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동명소설 각색, '차별'과 '차이' 주목…오는 25일부터 대전예술의전당 초청공연
  • "페미니즘과 미투 단어를 최대한 걷어내려고 했어요. 지향하든 지양하든, 그 자체를 논하지 싶지 않았죠. 어떤 사조를 만들어내는 게 아닐까. 운동이라고 생각하면 거부감이 들 것 같았거든요. 너무 많은 관례가 있기 때문에 이 작품이 대표되지 않길 바랍니다."

    연극 '이갈리아의 딸들'에서 연출을 맡은 김수정은 시작부터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165분을 내달린다. 원작인 동명소설의 가모장제도 매력을 살리고 세계관을 이어받되 자신만의 해석을 더함으로써 굳이 극장까지 와서 봐야만 하는 이유를 만드는 것.

    '이갈리아의 딸들'은 노르웨이 출신 작가 브란튼베르그(77)의 책으로 1977년 출간된 이후 페미니즘 입문서로 불리고 있다. 국내에서는 판매 부수 30만부 중 약 10만부가 최근 3년 사이 팔렸으며, 도서명을 딴 '웹사이트 메갈리아'로 사회적 논쟁이 일기도 했다.

    작품은 남녀의 성(性)역할이 뒤바뀐 가상의 세계 이갈리아를 그린다. 이갈리아는 남성이 집안일과 육아를 하고, 임신과 출산이 가능한 여성이 모든 경제활동을 책임지며 권력을 갖는 나라다. 여성과 남성은 차별과 혐오로 인해 자연스럽게 강자와 약자로 구분되고, 그 속에서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뉜다.

    김수정 연출은 "2년 전 소설을 너무 재미있게 읽었어요. 1부는 남녀 입장이 바뀌면서 통쾌했는데, 2부에서는 제가 처음 느꼈던 1차원적인 감정이 부끄럽더라고요. 페미니즘과 여성학을 열심히 공부했고, 매너·행동양식 분석·영상물 등 많은 자료를 참고하며 준비했어요. 명확한 블랙코미디라고 볼 수 있죠"라고 말했다.

    '이갈리아의 딸들'은 크게 '차별'과 '차이'에 주목한다. 원작 소설이 페미니즘을 중심으로 다뤘다면 연극은 여성과 남성, 피해자와 가해자, 지배계급과 노동계급, 결혼제도와 가족, 성소수자, 미투운동 등 권력의 차이로 발생되는 현재 사회의 수많은 담론을 드러낸다.

    "1부는 원작을 충실히 따라 우화 같다면, 2부에서는 현실로 떨어져요. 2019년 한국 사회에 맞게 각색해 권력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펼쳐냈어요. 무거운 담론을 예술적으로 아름답게 승화시키고 싶지 않아요. 관객이 한 번에 보고 알아볼 수 있는 문법과 쉽고 직설적인 표현으로 이야기해요."
  • ▲ 연극 '이갈리아의 딸들' 공연 장면.ⓒ두산아트센터
    ▲ 연극 '이갈리아의 딸들' 공연 장면.ⓒ두산아트센터
    "잠수사는 여자가 하는 거예요", "왜 우리가 여자들 선택을 받기 위해 안간힘 써야 되는지 모르겠어", "여자들은 왜 그래요? 내가 한마다미나 해도 조용히 하라고", "난 16살 때 어머니를 떠나서 전형적인 바다의 여자로 살았어. 말하자면 항구마다 내 남자가 한 명씩은 있었어", "수탉이 울면 집안이 망해"…

    연극은 원작이 가진 언어 체계를 관객의 이해를 도울 수 있는 단어로 전환했다. '메이드맨의 무도회'를 '소년들의 무도회', 남성 성기 가리개 '페호'를 '좆브라', '맨움해방주의'는 '남성해방주의'로 바뀌며, 움과 맨움의 개념어는 각각 여자와 남자라는 직관적인 단어로 대체됐다.

    김 연출은 "작년 낭독극 때만 해도 담론이 흐려질까봐 희화화의 위험성을 배제하려고 했어요. 올해는 전형적인 여성성과 남성성을 보여주며 모두 희화화의 대상이 돼요. 서로 다른 성별의 움직임과 화술을 만들기 위해 남자들은 치마와 구두, 여자들은 바지와 운동화를 착용하고 연습했어요"라고 설명했다.

    이어 "사람의 정체성을 여성성과 남성성으로 판단하면 안 돼요. 여성성과 남성성은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것이 아니에요. 우리 사회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습득되고 교육된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여자답지 못해, 남자답지 못해'라는 식에 길들여져 있는 것 같아요"라고 덧붙였다.

    김수정은 연극 '파란나라', '광인일기', '공주(孔主)들', '그러므로 포르노', '인간동물원초' 등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내면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질문하는 연출가다. 2015년부터 극단 신세계를 이끌며 배우, 작가 등과 작품에 대해 분석하고 토론하는 공동창작 방식으로 작업하고 있다.

    폭력, 차별, 불안 등 한국사회가 외면하고 불편해하는 문제들을 과감하게 끄집어내온 김 연출은 "작품 특성상 성적인 대사와 표현·흡연·욕설 장면이 나오고, 극 중 주인공인 소년 페트로니우스가 여성 두 명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하는 모습이 노골적으로 묘사돼요. 관객에 따라 불편해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강간 문제는 피하고 오히려 감추기 때문에 그런 사건이 반복되고 더 생기는 거예요"라고 강조했다.

    연극 '이갈리아의 딸들'은 19일까지 두산아트센터 Space111에서 공연하며, 오는 25~27일 대전예술의전당 무대에 오른다. 26일은 종료 후 관객과의 대화가 진행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