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독립 70주년' 학술대회… "연구비 미끼로 학자들 줄세우기 멈춰야" 호소
  • ▲ 6일 오후 2시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에서 '대한민국의 시작과 완성 그리고 과제' 주제의 학술기념대회가 열렸다. 김명섭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이 모두발언하는 모습.ⓒ뉴데일리 이기륭 기자
    ▲ 6일 오후 2시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에서 '대한민국의 시작과 완성 그리고 과제' 주제의 학술기념대회가 열렸다. 김명섭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이 모두발언하는 모습.ⓒ뉴데일리 이기륭 기자

    대한민국 독립 7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학술대회가 6일 오후 2시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에서 열렸다.

    한국정치외교사학회와 선진통일건국연합 공동주최로 열린 이날 학술대회의 주제는 '대한민국의 시작과 완성 그리고 과제'였다. 이날 학술회의의 주요 논점은 △해방 정국 당시 이승만의 방미 성과 △정권 교체기마다 반복되는 현대사 논쟁 중단 △제헌헌법 전문 분석을 통한 '1948년 건국설'의 정당성 등 3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대한제국-임시정부-대한민국 VS 왕조 조선-식민지 조선-김일성 세습 정권

    김명섭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은 개회사에서 "국가기념일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없이 1919년 혹은 1948년 건국론이 대결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고 했다.

    김 회장은 "대한제국-임시정부-대한민국'으로 이어진 우리의 역사는 '왕조조선-식민지조선-조선인민공화국'으로 이어진 조선의 역사와는 다르다"며 "봉건주의와 공산주의가 결합된 북한의 역사와 달리, 대한민국의 역사는 세계사적으로도 희귀한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이룩했다"고 강조했다.

    김진현 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은, 1949년 암살 당한 백범선생의 시신이 안치된 서대문 경교장을 조문한 기억을 회고하면서, "오늘의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저주하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마치 '자멸'을 보는 것 같아 너무나 안타깝다"고 호소했다.

    경교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던 김구 선생이 1945년부터 1949년 6월26일 안두희의 총에 맞아 암살될 때까지 사용하던 거처다. 피살 직후 경교장 2층 거실에는 백범의 시신이 안치돼 조문객을 받았다.

    김진현 위원장은 "트럼프, 시진핑, 푸틴, 아베가 아닌 한국의 민주정부에서 대한민국의 완성을 막는 이 역사의 반동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이냐"고 반문했다. 그는 "그럼에도 분명한 진실은 대한민국을 부정하고서는 한반도의 자유-평화는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이라고 했다.

  • ▲ 유영익 전 연세대 교수.ⓒ뉴데일리 이기륭 기자
    ▲ 유영익 전 연세대 교수.ⓒ뉴데일리 이기륭 기자

    이승만의 과도정부 수립 제안, 대한민국 건국에 결정적 기여

    첫 번째 발제를 맡은 유영익 전 연세대 교수는 '해방 후 이승만의 방미외교와 남한 과도독립정부 수립 운동'이란 주제의 발표에서, 1946년 12월부터 1947년 4월까지 이승만 박사의 방미외교 배경과 성과를 집중 조명했다.

    유영익 교수는 "1947년 도쿄에서 이승만 박사와 회담을 끝낸 직후 맥아더는 마셜 미 국무장관에게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을 건의했다"며 "이는 비공개로 진행된 당시 회담에서 이승만 박사가 어떤 요청을 했을 지 짐작하게 한다"고 했다. 유 교수는 "당시 이 박사가 맥아더에게 한국문제 유엔 이관을 건의한 것이 맞다면 이는 이 박사가 방미외교로 거둔 최초의 성과"라고 말했다.

    해방 정국에서 미국은 여운형 등이 주장한 좌우 합작운동을 지지하지만 이승만은 이에 결사반대했다. 유 교수는 “당시 이 박사는 '북한에는 이미 정부 형태가 갖춰졌으니 남한에도 우리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과도정부가 하루 속히 수립돼야 한다'는 주장으로 미국을 설득하고자 노력했다”며, “이 박사의 최종 목적은 유엔의 승인을 얻어 남북한 통일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고 했다.

    유 교수는 "이런 사정을 미뤄 볼 때, 이승만의 '단독 정부 수립안'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을 수립하는데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 지 짐작할 수 있다”고 했다.


  • ▲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뉴데일리 이기륭 기자
    ▲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뉴데일리 이기륭 기자

    정권 바뀔 때마다 되풀이되는 역사 전쟁....이제는 돌파구 찾아야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는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사관이 바뀌어서는 안될 일"이라며 "정치권은 이 문제에서 한걸음 물러서고, 연구비를 미끼로 학자들을 줄 세우는 공작을 멈춰야 한다"고 했다.

    그는 특히 최근 불거지는 건국절 논란과 관련해 1919년은 '임시정부 수립일'로, 1948년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구분해,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신 교수는 "각 정권마다 현대사의 국유화를 시도하며 역사적 진실을 훼손하고 있는데, 우리 사회에서 영혼을 판 역사학자들이 없었는지도 되돌아봐야 한다"고 했다. 진영논리에 학자를 동원하는 정치권도 문제지만, 역사학이 정치 도구로 전락되는 동안 이런 현실을 외면한 학계에도 책임이 있다는 주장이다.

  • ▲ 김성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뉴데일리 이기륭 기자
    ▲ 김성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뉴데일리 이기륭 기자

    1948년 건국설 근거, 제헌헌법 전문에 있어

    마지막 발제를 맡은 김성호 연세대 교수는, 1988년과 1948년의 헌법전문에 나타난 역사의식을 비교 분석했다.

    김 교수는 "1988년 헌법은 전문에서 '법통(法統)'이라는 표현을 써 임시정부와의 역사적 연속성을 나타내고 있지만, 법적·정치적으로 적확한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학계의 일치된 견해가 아직 없다"고 지적했다.

    특히 그는 1948년 건국헌법의 전문과 관련해 새로운 해석을 내놨다. 

    김성호 교수는 1919년 임시정부와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의 관계를 헌법제정자(제헌의회)가 어떻게 인식했는지 보려면, 전문의 내용을 재해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제헌헌법의 전문을 분석하면 '1919년의 대한민국을 1948년 다시 건국하기 위해 헌법을 새로 만들었다'고 풀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이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형성적 행위로 임시정부와의 불연속성을 내포한다”고 평가했다.

    즉 제헌헌법의 전문은 현행 헌법과 달리 '법통'이 아닌 '제정'을 강조함으로써, 대한민국의 건국시점이 1948년 8월15일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는 것이 김 교수의 주장이다. 

    김 교수는 “1948년 헌법은 그 정당성의 근거를 유엔 승인 하에 치러진 5.10 총선으로 보고 있다”며 “(전문 중) 3.1운동에 부분은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통성을, 총선거 부분은 건국의 정당성과 관련이 있다”고 설명했다. 정통성과 정당성은 전혀 다른 개념이므로 잘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1919년 (임시정부)의 정통성과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의 정당성을 둘 다 기릴 때, 비로소 대한민국 건국의 의미를 온전히 새길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