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회 이승만포럼] 이상재와 이승만 : 개화·선교·독립을 위한 협력과 후원 관계
  • ▲ 오영섭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연구교수가 18일 오후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 아펜젤러홀에서 열린 제94회 이승만포럼에서 '이상재와 이승만 : 개화·선교·독립을 위한 협력과 후원 관계'를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오영섭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연구교수가 18일 오후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 아펜젤러홀에서 열린 제94회 이승만포럼에서 '이상재와 이승만 : 개화·선교·독립을 위한 협력과 후원 관계'를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구한말 개화운동과 독립운동을 이어가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된 우남 이승만. 그가 있기까지 그를 측면에서 지원사격한 인물에 대한 연구들이 시급하다는 의견이 많다. 오영섭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연구교수가 그같은 맥락에서 월남 이상재 선생의 삶과 활동을 심도 있게 분석했다. 

    오영섭 교수는 18일 오후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 아펜젤러홀에서 열린 '제94회 이승만포럼-이상재와 이승만 : 개화·선교·독립을 위한 협력과 후원 관계' 강연에서 "우남 이승만의 일생에 대해선 다들 알고 있지만, 그 사이에 월남 이상재 선생이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두 분의 관계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있지 않다"며 월남 이상재 선생을 소개했다.

    오 교수는 이날 포럼에서 "이승만보다 25세 많은 월남 이상재는 1887년 주미공사관 서기관을 지낸 이력이 있을 정도로 미국 사정에 밝을 수 밖에 없는 개화관료였다"며 "한국사에서 두드러질 역할을 한 이승만이 있기엔 그를 지지하고 후원했던 인물이 있었다는 사실을 재조명하고 싶다"고 밝혔다.

    월남 이상재는 누구?

    이상재 선생은 구한말 정치가이자 사회운동가로 알려져있다. 서재필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해 만민공동회를 개최한 인사다. 사후에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사회장 장례를 치른 인물로 알려져 있다.

    오영섭 교수 설명에 따르면,  이상재 선생은 각별한 인연이 있던 박정양이 1887년 초대 주미공사에 임명되자 그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1등 서기관으로 근무하며 서양 문물을 익혔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친미적인 사고를 가지게 됐다.

    오 교수는 "이상재는 일제강점기 중반까지 각급 단체의 지도자로 활약했고, 이승만은 학생개혁운동의 기수로 출발해 청년들의 역할모델이 된 사람"이라며 "양인은 기독교, 친미성향의 경력과 개혁사상, 강렬한 구국의식과 독립사상을 삼위일체로 결합시킨 기독교 개혁운동가 내지 독립운동가로서의 면모를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다"고 했다.


  • ▲ 오영섭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연구교수.ⓒ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오영섭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연구교수.ⓒ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독립협회 인연, 서로의 조력자

    이상재와 이승만의 가장 큰 연결고리는 바로 '독립협회'다. 독립협회는 1896년 결성된 단체로 반청반러 독립자강 운동을 이끌어갔던 한국 최초의 근대적 사회정치단체다.

    오 교수는 "두 사람은 모두 독립협회 운동에 가담했는데, 인생역경 과정을 보면 필연적으로 이들은 독립협회에 가담할 수 밖에 없었던 배경을 지니고 있었다"며 "서재필이 협회를 만드는 과정에서 미국 유학경험이 있던 이상재는 자연스레 여기 가담했고, 이승만 역시 배재학당에서 서재필 휘하 교육을 받은 경험이 있어 자연스레 협회에 발을 내딛게 됐다"고 설명했다.

    "당초 독립협회는 '계몽' 성격이 짙었다. 그러나 1898년 2월 경으로 가면서 정치단체로 성격이 변하기 시작한다. 2월 중순 이상재 선생이 독립협회 회원들과 같이 정부에다가 상소문을 올린다. 조선 정부가 인사권과 재정권을 러시아에 양도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내용의 소위 '반러' 운동이다. 이상재 선생이 정부에 상소문을 올린 한달 후 이승만 박사가 만민공동회 연사로 등장해 이러한 배경을 설명한다. 당시 이상재를 지원하기 위해 이승만이 적극 활동하며 일반 민중 활동을 이끌어갔다."

    오영섭 교수는 "이런 점을 미루어, 이 두 사람이 25세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걸고 동지 개념으로 독립협회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며 "이들의 관계는 고종이 독립협회를 무력화 시킨 이후에도 계속된다. 그것은 바로 기독교"라고 했다.

    이승만의 인도로 기독교에 귀의하다

    오 교수에 따르면, 이승만과 이상재의 특별한 인연은 '한성 감옥'에서 더욱 공고히 맺어진다. 그들의 연결고리는 '기독교'다. 고종 정부가 국내 개혁파를 제거하기 위해 벌인 이른바 '개혁당' 사건을 인해 이상재가 한성감옥에 투옥된 1902년 이후 우남 이승만의 인도로 인해 기독교를 공부하게 된 것이다. 이후 1902년 개혁당 사건으로 3년간 한성감옥에서 복역하며 기독교에 귀의했다.

    당시 이승만은 "조선의 부국강병을 위한 구국의 방책으로 성경을 연구할 가치가 있다"며 이상재를 설득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는 이승만이 박영효 일파의 쿠데타 음모 가담 혐의로 한성감옥에 투옥 중이던 시기다. 한성감옥 투옥 시기, 이승만은 성경반을 운영하며 감옥 내 도서관을 운영, 많은 정치인사들을 기독교에 귀의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오 교수는 "이상재 선생이 투옥 중 8번을 읽었다고 알려진 '경학불염정(經學不厭情)'은 중국 유교사회가 가진 내부 문제점을 비판하고 서구의 근대 민주적 정치제도를 알리고 있다"며 "이런 영향으로 이상재와 이승만은 독립협회 단계에서 맺은 운동 동지를 넘어 사상의 동지로 발전하게 된다"고 했다.


  • ▲ 오영섭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연구교수가 18일 오후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 아펜젤러홀에서 열린 제94회 이승만포럼에서 '이상재와 이승만 : 개화·선교·독립을 위한 협력과 후원 관계'를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오영섭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연구교수가 18일 오후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 아펜젤러홀에서 열린 제94회 이승만포럼에서 '이상재와 이승만 : 개화·선교·독립을 위한 협력과 후원 관계'를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입헌군주제·기독교 운동·독립운동의 선봉에 서다

    이후 두 사람은 서양의 민주적 정치제도에 대한 상호 이해를 주고 받고, 입헌군주제 채택에 대해 의견을 같이 하게 된 것으로 전해진다. 출옥 후 이상재는 황성기독교청년회를 찾아가 YMCA 교육사업에 종사할 뜻을 밝히게 되고, 이승만은 고종의 외교밀사로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오 교수는, 이들의 인연이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이라는 개념으로 또 이어진다고 강조했다. 1919년 3.1운동의 열기를 수렴해 세워진 한성임시정부에서, 이승만 외 이상재 선생 역시 핵심적 역할을 맡았다는 설명이다.

    오영섭 교수는 "한성정부의 조직주체는 기독교민족주의인데 국내외 기독계가 주목하는 이승만을 한성정부 수장으로 선정하는데에 이상재가 큰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사실상 이상재가 이승만을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만들어줬다는 것이다.

    "이상재는 선교사를 통해 국내 부호들에게서 모금한 독립자금을 이승만에게 보냈고,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이승만이 고초를 겪을 당시 전폭적 지지를 공개적으로 표방, 국내외 정치단체나 유력인사를 동원해 이승만의 독립운동 노선을 절대적으로 지지했다. 재정적·정신적·정치적으로 이승만을 후원한 셈이다."

    오영섭 교수는 "워싱턴 회의 실패 후 지지세력 이탈상황으로 정치적 위기를 맞았던 이승만에게 국내 민족운동계 동향을 파악할 수 있도록, 그들과의 관계를 강화할 수 있도록, 일제의 식민지 지배상황을 파악하는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한 인물이 이상재"라고 말했다.

    오 교수는 "대한민국 이승만 대통령이라는 인물이 있기까지 그를 물질적·정신적으로 지원했던 여러 인물들과의 관계를 알면, 개화와 독립 운동 시기를 한결 더 깊게 들여다볼 수 있다"며 "이승만을 지지한 정치운동가들에 대한 연구 및 재조명이 필요한 이유"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