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화 4세대 대망론

    운동권은 80년대에 4세대가 나왔지만,
     민주화 세력은 이제 막 4세대가 싹 트고 있다.

    최성재   
      
     한국처럼 지독한 명분 문화권에서는 명분을 선점하면
     100m 달리기에서 50m 앞에서 출발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거둔다.

    민주에서 통일로, 통일에서 평화로, 통일에서 환경으로,
     환경에서 인권으로, 인권에서 소통으로, 한국의 운동권은 끊임없이
    명분을 선점함으로써 스스로의 양심에서 뽑은 가시로
     순진한 사람들의 양심을 콕콕 찔렀다.

    그들의 민주는 인민민주, 그들의 통일은 적화통일,
     그들의 평화는 주한미군 철수와 흡수통일(자유통일) 반대,
    그들의 환경은 대기업 때리기, 그들의 인권은 과거 한국의 독재 칼질하기로
    현재 북한의 인권유린 실드치기(감싸기), 그들의 소통은 친북좌파를 뜻한다. 

      1980년대 대학 교수와 우파 언론이 386운동권의 암약과 도약과 전염을 묵인하고 방조하고 보호한 까닭은 무엇일까. 명분 싸움에서, 논리 싸움에서 졌기 때문이다.
    그들의 명분과 논리에 동조했기 때문이다.
     이승만과 박정희를 독재자로 보는 시각이 같았기 때문이다.
    전두환은 숫제 흡혈귀로 보는 시각이 같았기 때문이다.
    386운동권에 가끔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대학에 난무한 대자보를 안 보는 척 훔쳐 본 것은
    그들의 용감한(맹랑한) 현대사 역사관에 상당 부분 동조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장 객관적인 입장이라며 개발독재란 명분을 만들어 냈다.
    경제개발은 인정하되 어디까지나 정치는 독재였다며,
    그들은 자신들의 중용지도(中庸之道)를 솔로몬의 지혜에 견주며 흐뭇해했다. 

      그러다 어느 날 민주화 스모그 속에서 눈을 떠 보니,
    조선일보도 동아일보도, 거기에 기고하는 애국우파도
    일제히 문화혁명의 대상으로 손가락질 받기 시작했다.
    화형식에 끌려 다니기 시작했다.
    인터넷 욕의 바다에서 둥둥 떠다니기 시작했다.

    그들이 명분의 멱살을 단단히 잡혔다는 것을 깨닫기도 전에
    개발독재란 중도는 기회주의로, 회색주의로 낙인찍히고 있었다.

    때마침 포털이 새로운 대중매체로 신문과 방송을 선도하게 되자,
    조선-동아도 급격히 선명성 경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내부 투쟁에서 늙다리들은 서서히 밀려나기 시작했다.
    민주화 찬양과 재벌 때리기 특집을 통해,
    그들은 개발독재에서 그나마 개발마저 빼고
    독재와 그 후의 문제점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키기 시작했다.

    뒤이어 햇볕정책을 앞장서 홍보하기 시작했다.
    이따금 햇볕정책의 문제점을 부각시키기도 했지만,
    그것은 자유언론을 보여 주기 위한 소수의견(op ed)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도 여전히 그들은 독재자란 바른 말 고운 말 대신
    꼬박꼬박 000주석, 000국방위원장, 000제1위원장이라는,
    사실을 빙자한 아첨성 직함을 안 붙이면 불벼락이 떨어질 줄 안다.
     어쩌다 3대 세습 독재자들에게서 직함을 빼고 이름만 쓰는 것도 이들에겐 대단한 용기다.

    독재자 박정희, 박정희, 박정희 XXX, 귀태,
    독재자의 딸(‘민주’ 대통령 김영삼의 애용어), 수첩공주,
    박근혜씨(맞춤법 통일안에 따르면 박근혜 씨, ‘진보’ 의원 이정희의 예절어)는 자연스럽지만,

    독재자 김일성, 김일성씨, 김정일 XXX, 김정은 XXX는 불경스럽다!
    그러면 당장이라도 서울 한복판으로 미사일이 날아올 듯 질겁한다. 

    정치도 이승만과 박정희가 정통이요 민주다.
    그들은 각각 민주화 1세대, 민주화 2세대다.
    봉건주의와 식민지배를 거친 나라에서 건국과 더불어
    한국만큼 자유민주를 실천한 나라는 없다.

     영국도 프랑스도 미국도 독일도 1948년에서 1988년까지 한국이 단 40년 동안 이룩한
    민주화에는 따라오지 못한다.
    남녀불문, 신분불문, 모든 성인에게 투표권을 준 것부터 한국은 획기적이었다.
    자유민주의 원조 영국도 1688년 명예혁명부터 따져도 1928년까지 남녀동등의 선거권 완성에 240년이 걸렸다.

    반세기 만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한 가장 대표적인 나라로 언급되는 나라가 한국과 대만인데, 그 대만마저 1949년부터 1987년까지 계엄체제였다.
     한국은 계엄체제가 가장 길었던 것이 1961년부터 1963년 2년간이었을 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일시적이었다.

    이승만이든 박정희든, 기습남침의 동족상잔을 겪고 가장 호전적인 공산집단을 불과 100리 밖에 둔 상태에서도 항상 야당을 여당과 거의 동등하게 인정해서 국회의석은 야당이 아무리 적어도 3분의 1은 넘었다. 거의 반반씩 차지했다.
     계엄령이 해제되기 전까지 야당은 기껏 20여석밖에 못 차지한 대만과는 비교 자체가 안 된다.
    여타 경제도 정치도 엉망진창이었던 100여 개 신생독립국에 비하면
     한국은 정치도 늘 민도(民度)를 앞질렀다.

    무엇보다 이승만이 깔아놓은 자유민주 토대 위에
    박정희는 자유민주의 핵심인 법치(rule of law)를 확립했다.
    능력 위주란 대원칙을 확립했다. 

      민주화 3세대는 노태우다.
    1987년 6.29와 더불어 한국은 제도적으로는 민주화를 완성했다.
    지금도 그 헌법을 그대로 쓴다.
    만약 그때 김영삼이나 김대중이 한 사람이라도 애국심을 권력욕에 앞세웠다면,
    그래서 둘 중 한 명이 집권했다면, 이어서 이승만과 박정희를 계승했다면, 민주화 3세대가 되었을 수도 있다.   

    한편 민주화 세대가 아니라 운동권 세대는 이미 4세대가 나왔다.
    운동권 1세대는 박헌영, 운동권 2세대는 김영삼과 김대중,
     운동권 3세대는 이명박과 이재오와 김근태,
    운동권 4세대는 386운동권과 노무현이 바로 그들이다.

    이중에서 노골적으로 친북을 지향한 386운동권이 가장 영향력이 큰데,
    그들이 지금도 문화권력과 사회권력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대선 정국을 근 1년 끌고 가는 세력이 바로 이들이다.
    그런데 이들도 답답하다. 90년대 이후 운동권 5세대가 나오지 않고 있다.
    거짓과 선동에 면역되면서 20대는 오히려 우향우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민주화 4세대의 기수가 될 역사적 전환점에 있다.
    그 동안 민주화 세대가 밀렸던 것은 노태우 이후 민주화 4세대가 안 나왔기 때문이다.

    지난 20년이 반면교사가 되어 이제 서서히 20대를 중심으로 인식이 바뀌고 있다.
    인터넷에서도 이제 애국우파가 밀리지 않는다.
    숫자는 적지만 이들은 용광로 애국심과 서릿발 진실과 쇠심줄 논리로 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변희재와 김성욱 등이 일기당천(一騎當千)하고 있다.
     300명 국회의원 중에도 드디어 민주화 4세대의 기수가 나타났다.
    김진태 의원이 단연 돋보인다.
     이들 예비 민주화 4세대에 의해서 조선과 동아도 조금씩 바뀌고 있다.
     인민민주와 민중민주는 같은 말이지만,
    자유민주는 이들과 정반대 편에 있다는 것을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북핵과 북한인권을 동시에 말하고,
    자유와 평등을 동시에 말하고, 성장과 복지를 동시에 말하고,
    자유와 책임을 동시에 말하고, 권리와 의무를 동시에 말한다.
    경제와 복지, 교육과 문화는 아직 아마추어 냄새가 물씬 나지만,
    원칙이 바로 섰으므로 신뢰는 동서남북 오랑캐를 오시하던
    황룡사 9층탑처럼 나날이 높아질 것이다.
    애국심 외에는 온통 아마추어였던 대박(大朴)의 큰 날개 아래 인재가 구름처럼 몰려들었듯이,
    소박(小朴)의 큰 품 안으로도 인재가 구름처럼 몰려들 것이다.
    이미 상산 남재준은 한 자루 정의의 창을 들고
     백만 오합지졸이 피워 올리는 거짓의 안개 앞에서 굳건히 버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