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구원·조국구원 동일시한 '이승만의 기독교관'

이승만과 김구의 기독교관 차이에서 나타난 대(對)공산주의 시각

정호영·박규빈 기자 프로필 보기 | 최종편집 2018.02.20 18:33:06

▲ 20일 오후 서울 마포구 자유아카데미에서 진행된 제84회 우남 이승만(李承晩) 포럼에서 김명구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 교수가 '이승만의 기독교관'을 주제로 강연을 진행하고 있다. ⓒ뉴데일리 정상윤 사진기자

"이승만에게 기독교 복음은 개인의 구령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한국을 구원할 수 있는 도구라는 자각이었습니다. 따라서 그에게는 개인구원과 국가구원의 문제가 분리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20일 오후 서울 마포구 자유아카데미에서 진행된 제84회 우남 이승만(李承晩) 포럼에서 김명구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 교수가 '이승만의 기독교관'을 주제로 강연을 진행했다.

◇독립운동의 씨앗 된 기독교 정신

1886년 이승만은 배재학당에서 서재필의 강의를 관심 있게 들으며 자유롭고 합리적 토론, 민주적 합의, 진정성의 개념을 습득했다. 이후 배재학당 내에 협성회를 조직해 민주주의가 지향하는 자유·질서·공적 정의와 논리적이고 합리적 주장을 펼치는 방법을 가르쳤다.

김명구 교수는 "배재학당 학생들은 기독교·민주주의·애국사상·민족주의를 하나의 범주로 인식해 활동했다. 이는 민족운동으로 이어져 기독교 항일 민족주의 계보가 만들어지고, 해방 후 한국 정치계로 이어졌다"면서 "말하자면 기독교가 한국 정치의 원류라고 볼 수 있는 셈"이라고 설명했다.

배재학당은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미션스쿨이었지만, 학당의 사전적 의미처럼 학문의 전당의 특성을 강조했다. 학생들은 민주주의와 전통적 계급의식을 극복하며 세계와의 소통법을 배웠다. 이에 따라 기독교 정신은 일제가 내세운 황도정신을 거부하는 규범이 됐고, 기독교 교육과 그 이데올로기가 독립운동의 자양분이 됐다.

◇이승만의 기독교적 지향점

김 교수는 "이승만은 한국이 기독교 복음이 중심이 되는 나라가 되길 기대했고, 동시에 근대 기독교적 윤리관에 의해 변화된 나라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며 "그의 기독교관은 윌슨 미 대통령에게도 영향을 줬고, 후일 대한민국 건국의 기본 개념이 됐다"고 말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이승만은 한성감옥에 수감돼 있던 1899년, 성경을 읽는 과정에서 회심(삶의 총체적 변화)을 체험하며 형언할 수 없는 안위와 기쁨을 느꼈고, 나아가 한 개인의 구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 조국의 구원을 기도하기에 이르렀다.

개인의 구원과 국가의 구원을 같은 차원으로 여기고, 기독교 복음이 한국인 개개인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한국도 구원할 수 있는 신념을 갖게 됐다. 따라서 이승만에게 기독교 문명은 한국이 구원을 얻기 위해 지향해야 할 목표였다.

이는 한 개인의 내적 회심이 한국을 구원시켜야 한다는 사명 의식으로 연결됐다. 동시에 교회의 역할이 국가 존망(存亡)과도 이어지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이승만에게 한국은 기독교 문명국가로 영국·미국과 같은 자유와 평등의 자주독립국가가 돼야 했다는 것이 김 교수의 주장이다.


▲ 김명구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 교수. ⓒ뉴데일리 정상윤 사진기자

◇이승만-김구의 기독교관 차이

현대사에서 이승만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김구다. 한때 이승만과 같은 우익노선을 걸었던 김구는 이른바 '좌우합작'을 제안하면서 공산주의 세력과의 대화에 나섰다. 반면 이승만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결국 두 인물은 다른 길을 걷게됐다.

김명구 교수는 이승만과 김구의 기독교관에 대한 차이점을 발견했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김구가 주장한 '하나님은 대한의 수호자다. 이 땅은 단일민족으로서 한반도는 지상천국이 돼야 하며, 기독교인은 이 땅의 천국을 건설하는 백성이 돼야 한다'는 말에서는 신학사상을 찾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김구의 기독교관은 '우리끼리'라는 것밖에 없다. 하지만 기독교 복음주의의 관점에서는 복음이 한 곳에 모이는 것을 국수주의로 보고 배격한다"고 덧붙였다.

김 교수에 따르면, 김구와 달리 이승만은 기독교 복음이 한국인 개개인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한국의 구원까지 이끌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이승만이 더욱 강력한 반공주의를 선택한 배경이 된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이승만은 한성감옥에서의 회심체험을 통해 한국이라는 한 나라를 인격화하고 개인구원과 국가구원을 동시에 기도했다"며 이렇게 말했다.

"이승만은 개인과 국가를 동일한 위치해서 봤고, 그 구별의식이 뚜렷하지 않았다. 다만 공산주의를 영적인 실체로 보았는지에 대해서는 확인이 필요하지만, 국가구원론의 입장에서 보면 한국이 공산 이데올로기라는 유물 이데올로기에 유린당하는 것을 허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일제강점기 때 독립이 절대 명제이어서 좌우를 가리지 않고 독립을 내세우고 있었음에도 공산주의를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편, 김명구 교수는 2003년 월남 이상재 선생에 대한 연구로 연세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장신대에서 한국교회사를 강의했고 현재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월남 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해위 윤보선-생애와 사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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