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핵의 최종결론은 일본의 핵무장화

    북한과 중국은 북핵 공조의 잽으로 재미 좀 보고
    일본 핵무장의 카운터펀치를 맞을 것이다.

    최성재     
     
       1948년 8월 15일, 3년의 산고 끝에 한국이 고고(呱呱)의 성(聲)을 울렸을 때,
    축복해 주는 이웃은 어디에도 없었다. 숫제 관심조차 없었다.

    영양실조 엄마의 젖은 말라 비틀어졌고, 실업자 아버지는 한숨만 푹푹 쉬고 있었다.
    신생아는 도무지 인간이 될 것 같지 않았지만, 서투른 산파이자 선한 사마리아인으로서
    미국은 우유 몇 통과 밀가루 몇 포대를 적선했다.
    산모는 미역국도 한 그릇 못 얻어먹고 그 다음날 바로 들로 일하러 나갔다.
    아버지는 날품팔이하러 나갔다.

      1950년 6월 25일, 두 돌도 못 채우고 한국은
    늑대 사촌과 곰 이웃과 살쾡이 이웃의 습격을 받고 피난길에 나섰다.

    1961년 5월 16일, 한국은 13살 어린 나이에 부모 곁을 떠나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한 3년 작은 실패와 작은 성공을 거듭하더니,
    환골탈태 작은 돈 큰 돈 가리지 않고 무섭게 돈을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다.

    1977년 1월 12일, 한국은 굶주린 북한에게 남는 쌀을 제공하겠다고 제의했다.
    먹고 입는 걱정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집집마다 자가용을 굴릴 날도 머지않다고 자신했다. 의심하는 국민이 없었다.

    1978년 4월 29일, 한국은 고리 1호 원자력 발전소를 가동했다.

    1979년 10월 26일, 한국은 핵무기 계획을 전면 폐기했다.

    미국은 아시아의 다음 거인 한국의 핵개발을 저지시켰지만,
    중국은 세계의 망나니 북한의 핵개발을 방조했다.

    1979년 미국은 한국의 큰형으로서 사탕과 회초리를 양 손에 각각 하나씩 들고 있었다.
    미국이 회초리를 한 번 공중에 휙 휘두르는 걸로 한국은 핵무기 개발의 손이 영영 묶여 버렸다.

    당시 한국의 대미(對美) 무역 의존도는 50%가 넘었기 때문에,
    어렵게 출발한 새 정부는 꼼짝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반면에 중국은 북한의 핵개발을 빙글빙글 웃으며 방조했다.
    경제와 달리 정치는 여전히 일당 독재에 심취해 있는 나라다웠다.
    모택동 사후 현재까지 37년간 인권유린 기네스북 기록 보유를 조금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북한의 큰형으로서 중국은 북한의 핵개발을 향해
    회초리를 휘두르는 대신 ‘짜고 치는 고스톱’ 윙크를 보냈다.

    북한의 대중(對中) 무역 의존도가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70%가 넘더니
    2012년에는 88%나 되었으므로 중국이 북한의 핵 팔을 비틀기는 식은 죽 한 숟가락 떠먹기보다 쉽다. 북한의 대미 무역 의존도는 예나 지금이나 0.1%도 안 되기 때문에, 미국은 평화적인 방법으로는 북한에 거의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자연히 6자회담은 미국을 약 올리고 한국을 불안에 떨게 만들면서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할 시간을 벌어주고
    천자의 나라에 다섯 오랑캐가 머리를 조아리는 당나라 회담이 될 수밖에 없다.

      1993년 3월 12일, 세계의 망나니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했다.

    2000년 6월 15일, 핵개발비를 싸들고 한국의 대통령 김대중이 북한의 독재자 김정일을 만났다.

    “북한은 핵개발 의지도 없고, 능력도 없습니다.
    핵개발하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한반도에 더 이상 전쟁은 없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2006년 10월 9일, 북한 제1차 핵실험

    2009년 5월 25일, 북한 제2차 핵실험

    2013년 2월 12일, 북한 제3차 핵실험

      미국은 그렇더라도 손해 보는 게 없다.
    오차의 한계(margin of error)가 이를 쉽게 설명한다.
    북한은 미국의 잽 한 방에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질 수 있지만,
    미국은 북한의 소나기 펀치 시위에도 바위처럼 끄떡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거인을 약 올린 대가는 크다. 되로 받고 말도 아닌 섬으로 갚는다.

      2006년 3월 2일, 미국과 인도가 핵협정(U.S.–India Civil Nuclear Agreement)을 맺었다.
    인도의 민간용 핵과 군사용 핵을 구별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전에 미국의 국내법도 바뀌었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국제규범도
    인도 한 나라를 예외로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중국이 북한의 핵을 방조하면, 미국은 중국과 맞장 뜰 수 있는 인도의 핵을
    한 단계 끌어올려 주겠다는 의미였다.

    2013년 10월 3일, 미국은 일본에게 안보 수갑의 열쇠를 건네주었다. 68년 만이다.
    2014년까지 보안관 대 전과자 관계에서 보안관 대 보안관 관계로 개정하겠다며,
    중국에게 국제규범(international norms)을 지키라고 목소리를 깔았다.

    중국이 북한의 핵을 방조한 대가로 일본의 핵무장을 용인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북한의 20kg 플루토늄에 대하여 일본에겐 20,000kg의 플루토늄 보유를
    이미 1990년대에 미국은 눈감아 주었다. 지금은 30,000kg!

      아직도 1945년의 시각으로 잘해야 1993년 3월 11일의 시각으로 일본을 바라보고 미국을 바라보면, 심지어 이석기나 노무현처럼 ‘미국을 남북 공동의 적’으로 보는 시각으로 미국과 일본을 바라보면, ‘새우 등 터지기’는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중국도 소탐대실(小貪大失)하다가 국가가 몇 개로 쪼개질 수 있다. 시장경제만이 아니라 자유민주도 보편적 가치관이다. 중국에선 아직도 후자는 요원하다. 유아독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8천만 공산귀족은 자유민주를 혼란과 무질서로, 천하대란으로, 미국의 음모로, 중화주의의 붕괴로 선전한다. 그 연장선상에 북한의 핵 방조가 있다. 북한의 독재 비호가 있다. 북한의 인권유린 모르쇠가 있다.

    더 심각한 국가는 당사자인 한국이다.

    북한보다는 크지만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서 오차의 한계가 훨씬 작은 한국은
    비대칭무기의 현실화라는 국가 위기를 맞아 지난 20여년 동안 죽을 꾀만 냈다.
    어리석거나 야비했다.

    북한만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에 더하여 일본을 동시에 견제할 수 있는 전술핵무기는
    어리석게도 있는 것도 돌려주고,
    야비하게도 미국의 전술핵무기 대신 들어선 북핵에 대해서는
    말로만 반대했지 행동으로는 줄곧 도와주었다.
    경화(hard currency)로 도와주거나 핵실험 후에는 민족의 핵 운운하며 키득키득 두둔했다.
    거기에 더하여 김일성 식 또는 대원군 식 자주를 내세워 제2의 애치슨라인 자살골을 부추겼다.

    다행히 박근혜 정부는
    국제 규범과 보편적 상식으로 북한의 견강부회와 적반하장에 적절히 대처하고 있다.
    작전권 문제로 잃었던 대미(對美) 신뢰도 조금 회복될 조짐이 보인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
    민족의 운명을 결정할 선택은 한꺼번에 탁자 위에 올라와 있다.

    전술핵을 재배치해야 하고,
    복지비는 과감히 줄이고 국방비는 대폭 올려야 한다.
    미일 집단 방위 체제에 한국도 들어가야 한다.

    이 셋 중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다.
    정권을 걸어야 성공할까 말까 하는 난제다.
    여전히 대중매체를 친북좌파가 70~80% 장악하고 있고,
    인간지옥 북한에는 눈웃음 살살 온정적이고
    20세기 후반의 놀랄 놀자 한국에는 이빨 박박 적대적인
    20여년 역사 교육 탓에 선악에 대한 판단기준이
    패망 직전의 월남처럼 왜곡되어 있는 사람들이
    좌우 막론하고 주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은 국가 존망이 달린 문제도 토론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