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정 감독, '경계인'의 소외와 고독… 서정적 판타지로 풀어내
  • 20대였던 1997년과 40대가 된 2015년. 프랑스 파리와 대한민국의 서울. 장소와 시간, 환경이 끊임없이 교차하는 이 상황이 주인공은 당혹스럽기만 하다.

    이혼 후 오랜만에 찾은 서울, 20년 전 함께 공연예술 수업을 듣던 옛 친구들과 만나 술잔을 기울이던 미라(김호정 분) 앞에 믿을 수 없게도 20년 전 과거가 펼쳐진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일까? 영은(김지영 분)과 성우(김영민 분), 그리고 2년 전 세상을 떠난 해란(류아벨 분)까지 기억 속 과거의 모습으로 나타나 미라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 날 그 술집을 기점으로 과거와 현재, 꿈과 현실, 기억과 환상을 넘나드는 미라의 특별한 여정이 시작된다.

    '프랑스여자'는 전주국제영화제, 샌디에고 아시안영화제를 비롯해 국내외 유수의 영화제에 연이어 초청돼 일찌감치 영화계의 주목을 받은 작품이다.

    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를 겸하고 있는 실력파 감독 김희정과 연기 인생 30년의 베테랑 배우 김호정,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누비며 활발하게 활동 중인 김지영과 김영민, 독립영화계가 사랑하는 배우 류아벨이 의기투합해 전대미문의 판타지 여행기를 만들어냈다.
  •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셉션(Inception)'을 연상케 할 정도로 시공간의 비틀림이 절묘하다. 파리의 어느 술집에 홀로 앉아 생각에 잠긴 미라와, 서울 숙소 침대에서 불안해보이는 모습으로 방안을 두리번거리는 미라의 모습은 그 어느 곳에서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 채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그녀의 고독과 쓸쓸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오랜 기간 폴란드와 프랑스에 체류하면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외국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이방인, 특히 한국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꼭 한 번 하고 싶었다는 김희정 감독.

    그는 자신이 사는 곳 프랑스에서도, 자신의 나라 한국에서도 정착하지 못하고 낯선 감정을 느끼는 '경계인'의 소외와 고독을 영화적으로 담아내기 위해 과거와 현재, 꿈과 현실, 일상과 환상을 오가는 방식을 차용했다.

    "제가 폴란드에서 7년 동안 유학생활을 했고요. 1년간 프랑스에도 체류했어요. 자연스레 그 시절에 만났던 한국 여성들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죠. 복잡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그런 상태에 있는 분들이 계셨거든요. 자신의 땅이 아닌 곳에서 살아가는 이방인, 그러한 묘한 경계에 있는 분들의 삶이 궁금했어요."
  • 1일 오후 서울 광진구 자양동 롯데시네마 건대입구에서 열린 영화 '프랑스여자' 언론배급시사회에 참석한 김희정 감독은 "유학시절 만났던 복잡미묘한 한국 여성들의 심리를 꼭 한 번 스크린에 담아보고 싶었다"면서 "이번 영화는 자신이 연출한 작품 중에서 제일 재미있는 작품"이라고 자평했다.

    "결코 어려운 영화가 아니에요. 우리가 꿈을 꿀 때 나는 현재 내 나이인데 꿈 속의 친구들은 예전 나이로 나올 때가 있잖아요? 그러다가 깨면 다시 원위치로 돌아오고. 그냥 느껴지는 대로 영화를 보셨으면 좋겠어요. 저희 영화는 어떤 답을 찾으려는 영화는 아니에요."

    김 감독은 누누이 이 영화가 쉬운 영화라고 강조했지만 정작 이 영화에 출연한 김지영은 "아직까지 이 작품을 100% 다 이해하지는 못했다"고 솔직한 심경을 고백했다.

    "볼 때마다 늘 새로워요. 아직 다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누구나 기억하고 싶은 기억이 있잖아요? 반면 어떤 순간은 그 순간을 왜곡시키거나 지우고 싶고…. 그 모든 게 삶에 대한 애착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촬영 내내 하게 됐어요."
  • 실제로 영화를 보면 미라는 행복하지 않았던 과거조차도 아름다웠다고 말하면서 그렇게 기억하고 있는 듯한 장면이 나온다.

    트라우마에 의한 망각인지, 아니면 그렇게 믿고 싶어하는 미라의 '의지'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역설적이게도 미라의 '기억'은 흐릿하고, 어느 순간부터 시시때때로 펼쳐지는 '환상'은 강렬하기 그지없다.

    이번 영화에서 1인2역으로 눈부신 활약을 펼친 류아벨은 굳이 그런 상황을 다 이해하려하지 않고 '관계성'에 초점을 맞춰 연기했다. 지금 연기하는 이 캐릭터가 상대방과 어떤 관계에 있고 어떤 인물인지에만 정신을 집중했다고. 지나친 몰입대신 상황에 맞는 담백한 연기를 펼치려 노력했다는 류아벨.

    "꿈이라는 게 설명하자면 굉장히 복잡하잖아요? 등장 인물도 많고. 글로 표현하려면 굉장이 길어지겠죠. 그런데 제가 그 꿈을 꾸면 몇 분밖에 걸리지 않아요. 개인적으로 엄청난 서사의 꿈을 꾸고 나서 이게 현실인지 꿈인지 혼란스러움을 느낀 적이 있어요. 그래서 그런 영화에 도전해보고 싶었는데 마침 좋은 기회가 찾아온 거죠."
  • '프랑스여자'는 다소 혼란스러운 미라의 여행기를 그리고 있으나, 한 폭의 회화를 보는 것처럼 아름다운 영상미로 긴 꿈을 꾼 듯한 몽환적 느낌을 주는 영화다. 아름다운 색감과 빛, 독특한 무드감으로 감각적인 미장센을 뽐낸 이 영화는 인물의 심리묘사와 밀도 높은 스토리, 탄탄한 연출력이 뒷받침된 근래 보기드문 수작이다.

    흥미로운 건 미라가 프랑스에서 키우다 죽은 고양이의 이름이 나비라는 점이다.

    장자(莊子)의 제물론(齊物論)을 보면, 장자가 이런 고민을 하는 대목이 나온다.

    "내가 꿈에서 나비가 됐을 때 사람이었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사람인 내가 나비 꿈을 꾼 것인가? 아니면 나비가 사람으로 변한 꿈을 꾸고 있는 걸까?"
  • [사진 및 자료 제공 = 흥미진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