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심 실종

    종교나 철학, 이념이나 교육에 따라 양심이 보편성을 잃을 수가 있다.

    최성재    
     
     
    양심의 가시에 찔려서 입이 까칠해지고 눈이 퀭해지고 다리가 후들거리는
    열다섯 살 가량의 목동이 신부에게 고해성사한다.

     목동: 이 죄인이 과연 하느님으로부터 용서 받을 수 있을까요?

    신부: 죄를 뉘우치고 행동을 고치면 누구나 용서 받을 수 있단다.

    목동: 정말이세요?

    신부: 그럼!

    목동: 며칠 전에 주인님이 치즈 만드는 일을 시켰어요. 우유를 계속 저어야 했어요.
    저는 너무 너무 배가 고팠어요. 참고 또 참았지만, 아무도 안 볼 때 저도 모르게 그만, 아, 저는 정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저는, 흑흑, 저도 모르게 그만 주걱에 묻은 우유를 딱 한 번 핥아 먹었답니다. 그러고 나서 저는 시치미를 뚝 뗐습니다. 그 후 며칠이 지났지만, 차마 주인님께 말할 수 없었습니다. 정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양심의 가책이 너무 커서 차마 신부님께 고해성사도 못하고 끙끙 앓다가, 크게 용기를 내어 오늘에야 이렇게 털어놓습니다. 정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인간쓰레기입니다. 순결하고 거룩한 성모 마리아님,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흑흑!

    신부: 그랬구나. 이제 다시는 그러지 마라. 그러면 하느님이 용서하실 거다.

    목동: 주인님께 말씀 드리지 않을 거지요? 그러면 저는 맞아 죽을 거예요.

    신부: 얘야, 걱정 마라. 고해성사의 비밀은 하느님과 너와 나, 이렇게 셋만 아는 거란다. 얘, 그런데 요즘 어떻게 지내니? 이방인들이 뜸하구나.

    목동: 아, 그거요? 저랑 친구들이 작당해서 아작냈지요. 껍데기를 홀랑 벗기고 몽둥이와 돌주먹으로 반죽음 시켰지요. 이래 뵈도 저도 이젠 청년이 다 됐걸랑요. 언젠가는 한 명 죽이기도 했어요. 자슥들, 우리 동네를 뭐로 보고, 헤헤. 그렇게 빼앗은 진귀한 물건이 아직 많아요. 신부님께도 하나 갖다 드릴까요?

    -부르크하르트(Jacob Burckhardt)의『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화』에서 재구성-

     
    십자군 전쟁과 더불어 동방무역으로 부를 쌓은 이태리의 도시에서 근대 인간이 제일 먼저 탄생하면서 르네상스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이태리는 수백 개의 나라로 갈라져 있어서 10km 정도 벗어나면, 대체로 딴 나라였고 이방인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 이방인(hospes)은 적(hostis)과 동격이라 여차하면 맞아 죽을 수 있었다. 오늘날 여권 없는 탈북자가 중국에서 한국의 유기견 대우도 못 받는 것이나 매 한 가지다. 친북좌파는 이를 철저히 무시하고 외면한다.

     
    더 없이 착하면서 동시에 더 없이 악독한 목동은 이방인을 대상으로 저지른 강도 행위나 구타, 살인에 대해서는 양심의 가책을 전혀 받지 않았지만, 오히려 전쟁에서 승리한 영웅처럼 의기양양해 했지만, 치즈 만들다가 주인 몰래 주걱에 묻은 우유 한 번 핥아 먹은 것에 대해서는 당장에 하나님으로부터 벼락을 맞아도 달게 받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목동은 정말 하찮은 것에 대해서는 절대적 기준의 양심을 보였지만, 어마어마한 범죄에 대해서는 양심의 가책은커녕 도리어 성인식을 치른 듯 뿌듯한 긍지를 느꼈다.

     
    과연 양심은 무엇일까? 김일성과 김정일은 과연 양심이 있었을까? 김정은은 과연 양심이 있을까? 이석기는 양심이 있을까? 문재인은 양심이 있을까? 채동욱, 송경근과 박관근도 양심이 있을까?

     
    목동과 마찬가지로 이들도 분명히 양심이 있다. 그러나 양심은 사회에 따라, 시대에 따라, 이념에 따라, 종교에 따라, 교육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아마 채동욱이 채모군의 이모님에게 준 연하장은 누구보다 아름다운 양심의 발로였을 것이다. 그러나 단죄할 권력을 가진 자로서, 단죄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는 완전무결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부적절한 행위가 드러나자, 곧바로 가시 같은 도덕적 양심이 고개 숙이고 독사 같은 정치적 양심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봉건시대에 노예의 주인이 노예에게 손찌검할 때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까? 아마 눈 감아 줄 수도 있지만, 그러면 버릇이 나빠진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신성한 교육을 포기하는 비겁한 행위로 생각했을 것이다. 잘못을 보고도 손찌검하지 않았으면, 그것에서 오히려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것이다. 노비를 건드려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노예로 팔아넘길 때 주인이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까? 미국은 건국 때부터 민주공화국이었다고 하지만, 미국의 모든 아비가, 어미가 누구든, 제 아이를 제 아이로 받아들인 것은 노예해방 이후의 일이다.

     
    지금 북한에선 19세기 흑인노예보다 비참한 노예 2천만이 해방만 기다린다. 거기서 주인은 손에 꼽는다. 어떻게 보면 최고 존엄 한 명 외에는 모두가 노예다. 누구든지 숙청될 수가 있으니까! 그런 자가 20만 명을 강제수용소에 집어넣고 노예노동 시키는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조금이라도 받을까? 한국의 친북좌파는 어떨까? 그들이 2천만 동포노예에 대해 목동이 우유 한 번 핥은 것에서 느낀 양심의 가책을 느낄까? 아니면 이방인의 껍데기를 벗긴 것에서 느낀 긍지를 느낄까? 말조심하라고? 그러면 왜 북한인권법에 대해서는 결사반대할까? NLL 포기는 없었다라고 말장난하는 것처럼 북한인권에 대해서도 불가지론을 내세울까? 설령 있더라도 최고 존엄이 화나면 더 때릴 것이니까, 모른 척해야 한다고 주장할까?

     
    한국의 대다수 보편적 인권론자들은 그 반대편에 선 자들에 의해 아무리 사소한 잘못도, 당장 벼락 맞을 일로 단죄 당한다. 반면에 한국의 괴이한 특수 인권론자들은 김씨왕조가 저지른 천인공노할 짓들이나 자신들이 한국의 법을 어긴 것, 특히 김씨왕조가 기뻐할 짓을 한 것에 대해서는 무한한 긍지를 느낀다. 민족적 긍지, 자주적 긍지, 선구자적 긍지를 느낀다.

    1980년대에 자유민주가 인민민주에 코가 꿰이면서 그것을 주도한 자들이 한국 지식인의 양심을 훔치면서, 그들의 가슴에서 인류 보편적 양심이 실종되고 386운동권의 제5열적 양심이 똬리 틀었다. 몇 대통령은 소신 있는(음흉한) 정치사면으로 이들의 간덩이를 있는 대로 키워 주었다. 포털과 방송, 신문, SNS에는 이런 386양심이 아직도 주류를 이루고 있다.

    소급입법에 의한 특별법을 합헌으로 판결을 내린 이후 한국에는 인류 보편적 양심이 주류에서 밀려났다. 채동욱, 문재인, 송경근, 박관근, 이들은 지금 양심의 가책을 조금도 못 느낄 것이다. 도리어 분노하고 개탄할 것이다. 그들의 양심은 특수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