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권남용 개별사안 엄격하게 따져야… 무죄 취지 파기환송이라 할 수는 없다"
  • ▲ 대법원이 30일 '문화계 블랙리스트' 의혹을 받는 김기춘 전 청와대 대통령비서실장의 상고심에서
    ▲ 대법원이 30일 '문화계 블랙리스트' 의혹을 받는 김기춘 전 청와대 대통령비서실장의 상고심에서 "2심에서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를 다시 다투라"고 판단했다. ⓒ정상윤 기자
    대법원이 '문화계 블랙리스트' 의혹을 받는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의 상고심에서 "2심에서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를 다시 다투라"고 판단했다. 공직자가 직권을 남용한 결과 '다른 사람에게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상대방의 권리행사를 방해한 결과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처벌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공직자의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혐의를 좁게 해석하라는 의미다.

    대법원은 이번 파기환송 취지가 "반드시 김 전 비서실장이 무죄라는 취지는 아니다"라고 밝혔다. 일부 대법관은 그러나 무죄 취지의 개별의견을 냈다. 조희대 대법관은 '새로 임명된 문재인 대통령 산하 대통령비서실 직원들이 청와대 문건을 특별검사에게 제공했고, 이는 위법하게 수집된 증거'라고 봤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재판장 김명수 대법원장)는 30일 오후 2시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 혐의로 기소된 김 전 실장과 조 전 장관의 상고심에서 일부 무죄 취지로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11명의 대법관은 김 전 비서실장 등의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를 다시 다퉈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9명의 대법관은 강요 혐의를 무죄로 본 원심 판단에는 "법리 오해가 없다"고 했다.

    김기춘·조윤선 일부 무죄 직권남용죄… 대법 전합 첫 판단

    김 전 비서실장은 박근혜 정부 당시 청와대 수석 등에게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실행을 지시했다. 김 전 비서실장에게 적용된 혐의는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와 강요, 국회증언감정법 위반 등이다. 김 전 비서실장은 2017년 7월27일 1심에서 징역 3년을, 2018년 1월23일 항소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조 전 장관은 1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2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이번 선고는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에 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첫 판단이다. 그동안 대법원 소부가 이 혐의와 관련한 판단을 내린 적은 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단은 이번이 처음이다.

    파기환송 이유는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였다. 쟁점은 △김 전 비서실장 등이 특정인들에 대한 지원을 배제하라는 지시가 공직자의 직권을 남용한 것인지 △이 지시에 따라 한국문화예술위원회·영화진흥위원회·출판진흥원 소속 직원들이 한 행위가 '의무 없는 일'인지 등이다.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의 근거는 형법 123조다. 이 죄가 성립하려면 우선 공직자가 직권을 남용해야 한다. 여기에 타인에게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타인의 권리행사를 방해하는 두 가지 행위 중 하나가 충족돼야 한다. 

    대법원은 김 전 비서실장 등이 직권을 남용했다고는 판단했다. 다만 '직권남용'의 명확한 기준을 대법원은 제시하지 않았다. '타인에게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타인의 권리행사를 방해하는 일'에만 구체적 의견을 냈다. 대법원은 '직원들에게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것'과 관련해 "직권을 남용했는지와 별도로 상대방이 그러한 일을 할 법령상 의무가 있는지를 개별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대법관 11명은 "직권남용 행위의 상대방이 사인(私人)인 경우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직권에 대응해 따라야 할 의무가 없으므로 그에게 어떠한 행위를 하게 했다면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때에 해당할 수 있다"며 "그러나 직권남용 행위의 상대방이 공무원이거나 법령에 따라 일정한 공적 임무를 부여받고 있는 공공기관 등의 임직원인 경우 법령에 따라 임무를 수행하는 지위에 있는 것이고, 따라서 그가 직권에 대응해 어떠한 일을 한 것이 의무 없는 일인지 여부는 관계 법령 등 내용에 따라 개별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상대방 권리행사 방해 여부, 종전 행위와 차이 따져봐야"

    그러면서 "행정기관의 의사결정과 집행은 다양한 준비과정과 검토, 다른 공무원과 유관기관 등과의 협조를 거쳐 이뤄지는 것이 통상적"이라며 "이 관계에서 한 공직자가 상대방의 요청을 청취하고 자신의 의견을 밝히거나 협조하는 요청에 응하는 것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법령상 의무 없는 일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특히 "공무원이 직권남용 행위를 한 경우에도 상대방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상대방의 권리행사를 방해하는 결과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처벌되지 않는다"고도 했다. 

    대법원 다수의견에는 또 "원심은 예술위·영진위·출판진흥원 소속 직원들이 종전에도 문화체육관광부에 업무협조나 의견교환 차원에서 명단을 송부하고 사업 진행상황을 보고했는지, 그 근거는 무엇인지, 이 사건 공소사실에서 의무 없는 일로 특정한 각 명단 송부 행위와 심의 진행상황 보고 행위가 '종전에 한 행위'와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등을 살피는 방법으로 심리했어야 한다"는 내용도 담겼다. 

    일부 대법관은 무죄 취지의 개별의견을 냈다. 검찰이 위법하게 수집한 증거를 토대로 전 정부 인사들을 기소했다는 의견도 있다. 

    조희대 대법관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후 새로 취임한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한 대통령비서실 직원들이 청와대 문건을 피고인들에 대한 공소를 유지하고 있던 특별검사에게 제공하고 특별검사가 원심에 증거로 제출했는데 이는 위법하게 수집된 증거"라며 이들 증거의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직권남용죄 '무죄' 의견도… "위법수집 증거, 증거능력 없어"

    조 대법관은 그러면서 "수사권이 없는 대통령이나 대통령을 보좌하는 기관인 대통령비서실 또는 수사권과 무관한 행정부처의 누군가가 특정인으로 하여금 수사, 기소 및 유죄의 판결을 받게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증거를 수집해 검사 또는 특별검사에게 제출하는 것은 일반적인 수사 절차의 모습이 아니다"라며 "이는 또 특정인을 형사처벌하기 위해 검사 또는 특별검사의 수사 절차에 개입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같은 행위가 '정치보복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조 대법관은 "대통령이나 대통령비서실 또는 행정부의 행위를 이같이 허용하면, 대통령과 대통령비서실 및 그들의 지시를 받는 행정부의 막강한 행정력을 이용해 정치적 보복을 위해 전임정부에서 활동한 인사들이나 고위공직자들을 처벌하는 데 악용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된다"고 했다. 

    박상옥 대법관도 무죄 취지의 개별의견을 냈다. 박 대법관은 "피고인들의 지원배제 지시 행위가 헌법상 문화국가의 원리에 위배되고 표현의 자유를 침해했으며 평등의 원칙에 반한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봤다. 또 "공무원의 행위가 위헌적으로 평가된다는 이유만으로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의 구성요건인 '직권을 남용했다'고 인정한다면 죄형법정주의에 위반될 소지가 크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