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대통령 ‘개헌안 직접 발의’ 카드 만지작, ‘판도라의 상자’ 열까

한국당 이탈표 기대?…"3선 개헌 때처럼 회유·정치공작이라도 하겠다는 말인가"

정도원 기자 프로필 보기 | 최종편집 2018.03.11 11:36:11
▲ 정해구 국민헌법자문특별위원장이 지난해 10월 10일 청와대에서 대통령직속 정책기획위원장 위촉장을 수여받으며, 문재인 대통령에게 허리를 깊숙이 숙여 악수하고 있다. 정해구 위원장은 오는 13일을 전후해 문재인 대통령에게 대통령 개헌안을 보고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뉴시스 사진DB

국민헌법자문특별위원회의 대통령 개헌안 보고 시점이 다가오면서 정치권에 전운이 고조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개헌안을 발의하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젖힐 경우, 야당의 반대가 극렬해지고 정국이 경색되면서, 30여 년만에 찾아온 개헌의 호기가 무산되고 개헌동력이 급속히 사라질 것이라는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11일 정치권에 따르면, 정해구 헌법자문특위 위원장은 오는 13일 위원회가 마련한 '대통령 개헌안'을 문재인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할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 개헌안을 보고받은 문재인 대통령은 일주일 정도 시간을 두고 공론화 및 여론 수렴 절차를 거친 뒤, 오는 20일을 전후해 헌법 제128조 1항 후단에 따라 개헌안의 대통령 직접 발의를 단행한다는 방침이다.

헌법 제128조 1항은 헌법개정안을 발의할 수 있는 주체를 국회의원 재적 과반수로 규정하면서도, 후단에서 대통령도 발의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헌법에서 대통령이 발의할 수 있는 여지를 둔 것은 사실이지만, 역대 헌정사에서 대통령이 발의한 개헌안이 정상적인 내용을 담거나 헌법적 절차를 따라서 처리된 적이 없다는 게 문제다. 30여 년째 시행되며 우리 사회의 절차적 민주주의를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현행 헌법도 1987년 여야 합의를 통해 국회에서 발의됐다.

사문화된 것이나 다름없는 대통령 직접 발의 카드를 꺼내들 경우, 야당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히면서 정국 급랭이 불가피하다. 개헌을 하겠다는 개헌안 발의가 오히려 개헌을 물 건너가게 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정해구 위원장은 지난 5일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이번에 개헌안을 발의하면 처음으로 국민이 전체 개헌안을 갖고 토론할 수 있는 기반이 될 수 있다는 측면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며, 대통령의 직접 발의 가능성을 놓고 물러서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개헌안의 직접 발의를 추진하는 명분은 "6·13 지방선거와 동시에 개헌 국민투표를 하겠다"는 지난해 대선 과정에서의 공약을 지키기 위함이라는 설명이지만, 국회에서 개헌안이 부결되면 국민투표는 할 수조차 없다는 점에서 오히려 공약을 파기하는 수순이나 마찬가지라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야당은 장기독재 시절을 연상케 하는 대통령의 개헌안 직접 발의에 대한 거부감이 상당하다.

지난 7일 청와대에서 열린 여야 영수회담에서 민주평화당 조배숙·정의당 이정미 대표 등 친여(親與) 성향의 야당 대표들마저 대통령의 개헌안 발의 자제를 요청했다.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가 개헌 이야기를 꺼내려 하자,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는 "의제(안보)와 관련없는 이야기를 꺼내지 말라"고 언성을 높였을 정도였다.

한국당 의원실 관계자는 "문재인 대통령이 개헌안을 발의하면, 당연히 야당은 반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한국당 단독으로 개헌저지 의석을 확보한 상황에서 대통령 개헌안의 국회 통과는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대통령이 개헌안을 발의하면 국민적으로 개헌 논의가 활성화되는 것은 고사하고, 불필요한 국론분열과 소모적 논쟁만 심화되면서 오히려 국정동력이 빠르게 감소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문재인 대통령은 권력구조에 관한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권력구조를 제외하고서라도 개헌안을 내놓겠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애초부터 개헌론이 불붙은 계기가 제왕적 대통령제를 청산해야 한다는 권력구조 논의 필요성에서 시작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붕어빵에 팥을 빼놓는 격'이라는 비판을 모면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 김재경 헌법개정·정치개혁특별위원장이 지난달 19일 국회에서 열린 헌정특위 전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뉴데일리 공준표 기자

한국당 의원실 관계자는 "권력구조를 제외한 개헌안이라면 헌법 전문이나 기본권, 지방분권 등을 주로 손대겠다는 뜻"이라며 "하나같이 논란을 야기할 수 있는 대목"이라고 우려했다.

실제로 정해구 위원장은 오는 13일 보고할 예정인 대통령 개헌안의 헌법 전문에 '부마항쟁' '5·18 민주화운동' '6월 항쟁'의 정신을 삽입하고, 기본권 분야에서 시민사회단체의 주장을 반영하며, 지방분권과 관련해서는 개정이 아닌 제정 수준에 가까운 조항을 대폭 마련하겠다고 시사했다.

이와 관련해서는 권력구조만 '원포인트'로 개헌한다고 해도 논란을 피해가기 어려운데, 헌법 전문과 기본권 등을 개정하려 시도하면 자구 하나하나를 따지며 뜻을 묻는 소모적 논의가 이어지면서 개헌 논의가 활성화되기는 커녕 국론분열과 이념적 반목만 극대화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또, 이 과정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운영동력 상실도 필연적인 수순이라는 관측이다.

가상준 단국대 교수는 지난달 9일 국회도서관에서 열린 개헌토론회에서 "대통령이 개헌을 주도하면 실패한 뒤에 정치적 중심에 서지 못하게 되는 등 굉장히 일찍 안 좋은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염려가 든다"고 경고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 때문에 문재인 대통령의 개헌안 직접 발의에 다른 정략적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을 표하고 있다.

지난 2016년 12월 국회에서 탄핵안을 의결할 때처럼, 대통령 개헌안에 찬성하는 좌파 시민사회단체 등 외부 세력을 동원해 보수야당을 압박해서 개헌안 가결에 필요한 재적 3분의 2 이상의 찬성표를 끌어낼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정해구 위원장도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당이 똘똘 뭉치면 부결될 것"이라면서도 "일단 개헌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상당히 크고, 실제 개헌 표결 상황에 들어가면 국회의원들이 많이 고민할 것"이라고 상상했다.

이처럼 한국당 내에서 이탈표를 기대하는 것과 관련해, 한국당 사정에 밝은 정치권 관계자들은 "정치적 망상"이라고 선을 긋고 있다.

한국당 중진의원은 이날 본지와 통화에서 "지금 상황은 친박계의 일방적인 독주가 계속돼 당내 불만이 오랫동안 누적된 끝에 최순실 국정농단까지 터져나왔던 탄핵 전야와는 정치적 상황이 전혀 다르다"며 "대통령이 발의한 개헌안을 놓고 한국당 내부의 전열이 분열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잘라말했다.

또다른 한국당 의원도 "개헌에 대한 국민적 요구와 압박이라는 것은 제왕적 대통령제를 청산하라는 요구인데, 제왕적 대통령제를 청산하지 못하는 문재인 대통령 발의 개헌안에 국회의원들이 왜 고민을 하느냐"고 되레 반문하며 "야당의 이탈표를 기대한다는 것은, 3선 개헌을 할 때 신민당 의원들을 회유해서 이탈시켰던 것처럼 무슨 정치공작이라도 하겠다는 말이냐"고 격한 반응을 보였다.

대통령이 끝내 개헌안을 직접 발의한다면, 헌법 제129조와 제130조 1항에 따라 20일 이상 공고 절차를 거쳐야 한다. 또, 국회는 발의된 날로부터 60일 이내에 표결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오는 20일 개헌안을 발의한다고 가정하면, 오는 5월 18일까지 국회에서 표결을 해야 하는 셈이다.

야당의 반대로 대통령 개헌안의 가결 가능성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정세균 국회의장은 헌법에 규정된 60일의 기간을 거의 다 채울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관측된다.

정치권 관계자는 "대통령이 개헌안을 발의했는데, 여당 출신인 국회의장이 이를 속전속결로 본회의에 상정해 바로 부결시켜버리려 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야당은 개헌안이 계류돼 있는 상황에서 본회의를 개회하는 것 자체를 원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결국 대통령의 개헌안 발의 때문에 국회가 마비되는 상황은 피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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