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6이 유신이고, 유신이  5·16이다!

     

    조우석 /문화평론가, 뉴데일리 논설위원

     

  • 1972년 10월 유신이 박정희 영구집권과 정권 연장의 거대한 음모인가, 아니면 그 이상의 무엇인가?

    이 질문은 40년을 지난 지금도 여전히 뜨겁다. 반세기 가까운 시절 당시 최고지도자가 내린 결단이 2000년대 초입인 지금도 과거사라는 이름 아래 거듭해 문제가 된다는 구조가 실로 의아하다.

    이런 상황에서 새누리당 대선 후보 박근혜는 거듭 사과 발언을 했었지만, 왜 5·16이 유신이고, 유신이 곧 5·16인가를 오늘 지면에서 한 번 더 살펴보고 싶다.

    다 아시듯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국회 해산과 함께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정당 및 정치 활동 중지, 새로운 헌법개정안의 공고 등의 메가톤급 선언의 표면만 보고 누구나 잘라 말한다. 유신은 두 번 생각할 필요 없이 장기집권의 나쁜 음모였다고…. 국민의 기본권 침해는 물론 대통령의 무한권력을 제도화한 나쁜 헌법이 ‘체육관 대통령’을 뽑았다는 비판이 그 다음에 줄을 잇는다. 그 결과 박정희 18년은 유신 이후 빠르게 피폐해져갔다고 단언하는 이도 주변에 수두룩하다. 이런 상황에서 용기있는 반론을 제기하는 이는 그렇게 많지 않다.

     

    중화학공업화는 씨앗, 유신은 그걸 감싸는 과육(果肉)

     

    중공업-유신, 둘 사이를 잠시 과일에 비유해보자.
    중화학공업화가 씨앗이고 유신체제는 그걸 보호하고 감싸고 있는 과육(果肉)이라는 발상 자체를 하는 이가 한국의 지식사회에서 드물다.

    반대로 장기집권이 씨앗이고, 유신은 그걸 감싸는 과육이라는 생각이 예나 지금이나 견고하다. 실은 유신 선포 당시 대부분 지식인들의 반응도 그랬다. 당시 집권 12년째인 박정희의 장기 집권에 대한 염증이 커져갔다. 권력 피로도 현상은 이승만 시절보다도 뚜렷했다. 말하자면 이랬다. 국민들은 예전보다 잘 살게 됐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면서도 그런 부를 축적해준 권력에 대해 짜증을 내고 있는 이중적 상황이었다.

    당시 중견 언론인 김진현의 사례가 그걸 말해준다. 1972년 미 하버드대 연수 중이었던 그가 오전 강의를 들은 직후 「뉴욕타임스」지면을 펴면서 고국의 유신 선포라는 메가톤급 소식을 접했다. 

    “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이제 유신이라는 이름으로 펼쳐질 자유와 민주화세력에 대한 탄압과 한·미간의 마찰 그리고 무엇보다  탄압을 받을 동아일보의 운명이 나를 비감하게 만들었다. 쏟아지는 눈물도 추스를 겸, 공기를 쐬려고 문을 열고 나갔으나 발에 힘이 빠져 계단에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직후 그는 에드윈 라이샤워 당시 하버드대 교수를 찾아갔다. 훗날 주일대사를 지냈던 라이샤워는 유신 선포 직후 유신 독재를 비판하며 박정희에게 경고를 하기 위해서라도 미국은 주한미군 철수를 고려하라고 주장했던 리버럴 인사였다. 둘 사이에는 뜨거운 시국 대화가 전개됐는데, 그만큼 유신은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충격이었다. 간단하지 않은 문제다.

    지금 우리사회의 원로인 김진현은 1960, 70년대의 정치·경제 성취를 근대화혁명이라고 보는 대표적 지식인이며, 그런 내용의 칼럼과 사회활동을 펴고 있다. 

    그렇다면 유신 선포 소식 앞에서 비탄의 눈물을 쏟았던 그가 ‘역사와 화해’를 한 셈일까? 역사와의 화해는커녕 예나 지금이나 유신을 부정하고, 손가락질하는 이는 이 사회에 너무도 많다.

     

    현대사와 화해한 여성 교포학자 김형아의 경우

  •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견해를 나홀로 제공했던 용감한 학자가 국립오스트레일리아대학 정치학과 교수인 김형아(60)이다. 여성 교포 학자인 그는 유신 체제란 고도성장을 위해 치러야 했던 어쩔 수 없던 사회역사적 비용이라고 감히 규정한다. 김형아는 “중화학 공업화를 추진하기 위해 유신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는가?”라고 스스로 질문한 뒤 “그렇다”라고 답했다. 경제개발을 위해 민주주의를 잠시 저당 잡혀야 했다는 결론이다.

    그런 학문적 소신을 담은 단행본 <박정희의 양날의 선택>(일조각, 2005년)을 펴냈다.
    김형아는 자신의 지론을 뒷받침하는 핵심 증언의 하나로 지난 회에 소개했던 당시 경제2수석 오원철과의 증언과 인터뷰를 소개했다. 김형아도 그렇지만, 테크노크라트 오원철 증언의 핵심은 중화학공업화가 곧 유신이고, 유신이 곧 중화학공업화라는 것이다. 하나 없이 다른 하나는 존재할 수 없었던 동전의 양면 사이라는 오원철의 유명한 발언은 다음과 같다.

    “요사이 많은 사람들이 박 대통령은 경제에는 성공했지만, 민주주의에서는 실패했다고들 말한다. 심지어는 박 대통령 아래서 장관을 지냈던 이들조차 공개적으로 중화학공업과 유신개혁을 별개의 문제인 것처럼 이야기를 한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중화학공업화가 유신이고, 유신이 곧 중화학공업화라는 것이 쓰라린 진실이라고……. 하나 없이는 다른 하나는 존재할 수 없었다. 이런 사실을 무시하는 것은 비양심적이다.”





  • 이 과정에서 테크노크라트 오원철 역할이 중요하다. 중화학공업화가 흐지부지되지 않기 위해서는 강력한 정치적 의지로 그걸 보증하라고 대통령에게 조언했다. 최소 10년은 꿈쩍 않도록 보증해야 한다고 강조를 했다. 실제로 오원철은 김형아와의 인터뷰에서 “경제 발전을 뒷받침하려는 정치적 의지가 변질되거나 중단되는 일이 벌어졌다면 한국은 망하고 말았을 것이다”라고 단정하기도 했다.

    그 발언은 김형아의 목소리와 아주 닮은꼴이다.
    아니 경제수석 오원철, 학자 김형아, 그 이전 유신을 결행한 대통령 박정희의 '진실의 순간'이 그랬을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그래서 지난 회 이 지면에서 나는 많은 이들이 ‘박정희의 고뇌’는 좋아해도 ‘유신의 고뇌’는 모두 나 몰라라하는 이중성을 감히 지적했다. 그건 지식사회는 물론 당시 청와대 대변인으로 박정희를 보필했던 김성진, 보다 핵심세력의 한 명이던 비서실장 김정렴, 권력의 뼈에 해당했던 이후락과 김종필 등도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유신체제의 정당성, 그 체제 출범 전후 대통령의 고뇌를 추적한 책은 없거나 극히 드문데, 이런 상황에서 김형아의 출현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김형아가 만일 한국에서 계속 살았더라면…

     

  •  그의 책 번역본이 나온 게 벌써 7년 전인데, 지금도 상황이 그러하다.
    놀랍게도 김형아는 박정희 독재의 서울이 견딜 수 없어서 한국을 자기 발로 떠났던 사람이다.

    그게 유신 선포 2년이 채 안 되면 1974년의 일이라고 자기 책 서문에서 털어놓고 있다.

    "이곳 오스트레일리아에 온 것은 1974년, 유신헌법이 공포된 지 거의 2년째 되던 해였다. 유신 한국이 너무 살기 어려워서 다시는 돌아보지 않겠다는 모진 마음으로 그렇게 혼자서 떠났다. "

    가늠이 되시는가?

    여자가 얼마나 독한가. 이후 한국과 거의 차단된 채 고립을 자초하며 살았다.

    그러던 김형아는 훗날 박정희 시대의 새로운 진실을 전하기 위해 영어 박사학위 논문을 썼고, 그 번역본을 한국에서 펴냈던 것이다. 끔찍해서 등 돌렸던 조국의 지도자를 대긍정하게 된 20여 년의 세월이 나는 조금은 가늠이 된다. 나 역시 대한민국 건국사에 담긴 역설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김형아는 마침 3년 전 10월 서울을 방문했었는데, 때맞춰 펴낸 나의 책 <박정희, 한국의 탄생>(살림출판사)을 관심있게 읽었다고 전화를 걸어와 더욱 반가왔다.

    오늘은 이렇게 묻고 싶다.

    "김형아가 유신 때 서울을 떠나지 않고 내처 눌러 살았더라면, 즉 국내에서 교수생활을 했더라면 박정희를 긍정하는 책을, 학위논문을 펴냈을까? "

    3년 전 그의 전화를 받았을 때도 그게 궁금했는데, 그 때나 지금이나 나의 대답은 한결같이 "오 노!"이다.

    그녀가 아무리 강심장이라도 대한민국 지식사회의 리버럴 성향이 무서워서, 지독한 자기검열과눈치 주는 분위기에 눌려서 꼼짝도 못했으리라고 본다.

    다행히 그녀는 서울에 없었기 때문에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었다.

    김형아의 경우는 버린 조국이 그래도 그리워서 1960년대 대학가에서 시작된 민족문화운동인 별산대탈춤 등을 연구했다. 이렇게 우회를 하다가 끝내 '문제적 인물' 박정희와 운명처럼 다시 마주쳤다. 그게 1994년 무렵인데, 당시 서울을 찾아 만나야 할 중요인물 거의 모두의 증언을 차곡차곡 들었다. 김종필, 김정렴, 김성진, 오원철 등을 포함해 민주화인사로 분류되던 백낙청 등도 두루 만났다.

    다음은 그녀의 놀라운 증언이다.

     

    김일성 자료는 넘쳐나도 박정희 연구는 거의 없다?

     

    "이 책의 초석이 된 박사논문을 준비할 때 애당초 생각했던 주제는 남북한의 정치지도자들, 즉 김일성과 박정희의 지도이념인 주체-자주의 비교연구였다. 그러나 1994년 한국 연구 방문 중 알게 된 것은 수많은 대학교에 김일성연구소가 있고, 그에 따른 자료도 풍부한 반면에,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자료, 특히 1970년대의 자료는 거의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하도 기이해서 국회도서관 직원에서 물었더니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전두환 정권 때 거의 소각됐다는 것이다. 이런 특이한 현실 앞에서 학술적 호기심에 끌린 필자는 박정희 지도이념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기로 결심했다."(감사의 글)

    김형아의 증언이 거의 20년이 지난 2012년 말 지금 더욱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입맛이 쓴 것은, 그녀 말대로 '정말 기이한 것은' 당시보다 상황이 더 나빠졌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지식사회에 리버럴 성향, 반 박정희 성향은 거의 미동도 하지 않고 있다. 더욱 좌클릭에 열중한다. 종북 어쩌구 하는 소리는 더욱 자주 들려온다.

    이런 상황에서 이 연재 글의 내용처럼 "5·16이 유신이고, 유신이 곧 5·16이다"고 용기있게 말하면, 모두가 불편한 표정으로 상대방을 쳐다본다. 게다가 대선 국면에서 박정희의 생물학적 딸이자, 정치적 후계자 격인 새누리당 박근혜는 아버지를 정면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그것도 개인적 견해가 아니라 대선 후보의 이름으로 선언했고, 그 발언에 대한 표의 이해득실 계산에 바쁜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실로 가관이고 가소롭다.

    지난 주 나는 그렇게 말했다.

    "역사의 시야가 확보된 지금은 유신 선포 전후 한국현대사의 큰 수레바퀴가 굉음을 내며 엄청난 속도로 돌았고, 그게 지금 우리 삶의 토대가 되었음을 그 분도, 나도 기꺼이 인정하게 됐다. 그렇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모두 위선의 나라인 셈이다. 유신으로 얻은 열매를 즐기면서, 겉으로는 욕을 하는 두 얼굴의 태도 때문이다."

     

    마무리의 메시지 하나.

     

  • 오원철(1928년 생), 그 분은 먼 과거 속의 인물이 아니다. 엄연히 생존인물이며, 지금도 여전히 건강하다는 소식을 기회에 들려드리고 싶다. 지난 한참 더웠던 여름에 "우리 한 번 만납시다"하며 쩌렁쩌렁한 전화 목소리를 필자에게 들려줬다. 우리는 이렇게 자기 역사를 잊고 사는 셈이다. 그가 김형아에게 들려줬던 증언보다 더 디테일이 살아있는 흥미로운 책을 여러 권 펴냈다는 것도 차제에 기억해두자.

    그게 <한국형 경제건설>시리즈의 5권짜리 책이다. 출판사 이름은 한국형경제정책연구소로 되어 있는데, 자신의 책을 내줄 곳이 없으니 짐작컨대 자비출판을 했을 것이다. 자비출판했을 것이라는 나의 가늠이 제발 틀린 것이길 바랄 뿐이다.

    그의 이름으로 된 한 권짜리 책이 필요하다면, <박정희는 어떻게 경제강국  만들었나>(동서문화사)를 보시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