실제 이익은 한 달 이자로 치면 대략 30만원 정도밖에 안 된다. 20억원 이상 있는 사람이 한 달에 30만원을 더 챙기기 위해 그렇게까지 했다는 것은 상당히 위선적이다. 이것이 (문재인정권 하에 있는 변종운동권의) 문화다."

    -내가 운동권을 그만둔 결정적 계기는 이렇다. 나는 (민주노동당에 입당한 뒤) 2006년 '한미FTA저지범국민운동본부' 정책기획팀장이었다. 당시 (범국본 일각에서는) 한미관계와 농민들의 삶 등을 말했다. 반면, 정책본부 옆에서는 '오늘 아파트를 얼마에 샀다' '아들이 어느 대학에 갔는가' 등의 이야기가 오갔다. 소위 '운동권 교수'라는 사람들이었다.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사람들이 10여 년 후 문재인 대통령 후보의 캠프로 갔다. 이들은 만나면 '혁명' 같은 이야기를 했던 것이 아니었다. 장 선생은 만나면 '정치혁명'이니 '신문명' 등의 이야기를 한다. 장 선생 같은 사람은 운동권에서 오래 전에 사라졌다.

    "민 소장이야말로 한때 '친북성향'에, 운동권에서는 아주 핵심인물이었다. 여러 친북단체 중 가장 친북적인 단체가 범민련이었다. 그 범민련의 사무처장을 민 소장이 했다. 범민련, 즉 주사파 핵심에서 왜 그만뒀는지 궁금했다."

    -나는 84학번이다. 사실 1983년 서울대 의예과에 들어갔었다. 당시 대학 분위기는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국뽕'이었다. 이후 서울대 국사학과로 (1984년에) 재입학했다. 1987년 서울대 인문대 학생회장을 맡았다. 6월항쟁 때 일선에 있었다.

    1985~86년 서울대 총학생회는 주사파로 통일됐다. 이들은 대학 졸업 뒤 두 부류로 갈렸다. 많은 사람은 사회활동에 참여했다. 나는 주사파 활동을 계속할 마음이었다. 그래서 1995~2005년 10년간 범민련 사무처장을 했다. 그 과정에서 (범민련이 1997년 이적단체로 지정되면서 간첩 혐의를 받아) 총 세 차례 4년여간 감옥에서 살았다. 

    범민련은 중요한 지점이다. 주사파는 두 유형으로 나뉜다. 북한에서 내려온 공작원에 의해 지하당을 구축한 형태의 주사파가 있다. 이런 유형의 주사파가 1순위다. 김영환 등이 여기에 속한다. 나는 그렇지 않았다. 두 번째 유형은 북한과 연계돼 하나의 조직을 꾸리거나 친북형 조국통일운동을 하는 것이다. (나는) 이 유형에서 가장 중요한 멤버 중  하나였다.

    내가 주사파가 된 것은 6월항쟁 때문이었다. 1986~87년 당시 학생운동이 과격해졌다. 분신도 하고 그랬다. 당시 북한의 방송은 구호를 순화하고 대중운동을 활성화하자는 주장을 3년간 했다. 나는 이에 공감했다. 공감하면서 주사파가 됐다. 다만 나는 '삐딱한' 주사파였다. 북한의 주체사상에서 수령론을 인정하지 않았다. 은연중에 북한역사정통론은 받아들였다.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과 전략·전술을 받아들였다. 조국통일운동도 받아들였다. 

    1990년대 초반이 되면서 한국사회가 많이 변했다. 내게 약한 분야는 경제다. 주사파의 핵심 주장은 한국사회가 봉건사회라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사회를 봉건사회라고 보는 것이 어려웠다. 또 (내 생각이 달라진 이유 중) 하나는, 주사파들은 실제로 북한과 접촉하면 오히려 돌아서는 경향이 있었다. 김영환도 북한에 가서 (실상을) 보고 바뀌었던 것이다. 나도 2000~02년 북한과 200번 정도 전화 통화를 했다. 나는 당시 조국통일, 남북교류협력사업을 중개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북한 측과 전화하면서 내가 알던 북한과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 컸던 부분은 2005년 있었던 한미 FTA 저지를 위한 싸움이었다. 당시 다양한 자료를 많이 봤다. 삼성전자의 데이터도 봤다. 삼성전자의 영업이익이 일본 전자업체 전체를 합친 것보다 많다는 보고서가 있었다. 이를 보면서 '내가 틀렸다'고 생각했다. 

    2005년 한미 FTA 싸움의 핵심은 '농민'이었다. (당시 '한미FTA저지범국민운동본부' 정책기획팀장이었으니) 내가 투쟁을 기획하는 위치였다. 투쟁을 한 뒤 거리에서 사람들의 반응을 봤다. '농민들의 주장이 도시의 '샐러리맨'에게는 전혀 말이 안 되는구나'를 느꼈다.  

    결정타는 2010년 11월 일어난 연평도 사건이다. (1969년 대한항공 여객기가 북한으로 공중납치된 사건인) 칼(KAL)기 사건, (2010년 3월 북한 어뢰에 의해 우리 해군의 초계함이 격침된) 천안함 피격 사건 등을 음모라고 몰아가는 전통이 (주사파에는) 있다. 그래서 이 사건들이 적극적으로 인식체계 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연평도 사건은 그럴 여지가 없는 사건이다. 포탄을 연평도에 쏜 것이다. 여기에 북한의 3대 세습도 보면서 적극적으로 (주사파로부터) 돌아섰다.
  • ▲ 장기표(좌) 선생과 민경우(우) 소장. ⓒ정상윤 기자
    ▲ 장기표(좌) 선생과 민경우(우) 소장. ⓒ정상윤 기자
    (최근으로 좁히면) '조국 사건'도 큰 것 같다. (2019년) '조국 사건'이 벌어졌는데 주사파 후배들이 조국 전 법무장관을 옹호하는 서초동 집회에 간다고 했다. 이들은 조 전 장관이 민주화운동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 전 장관은 민주화운동을 했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운동을 한 사람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박주민 의원, 김상조 전 실장 등도 운동을 했다고 보기 어려운 사람들이다.

    "말한 대로 민 소장은 본래 서울대 의예과에 들어갔다. 그러나 민 소장은 대학생이 돼 세상을 보면서 '의사될 일이 아니다' '우리 민족 문제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하니 국사학과에 가야 한다'고 봤다."

    -(웃음) 과도한 이야기다. 내가 국사학과, 철학과를 (다시 가자고) 생각한 것은 당시 프랑스 실존주의, 독일 관념론이 대유행이었다. 신입생환영회를 하면 이를 주도하는 선배들이 대부분 문과였다. 굉장히 좋았다. 그래서 (문과인 국사학과에) 간 것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운동권과 맞았다.

    "그것이 인생에서 굉장히 자랑스러운 부분이다. 과거 서울대에서 강연한 적이 있다. 당시 나는 '젊은이들이 먹고사는 것을 걱정해 법대·의대에 가면 되겠는가'라고 말했다. 강연이 끝나고 비가 왔는데, 우산을 들고 나오는 학생들 중에 법대·의대생이 많았다. (웃음) 젊은이들이 민 소장의 그런 면을 본받아야 한다고 본다."

    -운동과 관련해서는 장 선생과 나는 그런 길을 택했다. 그런데 박 의원, 김 전 실장 등 운동을 제대로 하지도 않은 이들이 대단한 일이 과거에 있던 것처럼 말한다. 이는 친일파들이 독립운동을 한다고 했던 것과 같다.

    "운동권 사람이 고시를 공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는 '(운동권) 탈퇴'를 의미한다."

    -1970년대 변호사 활동을 한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 문재인 대통령은 어떠한가? 

    "박 전 시장만 하더라도 어쩌다 (서울대에서) '제적(除籍)'됐다. 박 전 시장은 학생운동을 직업적으로 한 것도 아니었다. 변호사로서 돈을 잘 벌고 잘살았을 뿐이다. 그러다 박 전 시장은 1994년 9월 (진보 학자들, 운동가 출신 등과 함께) 참여연대를 만들었다. 이들은 민주화운동을 제대로 한 것이 아니다."

    -선생이 문재인 대통령 이야기를 해서 화제가 된 바 있다.

    "문 대통령 역시 민주화운동을 제대로 하지 않은 사람이다. (72학번인) 문 대통령은 1970년대 중반 경희대에서 데모를 했다. 그러다 (문 대통령이) 구속까지 된 것을 나는 높이 평가한다. 당시 서울대·연세대·고려대에서 데모한 사람이 워낙 많았다. 그러나 (데모한 사람이 많지 않았던) 경희대에서 문 대통령이 투쟁한 것은 높게 평가한다. 그래서 (문 대통령이) 그 뒤에 (투쟁을) 안 한 것을 두고 '(운동을) 잠깐만 했다'는 말을 안 하려고 했다. 

    그런데 내가 말하는 이유는, 이들이 민주화운동을 자신들이 다 한 것처럼 행동해서다. 특히 자신들이 '인권변호사' '민주화운동가' 등이라고 한다. 그러나 인권변호사가 아니다. 인권변호사를 하려면 1987년 이전에 시국사건·노동사건 등을 했어야 한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즉 민주화가 된 뒤 이러한 사건을 하는 것은 맞지 않다. 문 대통령(과 박 전 시장 등)은 1987년 이전에 변호사를 해서 잘 먹고 잘산 사람이다."

    -선생은 1987년을 중시하는 것 같다.

    "그렇다. 굉장히 중요하다. 당시에는 징역이 겁나는 것이 아니라 (정부 측으로부터) 두드려맞는 것이 겁나던 때다. '586 세대'는 50대로, 기본적으로 1985년도 이후 대학교에 들어간 사람들이다. 즉, 1987년 이후 학생운동, 민주화운동을 한 사람들인 것이다."

    -(문재인정권을 평가할 때) 민주화운동을 쭉 한, 민주화운동의 적자들이 권력을 잡은 것이 아니다. 민주화운동의 반개(半開)에 있던 이들이 권력을 잡았다.

    "그 부분과 관련해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하지 않는다. 나처럼 민주화운동을 오래, 열심히 한 사람만 민주화운동을 했는가. 나 같은 사람은 그런 말을 하면 안 된다고 본다."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민주화운동의 이념적 성향과 관련해서다. 1985~86년 마르크스-레닌주의 주체사상 등이 팽배했는데, 그들(문재인정권 인사 등)이 운동을 계속했다면 조금 다른 길을 걸었을 것이다. 민혁당(민족민주혁명당 사건)이나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등처럼 말이다. 그들이 민주화운동의 연장선에서 무언가를 했다면 사노맹처럼 심각한 사태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 내가 주목한 것은 2005~08년쯤이다. 이들의 습성과 문화는 확연히 (장 선생 등과) 다르다. 장 선생이나 주대환 선생은 지금도 운동 이야기를 한다. 참 빈곤하게 산다. 그러나 이들의 대화 내용은 운동이 아니다. 운동에는 관심이 없다. 운동과 관련해 스포트라이트(조명)를 받는 공간에서만 그런 것일 뿐, 실제로 화제는 부동산이다.

    "'조국 사건'을 한번 더 말하게 된다. (조 전 장관은) 2019년 법무부장관 인사청문회 때 굉장히 민주화운동을 하고 사회주의 지향성을 가진 것처럼 말했다. 그는 당시 '나는 사노맹을 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도 않지만 부끄럽게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 정신을 갖고 있다는 의미였다."

    -내가 84학번이어서 (82학번인) 조 전 장관을 몇 번 봤다. 그분은 운동권이 아니다.

    "맞다. 조 전 장관과 가까운 사람들을 안다. 교수·변호사들이다. 이들은 함께 있으면 돈 버는 이야기를 주로 한다. '요즘 사모펀드가 유행'이라느니, '세금을 안 낸다' '집은 강남이 좋은가' '집값이 얼마나 오르는가' 등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겉으로는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것처럼 말한다. 조 전 장관을 어떻게 사회주의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2019년 신고한) 재산이 약 56억원임에도 돈을 더 벌기 위해 애쓰지 않는가. 이기적 자본주의자일 뿐이다."

    -나는 감옥에 가는 것을 불사하고 한번 싸워본 사람이다. (1996년 한총련이 연세대에서 주최한 범민족대회를 경찰이 강제해산하려 하자 한총련 소속 운동권 대학생 2만여 명이 연세대 건물들을 점거하고 폭력농성시위를 벌인) '연대 사태'를 주동했다. 

    당시 '연대 사태'가 일어나기 보름 내지 한 달 전에 이러한 생각을 했었다. '이러다 내가 감옥에 갈 수 있겠다' '어린 후배들이 죽을 수도 있다' 등의 생각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싸우기는 했다. 다만 인생의 고민들을 많이 하게된다. 

    그런데 운동권 반개에 있던 이들은 사회주의적 신념, 생각, 공상만 가지고 있다. 이들은 (이러한 신념, 생각, 공상 등) 이를 권력의 위치에서 그냥 실행해 버린다. 지금도 이와 같다고 본다. 자신들은 실제로 육체적 문제 등 어떠한 피해도 보지 않고, 예전 청년 시절 가진 생각만으로 강행하는 것이다.

    "실제로 부르주아지다. 돈도 몇십억원이 있다. 생각도 그렇다. 그런데 사회주의 노동자와 농민을 위하는 것처럼 한다. 그래야 자신들의 부르주아 성향이 은폐된다. '강남좌파'라는 말도 그래서 나왔다. '강남'이라고 하면 돈도 많으면서 퇴폐적인 것이 가미돼 있다. (조 전 장관 등은) 좌파 행세를 하면서 (이러한 '강남'으로 상징되는 자본주의적) 모습을 은폐한다.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버는가' '어디에 사야 집값이 오를까' 등을 고민하면서 겉으로는 페이스북에 노동자·농민을 위해야 한다는 소리를 계속 떠든다. 

    조 전 장관은 한 예이고, 이 정권의 속성 자체가 그렇다. 이중적이다. 이중성이 문화가 됐다. 본인들은 이를 모른다. 자신들이 부도덕하게 배웠음을 인식하지 못한다."

    -나도 문 대통령의 운동경력을 비판할 마음은 없다. 다만 '과거 당신들이 했던 운동 경력이라는 것이 사실은 이런 거다'라고 말할 필요는 있다고 본다. 요즘 학생들은 (문 대통령을 비롯한 정권 인사들은) 1987년 6월항쟁 이후 운동사가 매우 엄혹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당시 운동권은)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現 국가정보원)에 들어가서 고문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고문은 실제로 이뤄지지 않았다. '주관적 착각'이었다. 

    그런데 '주관적 착각'에서 벌어진 일들을 진짜 있던 일들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실제로 1987년과 1987년 이후 공작정치를 다룬 영화들을 보면 어마어마하다. 그런데 그런 일이 없었다. 1987년 6월항쟁 그 현장에서만 그렇고, 나머지 곳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다. 장 선생 말대로 취조 과정에서 맞고 고문당하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모른다. (고문당하는) 그런 것들은 6월항쟁 이후 사라졌다.

    "예전에는 (나를 비롯한 사람들은) 맞는 것을 겁냈다. 요즘에는 잠시 구속되는 고통도 과거 맞았을 때의 고통과 같은 것처럼 느끼는 것 같다. 또 하나 지적하고 싶은 것은, 소위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이들 중에는 국회의원인 이들도 많다. 그러나 이들은 한때 민주화운동을 한 것뿐이다. 그 뒤 민주화운동과 담을 쌓았다. 다만 내가 이러한 말을 되도록 안 하려고 한다. '민주화운동을 계속해야만 하는가'라는 생각이(비판이) 있다."

    -민주화운동의 실상을 이야기할 때 감옥 이야기도 중요하다. 장 선생은 감옥에서 어떻게 지냈나?  

    "나는 개인적으로 교도소생활을 즐긴 사람이다. 내 나름대로 보람 있게 지냈다. 그러나 이 말도 잘 안 하려고 한다. 나는 나이도 많고, 오래 살았고, 그만큼 훈련된 사람이다. 그런 내가 '교도소생활이 어렵지 않다'고 말하면 되겠는가. 어렵다. 교도소에 있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징역을 살고 있는데 어떻게 (어머니 제사를 지내러) 밖으로 나왔겠나."

    -나는 1987년, 1997년, 2003년 세 번에 걸쳐 총 4년을 (감옥에서) 살았다. 감옥에서 산 총 연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민혁당·사노맹 관련자들이 1990년대 초반 (감옥에) 들어갔다. 이들은 1999~2000년 대거 사면받았다. 우리 386세대 중 7~8년 이상 감옥에 산 사람들이 없다. 과거 공안수와 다르다.  

    두 번째, 기본 생활환경이 달라졌다. 1997년 감옥에 들어갔을 때는 매우 추웠다. 2003년 가 보니 감옥에 온돌이 다 깔렸다. 겨울이 따뜻했다. 또 각종 서적 등을 읽는 것도 자유로웠다. 밖으로 나간다는 것 외에는 처우가 좋았다. 

    세 번째, 감옥과 관련해 기억되는 것은 군대다. 나는 1987년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아 군대에 가지 않았다. 1983~87년 정도까지는 집행유예를 받는 정도면 군대에 안 갔다. (운동권에는) 엄청난 특혜였다. 이인영 통일부장관 등 운동권 인사 중 군대에 안 간 사람들이 여기에 속한다. 군대에 안 가기 위해 약간의 문제도 일어났다. 이를테면 '자해' 같은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요즘 학생들과 이야기해보니 민주화운동이 매우 과장됐다는 것을 느껴서다. 학생들은 과거에 감옥에 가면 무조건 맞는 등 (영화에서 본 것처럼 고문당하는 등)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6월항쟁을 계기로 안기부 수사, 검찰 조서, 수형생활 등이 매우 민주화했다. 

    그러나 '민주화운동의 엄혹함' 등을 과장하다 보니 이러한 이야기들이 확산했다. (민주화운동의 어려움 등을 과장되게 다룬) 영화도 만들어졌다. 어린 학생들이 민주화운동의 실상을 정확히 보지 못한 상태가 된 이유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