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선엽 민족반역자" 妄言 김광진, '민족문제연구소' 출신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임헌영, 공안사건 '남민전 사건' 연루자

    조갑제닷컴(金泌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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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 전쟁영웅’ 백선엽 장군을 “민족반역자”로 낙인찍은 김광진(상단 사진 인물) 민주당 의원이 ‘민족문제연구소’ 전남동부지부 사무국장 출신인 것으로 확인됐다.

    ■ 서울시 동대문구 청량리동 XX빌딩에 위치한 민족문제연구소는 1991년 2월27일 ‘반민족연구소’라는 이름으로 설립됐다. 이후 이돈명(2011년 사망, 변호사)씨가 연구소 이사장으로 취임하면서부터 현재의 명칭으로 바뀌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설립목표를 ▲한국 근현대 민족문제 연구와 해명 ▲한일 과거사 청산을 통한 역사바로세우기 ▲《친일인명사전(親日人名辭典)》 편찬 등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민족문제연구소가 그동안 진행해온 활동은 ▲박정희기념관 건립저지 ▲친일파기념사업 저지 ▲한일협정 개정 ▲<조선일보> 반대 운동 등이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초대 소장은 前 양심수사면추진협의회 의장 출신의 김봉우(金奉雨)씨가, 2대 소장에는 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 출신의 한상범 씨를 거쳐 2003년 10월부터 현재까지 3대 소장으로 임헌영(본명 任俊烈, 남민전 사건 연루자)씨가 맡고 있다.

    이해학 등 '범민련' 활동가, 민족문제연구소 이사로 활동 

    민족문제연구소의 이사진에 이름을 올렸던 인물 중에는 과거 ‘친일진상규명법’ 개정을 주도했던 김희선-이창복 前 열린당 국회의원, 이해학 現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利敵단체인 ‘조국통일범민족연합남측본부’(이하 범남본)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이외에도 연구소 이사진 가운데 이관복(박정희기념관반대국민연대 상임공동대표)씨는 범남본 사무국장을 거쳐 여중생범대위 고문으로 활동했던 인물이며, 장두석(민족의학연구회장)씨는 범남본의 고문으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범남본은 북한의 對南노선을 추종한다는 이유로 결성단계인 1991년 11월 서울고등법원에서 利敵단체판정을 받았고, 1997년 5월16일 다시 대법원에서 利敵단체 판정을 받았다.
     
    ■ 강만길(고려대 명예교수), 리영희(2010년 사망, 前 한양대 명예교수), 김남식(2005년 사망) 등의 左派지식인들도 민족문제연구소를 거쳐 간 학자들이다.

    이들 가운데 左派진영에서 통일운동의 大家로 존경(?) 받아온 김남식 씨의 경우 생존 당시 온·오프라인에서 ‘김일성 영생론(永生論)’을 옹호하는 등 북한체제를 미화했던 인물이다.
     
    김씨는 2004년 자신이 고문으로 활동했던 <통일뉴스>에 게재한 ‘북한의 영생 10년의 이해를 위하여’라는 제목의 글에서 “김일성 수령은 인민대중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인민대중의 뇌수의 역할을 하는 중심이다”, “오늘의 북한사회는 선군(先軍)정치에 의해 ‘주체혁명(主體革命)’의 위업(偉業)을 이끌어 왔다”, “김일성 수령을 영원한 수령으로 모시는 조건에서 선군(先軍)정치는 영원히 지속될 것이 분명하다”는 등 주장을 펴기도 했다.

    임헌영 소장 연루 ‘남민전’, 대표적 공산혁명 조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인 임헌영(문학평론가)씨는 1979년 적발된 공안사건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사건에 연루됐던 인물이다. 남민전은 안용웅(安龍雄) 등이 월북, 김일성에게 사업보고서를 제출하는 등 북한으로부터 구체적인 대남사업과 활동을 지시·통제를 받아 온 공산혁명조직으로 밝혀졌으며, 특히 검거 당시 남한에서 사회주의혁명이 성공할 경우 남한 내에 게양할 붉은 별이 그려진 대형 ‘전선기(戰線旗)’까지 만들어 놓았고, 공작금을 마련키 위해 혜성대(彗星隊)라는 조직을 만들어 재벌집 강도 등을 예비하기도 했다.
     
    남민전 사건은 1960년대 인혁당(제1차 인혁당사건), 통혁당사건 관련자들이 출감 후 노동자·농민·청년학생 등 각계각층을 규합 북한과의 연계 속에 결성된 지하공산혁명조직이다. 이 사건은 1970년대를 대표하는 간첩사건으로 관련자만 해도 84명(불구속자 포함)이 넘었다.
       
    전향한 左翼사상범으로서 1989년《수인(囚人)번호 3179》라는 책을 썼던 김정익 씨는 자신의 저서(著書)를 통해 “남민전 조직원들은 교도관연락책까지 동원, 교도소 내외에 비밀지령을 주고받으며 조직을 강화시킬 정도로 치밀했다”고 적고 있다.

    김정익 씨는 남민전 연루자 K씨(1994년 사망)로부터 공산주의사상교육을 받은 내용을 위 책에서 기록하고 있는데, 김남주가 반복해 교육했던 내용 중 한 가지는 아래와 같다.

    《계급적인 적들을 증오하라, 철저하게 증오하라. 그리하면 자기 자신의 내부로부터 끓어오르는 인간적인 나약한 갈등이 없어진다. 혁명가는 혁명을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싸움에서 일단은 이겨야 한다. 자신의 나약한 인간적인 정을 죽여 없애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혁명가가 취할 자세다. 진정한 혁명가는 혁명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위대한 과업을 추호도 흔들림 없이 완수해야 한다. 남조선에서 민중혁명이 일어나면 최우선적으로 해야 될 일은 이 사회의 민족반동세력을 철저하게 죽여 없애야 한다. 그 숫자는 대략 2백만 정도는 될 것이다. 그래야만 혁명을 완전하게 완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중략) 2백만이라는 숫자가 엄청날 것 같지만 인류역사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민족 전체를 놓고 볼 때에 그것은 소수에 불과하다…(중략) 민족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온 것이다. 우리에게 적은 숫자의 반동세력의 피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한 차원 높은 애국이요, 진정한 민족주의자의 길을 가는 숭고한 행진곡인 것이다. 우리가 있는 이 감옥은 애국 애족의 위대한 과업을 하기 위한 학교인 것이다. 버림받고 핍박받은 소외감이 눈물처럼 넘치는 우리에게 주어진 유토피아적인 학교인 것이다.》

    남민전 사건에 연루됐던 임헌영 소장은 1983년까지 복역한 후 대통령 특사(特赦)로 출소, 1998년 복권되어 중앙대 국문과 겸임교수로 활동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사상적 편향성은 이 단체의 주요 활동인《친일인명사전》(이하 ‘사전’) 편찬에서 확인된다.

    여운형 등 左派인사의 親日행적은 덮어준《친일인명사전》

    ■ 민족문제연구소가 2008년 4월29일 편찬한 사전의 경우, 좌파(左派)의 친일(親日)은 덮어주고, 그렇지 않은 이들의 親日은 부각시켰다. 예컨대 사전은 일제 말기 징병을 권유한 글까지 썼던 여운형(1886~1946)은 친일파 명단에서 빼버렸다.

    반면, 1905년 11월20일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명문을 남겼고 이후 애국계몽운동을 벌여온 장지연(1864~1921)은 1916년 일본총독 부임을 환영하는 넉 줄짜리 한시(漢詩)를 썼다는 이유로 친일파(親日派)에 포함시켰다.

    두 사람의 결정적 차이는 여운형은 좌익(左翼)계열, 장지연은 민족(民族)계열이라는 점이다. 여운형의 親日행적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1943년 일제가 출간한 ‘반도학도출진보’라는 책에는 여운형의 ‘반도 2500만 동포에게 고하는 글’이 수록돼 있다.

    이는 학생들에게 일제징병에 자진참여하라는 내용이다. 같은 책에는 안재홍(安在鴻)의 글도 수록돼 있는데 안재홍의 글에는 ‘담(談)’, 여운형의 글에는 ‘수기(手記)’라고 표시돼 있다. 안재홍은 마지못해 말로 했지만 여운형은 직접 손으로 썼다는 뜻이다.

    광복 후인 1947년 <대동신문>은 “일제 때 여운형의 충성… 친일의 활증(活證)을 보라”는 제하(題下)의 기사에서 여운형의 親日행적을 규탄했다. 당시 조선공산당 자료집을 보면 “여운형은 학도지원권고문 발표하고, 총독부와 밀접하여 김태준 등을 전향하게 했다”며 “친일분자라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내용이 나온다.

    문재인 후보 부친(父親) 구해준 ‘김백일 장군’ 친일파(親日派)로 매도

    사전은 박정희 前 대통령을 만주 육군훈련학교를 나와 만주군 보병중위로 복무했다는 이유로 親日派에 포함시켰다. 반면, 일본 고위 장교 출신인 고종(高宗)의 손자 이우(李鍝)는 친일파(親日派)에서 배제시켰다. 이우는 일본 육사를 나와 육군 중좌(중령)까지 지낸 인물로 33세 때 히로시마에서 원자폭탄에 사망했다.

    2011년 7월, 일부 左派 시민단체는 경남 거제에 건립된 김백일 장군 동상에 검은 휘장이 씌우고 철거를 시도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친일인명사전》에 김백일 장군의 이름(본명 김찬수)이 등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김백일 장군은 1951년 ‘흥남철수작전’ 당시 북한동포 10만 여명을 피란시킨 인물이다. 김 장군은 美10군단장 아몬드(Edward M. Almond) 장군에게 “나의 어깨에 달린 이 별은 지금 흥남부두에 있는 30만 명이 달아준 것이다. 난 저 사람들을 도외시 할 수 없다”면서 수많은 인명을 살렸다.

    참고로 문재인 민주당 대선후보는 1952년 거제도 피란민 수용소에서 태어났다. 文후보의 부친(父親)은 함경남도 흥남출신으로 흥남시청 농업계장으로 근무하다가 1950년 12월 ‘흥남철수’ 당시 美軍의 군용함정을 타고 남쪽으로 피란을 내려와 목숨을 건졌다.<조갑제닷컴>

    김필재 spooner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