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세 배우' 이정은, 영화 '내가 죽던 날'서 목소리 잃은 '순천댁'으로 김혜수와 '인생 연기'
  • ▲ 영화 '내가 죽던 날'에서 목소리를 잃은 '순천댁'으로 열연한 배우 이정은.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 흥미진진
    ▲ 영화 '내가 죽던 날'에서 목소리를 잃은 '순천댁'으로 열연한 배우 이정은.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 흥미진진
    사고로 성대를 다쳐 몸짓과 눈빛만으로 의사를 표현하던 '순천댁'이 한 소녀를 바라보며 목을 쥐어짜듯 힘겹게 말을 이어간다.

    "아무도‥ 안 구해줘…. 니가‥ 너를‥ 구해야 돼…. 인생은‥ 니 생각보다‥ 길어…."

    하루아침에 모든 걸 잃고 외딴 섬에 갇힌 소녀에게 이 말 한마디는 구원의 메시지나 다름없었다.

    영화 '내가 죽던 날'은 태풍이 몰아치던 밤, 외딴 섬 절벽 끝에서 유서 한 장만을 남긴 채 사라진 소녀 '세진'과, 범죄 사건의 주요 증인이었던 세진의 실종을 자살로 종결 짓기 위해 그곳으로 향하는 형사 '현수', 그리고 세진을 마지막으로 목격한 순천댁의 '보이지 않는 연대'를 담아낸 작품이다.

    각자 삶의 벼랑 끝에 선 이들이 서로의 상처와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스스로 구원에 이르는 과정을 그린 이 영화에서 배우 이정은은 '무언의 목격자' 순천댁으로 분해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을 만들어냈다.

    세진 역을 연기한 배우 노정의가 그 대목에서 "선배님을 바라만봐도 품에 꼭 안기는 느낌을 받았다" "이게 연기인지 실제인지 분간이 안 갔다"고 말할 정도로 이정은의 연기는 압도적이었다. 사고로 목소리를 잃은 순천댁이 세진을 위해 한 음절씩 힘겹게 말을 이어가는 장면은 보는 이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사실 위험 부담이 좀 있었어요. 어떤 소리가 나느냐에 따라 신뢰가 떨어질 수도 있거든요. 원래 저는 한 마디 정도는 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감독님이 그 대사들의 '가치'를 꼭 영상으로 구현하고 싶어하셨어요. 목소리가 안 나오는 사람이 이 말은 꼭 해주고 싶다며 언어로 정확히 전달했을 때 오는 울림을 표현하고 싶었던 거죠."
  • ▲ 영화 '내가 죽던 날'에서 목소리를 잃은 '순천댁'으로 열연한 배우 이정은.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 흥미진진
    "촬영 전 '의료 다큐멘터리' 돌려보며 연구"

    영화 '옥자'에서 옥자 목소리 역을 맡기 전 하루종일 돼지 다큐멘터리를 보며 연구했던 것처럼 이정은은 이번에도 각종 의료 다큐멘터리를 돌려보며 비슷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목소리를 공부했다.

    "제가 본 다큐멘터리는 주로 기관삽입으로 목소리를 잃으신 분들이었는데요. 극 중 순천댁은 농약을 마시고 목이 타들어간 상태라 좀 달랐어요. 다른 상상이 필요했죠. 사실 목소리가 한 마디도 안 나오는 상태였는지도 몰라요. 하지만 어렵게 내는 파열음 속에서 나오는 순천댁의 감정을 전달하고 싶어, 최대한 감정을 유지한 상태로 말하려 했어요."

    원래 꾀꼬리(?)처럼 고운 목소리를 가졌던 이정은은 연극을 하면서 성대를 다쳐 오랫동안 성대결절을 앓았다. 목소리가 생명인 배우에게 성대결절로 생긴 '탁성'은 걸림돌이 될 수 있다. 특히 정갈하게 대사를 할 때는 이런 목소리가 방해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음색이 좋은 편이 아니었던 이정은의 목소리는 오히려 봉준호 감독의 '페르소나'가 되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됐다.

    "봉준호 감독님이 고운 소리보다 마찰음이 갖는 질감을 더 좋아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누군가에게 좋다는 소리는 때론 독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이런 역을 맡을 때 과연 도움이 될까 아니면 마이너스가 될까 종종 고민을 하곤 합니다."

    2009년 영화 '마더'에 이정은을 단역으로 캐스팅했던 봉준호 감독은 2017년 넷플릭스 영화 '옥자'를 준비할 때 이정은이 출연했던 뮤지컬 '빨래'를 떠올리고, 이정은을 옥자의 목소리 역으로 캐스팅했다. 이정은의 완벽한 돼지 소리에 깊은 인상을 받은 봉 감독은 옥자 시사회 직후 "재밌고 이상한 영화를 해보자"며 세 번째 러브콜을 보냈다. 그게 바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기생충'이다.
  • ▲ 영화 '내가 죽던 날'에서 목소리를 잃은 '순천댁'으로 열연한 배우 이정은.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 흥미진진
    "'자기가 자기를 구제해야 한다'는 말에 큰 깨달음"

    "인생이 생각보다 길다" "자기가 자기를 구해야 한다"는 순천댁의 대사는 사실 이정은에게도 지분이 있다. 이정은이 10여년 전, 건강 악화로 몸과 마음이 피폐해졌을 때 "인생은 정말 길다" "나아질 수 있다" "더 좋아질 것이다"라는 위로를 건네며 용기를 불어넣어 준 사람이 있었다.

    "제가 다니던 한의원 선생님께서 그런 말씀을 해주셨어요. 제가 건강을 잃을 뻔한 적이 있었거든요. 그때 저보다 나이도 어리신 선생님께서 인생은 길다며 충분히 더 좋아질 수 있을 거라고 위로를 해주셨어요."

    다시는 공연을 못할 수도 있다는 절망감이 컸던 그에게 한의원 의사의 조언은 큰 힘이 됐다. '자기가 자기를 구제해야 한다'는 말에 이정은은 일주일에 3번씩 병원을 다니며 스스로 일어나고자 애썼다. 이때부터 누구에게 기댈 생각은 버렸다. 결혼도 안 한 그가 병원에 혼자 가는 것은 숙명. 이정은은 이를 악물고 병마와 싸웠다. "아무도 구해주지 않는다. 네가 네 자신을 구해야 된다"는 순천댁의 묵직한 대사는 이미 이때부터 이정은을 휘감고 있었다.

    "병이 나아지니 정신도 맑아지더라고요. 그동안 왜 누구에게 기댈 생각만 했을까. '자기가 자기를 구제해야 한다'는 선생님의 말씀이 비로소 실감이 났어요. 이때부터 '나는 왜 돌봐줄 사람이 없지'라고 신세 한탄만 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남에게 기댈 생각 말고 스스로 일어날 각오부터 하라고 조언하고 있어요. 도움을 주고 싶어도, 본인에게 일어날 의지가 없으면 도움을 줄 수가 없거든요."
  • ▲ 영화 '내가 죽던 날'에서 목소리를 잃은 '순천댁'으로 열연한 배우 이정은.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 흥미진진
    "김혜수가 캐스팅됐다는 말에 바로 출연 결심"

    이정은이 '내가 죽던 날'의 시나리오를 처음 받아든 건 드라마 지난해 '동백꽃 필 무렵' 촬영으로 정신이 없을 때였다.

    이정은은 "성대를 다쳐 말을 하지 못하는 역할이라 고민이 좀 됐지만 혜수 씨가 캐스팅 됐다는 말에 바로 하겠다고 했다"며 "혜수 씨와 함께라면 잘 해낼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김혜수란 배우를 '여배우'로 생각한 적이 없다"며 "그냥 '원톱'으로 나와도 되는 배우로, 그런 분이 참여하면 힘을 많이 받을 것으로 생각했고, 그 끝에 있는 경계의 인물을 내가 맡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연기할 때 혜수 씨 표정을 보면서 제가 감동을 받는 순간이 많았어요. 나도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죠. 친구의 입장에서 봤을 때도 그런 점들이 너무 큰 파동으로 다가왔어요."

    이정은과 김혜수가 손꼽는 영화 속 명장면은 영화 후반, 순천댁과 현수(김혜수 분)가 부둣가에서 마주치는 장면이다. 세진의 행방을 추적하다 마침내 모든 진실을 알게 된 현수는 차를 끌고 순천댁이 있는 외딴 섬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다시 조우한 두 사람. 실제로 몇 마디 주고받지는 않았지만 침묵 속에 수많은 감정이 교차하는 매우 중요한 신이었다.

    "리허설이었는데 제가 노동을 마치고 리어커를 끌고 가고 있었어요. 그때까지는 울지 않았어요. 그때 혜수 씨가 도착했는데 눈빛이 저를 탐문하러 온 눈이 아니더라고요. 순간 제 마음이 들킨 것처럼 느껴졌죠. 우리가 살아왔던 세월이 충돌하는 느낌이랄까요. 우리 둘 다 그 신이 주는 의미가 뭔지 잘 알고 있으니 격한 감정이 생겼어요. 그렇게 혜수 씨와 손을 맞잡고 울었죠. 그때 감독님이 '그만하시고 작품 찍읍시다'라고 하셔서 원위치로 돌아갔어요. (웃음)"

    두 사람이 작품으로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2000년대 초반 연극 '타임 플라이즈'를 통해서 서로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됐다.

    당시 이정은이 출연하던 '타임 플라이즈'에 김혜수의 지인이 출연했고, 어느날 그 지인을 보러 김혜수가 연습장을 방문했다.

    그때 김혜수는 자신이 외국에서 모았던 각종 소품과 의상들을 연극팀에 기증했다. 이후에도 김혜수는 뮤지컬 '빨래' 등 이정은이 출연한 작품 현장을 종종 찾아와, 다른 배우들을 추천해주기도 하는 등 직·간접적으로 많은 도움을 줬다고.

    "인재등용에 이바지하는 사람이라고나 할까요? 영화만큼 연극도 좋아하는 것 같고. 어느새부턴가 나이가 들수록 얼굴이 점점 더 좋아지더라고요. 이번에는 정말 꽃을 피운 것 같아요. 이번 영화를 찍으면서 개인적인 얘기는 거의 못해봤는데요. 그런데 알겠더라고요. 말로 하지 않아도 얼마나 연기를 심도있게 생각하고, 영화 작업을 존중하고, 동료 배우를 사랑하는지를 요."

    이정은은 "말을 못하는 역할이라 감정을 잘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 이런 김혜수 같은 멋진 동료들과 연기하면서 완화된 것 같다"며 "이번 영화를 통해 좋은 또래 배우들을 만났고, 좋은 후배(노정의)가 하나 생겼고, 박지완 감독의 데뷔작을 함께 해서 더욱 좋았다"고 말했다.

    "좋아하는 배우나 평소 동경하는 배우들과 함께 연기하는 건 정말 재미있는 일이죠. 그럴 때면 뭔가 지나갔던 제 인생이 인정받고 보상받는 느낌이 들어요. 누군가 '잘 살았어 친구야' 이렇게 위로하는 것 같아요."
  • ▲ 영화 '내가 죽던 날'에서 목소리를 잃은 '순천댁'으로 열연한 배우 이정은.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 흥미진진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편안한 느낌 주는 배우돼야"

    이제는 '연기의 달인'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그에게 '연기를 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일각에선 '이정은은 평범한 캐릭터를 맡은 적이 거의 없다'며 벌써부터 선입견을 갖고 그의 연기를 바라보는 이들도 있다.

    "평범한 연기라는 건 사실 없습니다. 어떤 평범한 것도 없어요. '기생충' 전에 나왔던 드라마에서는 '재봉틀 트는 아줌마는 누구니?'라는 질문이 나올 정도로 사람들이 제가 출연한 줄도 몰랐어요. 그러다가 눈에 띄는 배우가 됐죠. 일전에 어떤 감독님께서 '연기하지 마시고 가만히 계세요'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편안한 느낌을 주는 배우가 되라는 뜻이었어요. 잔재주를 부리지 말고, 작품 속에 더 들어가라는 얘기죠."

    이정은은 "김혜수의 '다른 얼굴'을 보고 싶거나, 대사없이 연기한 이정은이 궁금하거나, 노정의의 파릇파릇한 얼굴이 궁금하시다면 산책로를 바꿔 잠깐 극장에 들러달라"며 "외롭거나 조금 지쳐있는 분들에게 분명 힘이 되는 영화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 ▲ 영화 '내가 죽던 날'에서 목소리를 잃은 '순천댁'으로 열연한 배우 이정은.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 흥미진진
    [사진 제공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 흥미진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