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폐가 적폐에게…실체 없는 의혹 제기, 이면에 도사린 不信
  • ▲ 김명수 신임 대법원장이 지난해 9월 26일 대법원에서 열린 취임식에 참석해 내빈에게 인사하고 있다. ⓒ뉴데일리 공준표 기자
    ▲ 김명수 신임 대법원장이 지난해 9월 26일 대법원에서 열린 취임식에 참석해 내빈에게 인사하고 있다. ⓒ뉴데일리 공준표 기자

    실체가 명확하지 않은 블랙리스트 의혹이 대한민국을 분열시키고 있다.

    한 쪽은 팩트(Fact)가 확인되지 않은 불분명한 주장으로 공세를 편다. 다른 쪽은 적폐청산의 광풍(狂風)을 멈추라며 거세게 반발한다. 공방이 뒤섞이면서 국론은 사분오열된다. 하지만 승자는 없다. 남는 것은 피멍 뿐이다. 생채기가 가득한 탓에 정파적 갈등만 첨예하다. 거세지는 이전투구 속에서, 누가 진짜 적폐(積弊)인지 알 길이 없다는 불신만 커지는 상황이다.

    #. 맥 빠진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

    최근 일부 부처 내에서 제기된 블랙리스트 의혹을 놓고 논란이 거세다. 과장(誇張)과 왜곡(歪曲)을 둘러싼 피해의식이 또 다른 문제로 변질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다.

    대법원 행정처가 진보 성향 판사들의 뒷조사 파일을 만들어 불이익을 줬다는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은 2차 조사에도 없는 것으로 22일 결론났다. 작년 1차 조사에서도 사실무근이라는 결과가 나왔었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김명수 대법원장의 지시로 구성된 조사위는 이날 법원행정처가 특정 판사들의 동향을 수집한 것으로 추정되는 문건을 공개했다. 하지만 정작 의혹의 핵심인 블랙리스트의 존재 여부는 확인하지 못했다.

    이틀 뒤인 24일 김명수 대법원장은 블랙리스트가 없다는 결과를 수용하지 않고 3차 조사를 강행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조사위가 행정처 판사들의 컴퓨터를 동의 없이 강제로 열어보는 등 조사 과정에서 빚어진 위법 논란에 대해선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자 김명수 대법원장을 제외한 대법관과 일선 판사들이 반발했다. 한 부장판사는 "법·절차를 위반하면서 컴퓨터를 강제로 열고 의혹을 조사한 결과가 '블랙리스트는 없다'는 것이었다. 조사위를 조사할 역(逆)조사위원회 구성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자유한국당은 25일 블랙리스트가 없다는 조사위의 결과 발표를 강조하면서 김명수 대법원장을 향해 역공(逆攻)을 폈다.

    한국당은 오히려 김명수 대법원장과 조사위를 대상으로 하는 국회 국정조사를 추진하겠다는 입장이다.

    윤재옥 원내수석부대표는 "(법원이) 특정 단체 인물들로 편향된 조사위를 꾸리고 법적 절차를 어겨가며 사법부 블랙리스트를 찾고자 했지만 블랙리스트는 없었고, (조사위가) 김명수 대법원장과 특정 성향 판사들에 대한 불리한 내용을 숨기고 발표하지 않은 정황이 드러났다"고 했다.

    또한 "특정 모임 소속 법관 일부가 진보 성향 국회의원 등과 접촉해 '김명수 대법관 만들기' 작업을 했다는 내용도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고 덧붙였다. 한국당은 "이런 상황에서 김명수 대법원장은 3차 조사를 예고했는데, 국민에게 모든 의혹을 공개하고 해소할 수 있도록 국정조사를 추진하겠다"고 했다. 

    실체가 불분명한 블랙리스트 의혹을 쫒던 김명수 대법원장의 체면이 구겨질 대로 구겨진 꼴이 됐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1988년과 2011년에 각각 설립된 좌파 성향 법관들의 모임인 우리법연구회와 국제인권법연구회의 회장을 지낸 것으로 알려져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적지 않은 파장이 일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대법원장에 김명수 후보자를 지목하자, 당시 야권에선 "많은 법조인이 이념적 코드가 맞는다는 이유 하나로 사법부 수장을 지명한 것에 대해 경악하고 있다"는 반응이 나왔다.


  • ▲ 안병우 국가기록관리혁신 TF 위원장이 15일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행정안전부 브리핑실에서 국가기록관리 혁신 TF 활동결과 브리핑을 하고 있다. ⓒ뉴시스
    ▲ 안병우 국가기록관리혁신 TF 위원장이 15일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행정안전부 브리핑실에서 국가기록관리 혁신 TF 활동결과 브리핑을 하고 있다. ⓒ뉴시스

    #. 핵심 없는 국가기록원 블랙리스트

    국가기록원 혁신을 위해 만들었다는 국가기록관리혁신 태스크포스(TF)의 블랙리스트 의혹 제기 역시 실체가 없어 논란이 되고 있다.

    민간 전문가들로 구성된 국가기록관리혁신 TF는 지난 15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브리핑에서 3개월 간의 운영 경과를 발표했다. 이들은 브리핑에서 국가기록원 내에도 특정인사 차별·배제를 지시한 블랙리스트가 있었다고 주장하며 박동훈 당시 국가기록원장에 대한 수사 의뢰를 권고했다.

    안병우 TF 위원장은 "2015년 당시 박동훈 국가기록원장이 문제위원 8개 위원회 20명을 단계적으로 교체 추진하겠다는 내용의 문서를 장관에게 보고했던 것으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안병우 위원장(한신대 명예교수)은 노무현 정부 시절 국가기록관리위원회 초대위원장을 지냈다.

    박동훈 전 원장이 2015년 3월 26일 정종섭 행정자치부 장관에게 "일부 직원과 외부 진보 좌편향 인사가 네트워크를 형성해 국가기록관리가 정부 정책에 반하는 방향으로 추진되고 있다"는 내용을 보고했다는 것이 TF 측의 주장이다.

    TF 측은 또 박동훈 전 원장이 기록 전문 요원이나 각종 민간 위탁사업시 발주업체에 대해서도 문제 위원이나 업체를 배제하고, 당시 세계기록협회(ICA) 서울총회 준비와 관련해 일부 문제 위원은 이미 교체했다고 보고했다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한국전문가가 국제기구인 동아시아기록협의회(EASTICA) 사무총장으로 선출되는 것을 저지했다는 내용이 담긴 문서도 확보했다고 했다.

    다만 국가기록관리혁신 TF 측은 해당 문서를 블랙리스트라고 단정지으면서도, "20명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위원회 권한의 한계로 확인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TF 측이 의혹의 핵심인 블랙리스트의 실체를 확인하지 못했다고 인정한 셈이다.

    이들이 언급한 블랙리스트 대상자도 논란거리다.

    TF 측은 블랙리스트에 올라 교체 조치됐다는 3명 중 한 명은 이소연 현(現) 국가기록원장이라고 했다. 덕성여대 문헌정보학과 교수인 이소연 원장은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MB 정부를 맹비난하며 "나쁜 청와대가 무자비하게 국가기록원 사람들 손을 빌어서 노무현 전 대통령 비서진을 고발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다른 대상자는 조영삼 서울시 정보공개정책과장으로, 현재 TF 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조영삼 과장은 노무현 정부에서 대통령비서실 기록관리를 담당했었다. EASTICA 사무총장 선출 과정에서 저지됐다는 이상민 국가기록연구위원은 TF 제3분과장을 맡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한 국가기록원장과 현 정부와 궤를 함께하는 TF 위원들이 블랙리스트 대상에 올랐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들이 제기한 의혹은 결론적으로 물증이 없다. 설득력 없는 주관적 시각만 무성할 뿐, 객관적 요인이 부족하다는 의견이 많다.


  • ▲ ⓒ1984년에 개봉한 영화 고스터 버스터즈 포스터
    ▲ ⓒ1984년에 개봉한 영화 고스터 버스터즈 포스터

    #. 블랙리스트? 언제까지 유령만 쫓을텐가 

    TF 측의 블랙리스트 의혹 제기에 박동훈 전 국가기록원장은 즉각 반박자료를 냈다.

    자료에서 박동훈 전 원장은 "구체적인 위원 명단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의혹 일체를 부인했다.

    "국가기록원에는 22개 위원회에 1,100명의 위원이 있는데, 이 중 특정인을 관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8개 위원회 20명이라는 구체적인 명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8개 위원회의 20명이 교체되거나 피해를 입은 경우도 없다. 피해를 입었다라고 주장하는 외부인사가 있으나 8개 위원회 20명과는 무관한 개인에 관련된 내용들이다."

    특히 박동훈 전 원장은 "향후 임기 도래시 교체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구체적인 명단을 토대로 나온 것이 아니라, 개략적으로 예측해 산출한 임의의 수치로 추정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장관 보고 문서에 '기록 전문 요원이나 각종 민간 위탁사업시 발주업체와 관련해 문제 위원이나 업체가 배제됐다'는 내용이 포함됐다는 의혹에 대해서도 "(의견만 있었을 뿐) 전혀 추진되지 않았다"고 선을 그었다.

    박동훈 전 원장은 "실제로 업체가 배제되거나 하는 피해 사례가 있었다면 왜 (TF 측이) 밝혀내지 못했느냐, 이 부분에 대해 전혀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있다"고 꼬집었다. ICA 총회 관련 준비위원 교체에 대해서는 "당시 장관의 정상적인 인사권 행사였다"고 설명했다.

    박동훈 전 원장은 "이런 사항들에 대해 이미 국가기록관리혁신 TF에 충분히 소명했다"고 말했다. 그는 "TF에서도 4개월 간의 광범한 사실조사를 통해 사실이 아니거나 이행이 이뤄지지 않았음을 자체회의에서 확인한 바 있다"고 덧붙였다.

    국가기록원에 대한 수사 의뢰 권고에 대해서는 부적절하다고 반박했다. "수사 의뢰 권고를 위해서는 어떤 내용이 위법하거나 누가 어떤 법에 저촉이 되는지에 대해 최소한의 구체성 있어야 하는데 8개 위원회 20명은 실체도 없고 이행도 되지 않았다"고 했다. 위원 교체의 경우 기관장의 고유권한이기 때문에 위법성도 없다고 성토했다. 끝으로 박동훈 전 원장은 "TF 측의 블랙리스트 의혹 제기에 대한 법적 대응 여부를 면밀히 검토하겠다"고 했다. 

    물론 지난 정부의 인사들이 법을 어기면서까지 블랙리스트를 작성했다면 응당 처벌 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결과가 단순 의혹에 그친다면, 문제 제기자들은 역풍(逆風)을 면키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의 편에 선 인사들이 헛발질을 할수록 지지율이 가파른 하향 곡선을 그릴 가능성이 높다. 이 때문에 여권 내부에서도 "국민들이 적폐청산에 대해 상당한 피로감을 느끼고 있는 만큼 더이상 문제를 키워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국민들은 당장 먹고 사는 것이 문제다. 전 세계의 경제호황에도 불구하고 한국만 경제위기의 늪으로 향하고 있다. 정부가 적폐청산에 골몰하며 경제 해법을 외면 한 끝에 청년실업률은 역대 최고 수준으로 치솟았다. 법인세와 최저임금 인상 정책 덕에 기업과 자영업자들은 눈물을 흘리고 있다.

    지방선거를 앞둔 더불어민주당은 이러한 악재(惡材)를 상당한 부담으로 느끼고 있다는 후문이다. 실제 25일 여론조사업체 리얼미터의 조사에 따르면, 집권 초반 80%를 넘나들던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은 취임 후 처음으로 50%대로 내려앉았다.

    의혹은 누구나 제기할 수 있다. 하지만 명확한 증거가 없다면 이를 블랙리스트라고 확언할 수 없다. 일부의 주장을 일반화하는 오류는 스스로를 옭아매는 독(毒)으로 작용할 수 있다.

    매번 겪어왔던 일이다. 새 정부의 권력에 편승한 한풀이식 보복은 항상 뒤끝이 좋지 않다. 자신이 판 함정에 자신이 빠지는 흑역사의 반복이다.

    실체 없는 의혹이 곳곳에서 쏟아진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뚜렷한 물증이 없다. 실존하는 블랙리스트를 확보한 뒤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면 국민들도 쉬이 납득할 수 있다. 확증 없는 진실공방은 논란과 상처만 남길 뿐이다.

    '의혹은 불신을 뒤따른다(Suspicion follows close on mistrust)'는 말이 있다. 이러한 불신(不信)은 모두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 천(千)의 호통이 만(萬)의 원성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점을 의혹 제기자 스스로가 깨달아야 한다.

    괴짜 교수들이 뉴욕 한복판에서 유령을 잡는 고스트 버스터즈(Ghostbusters)를 떠올리게 한다. 유령 블랙리스트를 쫒는 한국 인사들의 실상이 아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