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주고 구걸해서라도 평화를 사야한다'는 정치인들에게
  • 20년간의 영화(榮華), 800년간의 치욕(恥辱) - 송나라 진회 이야기



    류성준:   IT 컬럼니스트, 컴퓨터 프로그래머


    지금의 남한이라는 나라를 좀 떨어져서 바라보면 가끔 겹쳐 보이는 역사가 있다. 바로 송(宋) 이라는 나라이다.  등장하는 인물들이 좀 다르고, 시대적 배경이 다르지만, 놀랍게도 공통되는 점들이 많다.
     
    송은 오랫만에 한족(漢族)이 겪는 황금기중 하나였다.   문화적으로는 르네상스시기로 송대의 도자기와 수많은 그림들은 지금도 "보물"로 남아 있다.  산업화도 진전되어, 석탄이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이에 따라 질좋은 철과 동이 많이 생산되었으며, 이에따라 농기구의 발달로 농업생산성도 높아졌다.  경제적으로도 세계화의 시대였다.  멀리 중동의 아라비아 국가들부터 가까이는 고려, 일본등과도 활발히 교역하여 많은 문화적 교류를 하며 깊은 영향을 끼쳤다.  조선을 건국한 주도세력중 하나인 정도전등 사대부들의 성리학도 남송에서 꽃 피워서 고려로 전파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오늘날 한민족의 황금기라고 부를 수 있는 남한의 현실과 많이 대비된다.
     
    그러나, 남한에 여러가지 문제가 많은 것처럼 송에도 수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가장 문제되었던 것은 국방. 당제국이 망하고 5대 10국시대의 대혼란을 거치다가 그중 강대국인 후주의 근위군 대장이었던 조광윤이  건국한 송나라는 당나라의 절도사 제도가 만들어낸 5대 10국 시대의 대혼란을 방지하기 위하여 과거제도를 확립하여 문신들의 문치제도를 완성하게 된다.  이덕분에 황제 독재권의 확립이 이루어졌지만, 동시에 과도한 문관우대로 인해 군사력의 쇠퇴를 불러왔는데, 전쟁에서 이기고도 북방민족에게 매년 조공을 보내는 식의 강화조약을 맺는식으로 "돈을 주고 평화를 사는" 전례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 강화조약중 대표적인 것이 전연의 맹약(澶淵之盟)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거란이 방대해져 요나라가 되고, 20만 대군으로 쳐들어 오자, 황제가 중신들을 몰아놓고 대책을 논한다.   중신들중 목소리가 높은 부재상급의 왕흠약과 진요수등은 한번 싸워보기도 전에 당장 천도해야 한다면서 서로 성도와 남경으로 천도할 지역을 놓고 말다툼을 시작한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나마도 제정신이 박혀 있는 재상 구준이 항전을 재촉해서 황제는 대군을 이끌고 개봉에서 북으로 전진한다.  송와 요의 전투가 벌어지고, 전투에서 허약한 줄로 알았던 송군이 의외로 승리를 거두고 요군은 패퇴한다.  이긴김에 계속 전진해서 하북까지 진출하자고 재상 구준이 우겼으나 허약한 송황제 진종은 그의 의견을 묵살하고 요나라와 강화조약을 맺는다.  이게 바로 그 유명한 전연의 맹약이라는 것이다. 승전국 입장에서 보자면 어처구니가 없는 내용이다.
     
    송(宋)은 요(遼)에 매년 비단 20만 필, 은(銀) 10만 냥을 보낸다.
    송이 형의 나라가 되고, 요는 아우의 나라가 된다.
    양국의 국경은 현상태로 한다.
    이렇게 하여, 송은 총 800만필의 비단과 400만냥의 은을 요에 바치면서 "40년간의 평화"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결국 1126년 여진족의 금나라의 공격에 의해 대응다운 대응도 하지 못한체 멸망한다.  국가멸망의 댓가는 컸다.  수도 개봉은 약탈로 초토화되었고, 황제와 황족, 궁녀, 관료와 기술자들 수천명이 북방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남쪽으로 탈출한 송황제의 동생 조구가  임안(현재의 항주)에서 1127년 남송을 개국한다.
     
    남송은 개국 직후부터 계속 금나라의 남침에 강력하게 저항했다.  특히 악비(岳飛) 장군은 국가의 도움을 거의 받지 못한 상태에서 매번 전투때마다 승전보를 올리는등 혁혁한 전과를 누렸다. 그의 사후 시호가 충무(忠武)라는 것을 보면, 한국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다.   악비가 이끄는 군대는 전투에서는 반드시 이기고, 백성들에게는 결코 폐를 끼치는 일이 없어 마을에 들어설때마다 백성들이 앞다투어 술과 고기를 바칠 정도였다고 한다.  이 군대는 "악가군"이라고 불리며 남송 제일의 최정예군단으로 꼽혔다.
     
    그러나, 1141년 재상 진회의 누명에 의해 투옥된 악비장군은 살해되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142년에는 재상진회에 의해 금나라와의 강화조약이 체결된다. 이 강화조약은 당시 연도를 따서 '소홍의 화의'라고 불린다.   남송이 금에 대해 신하국이 되고, 금나라가 남송의 남중국 지배를 용인하는 대신 남송측이 매년 막대한 물자(은 25만 냥, 비단 25만 필)을 바친다는 내용이었다.  1155년 재상 진회가 사망한 후 악비장군은 복권되며 1204년에는 "악왕"으로 추봉되어 항주의 서호 인근에 악왕묘에 모셔지는데, 이 악왕묘는 오늘날까지 유명한 관광지가 되고 있다.
     
    중국 한족의 민족주의 지식인들이나 민중에게 진회의 '소흥의 화의'는 짐승 같은 여진족의 금나라에 머리를 굽히며 구걸한 강화조약이라 생각되었다. 재상진회가 살아서 권력을 휘두를 때는 악비장군에 대해서 말을 꺼내지 못했지만, 진회가 사망하자마자 바로 악비장군의 혐의가 벗겨지고 복권된 것이 이를 증명한다.
     
    악비장군이 그토록 고생하며 지켜내었던 양양성은 1273년 몽골군에게 함락되고, 이후 송나라는 저항다운 저항도 못해보고 1276년 수도 임안이 함락당하고 1279년 남아 있던 황족들조차 애산전투에서 격멸당해 송나라의 맥은 완전히 끊어지고 만다.
     
    진회는 20여년간 재상에 있으면서 영화를 누렸다.  그러나 사후 그는 매국노의 오명을 뒤집어 썼다.  항주 서호에 있는 악왕묘에는 오늘날까지도 진회부부가 꿇어 엎드린 석상이 전해지고 있는데, 800여년간 이곳을 거쳐간 수많은 향객들이 이곳에서 한번씩 진회부부의 석상에 침을 뱉고 오기에 진회부부의 석상은 수백년간 가래침으로 덮히는 수모를 당하고 있다.
     


  • 북한이 한번씩 군사적 도발을 할 때마다, 도발한 북한정권에겐 한 마디도 못하면서, 남한의 정부만 비난하면서 "돈을 주고 구걸해서라도 평화를 사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치인들이 득세하고 있다.  나는 그들을 보면서 악왕묘의 진회부부 석상을 떠올리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