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北지령 받았다는 者와 같은 형량 받은 老애국자 
     
      서정갑 본부장 1년6월. 한충목 진보연대 대표 1년6월
    金成昱   
     
     한국의 위기는 精神의 위기다. 나라를 짊어질 엘리트들의 애국심 缺乏(결핍)과 정의감 不在(부재)가 혼란을 부른다.
     
     21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부장판사 김용대)는 북한 공작원 지령을 받아 반미투쟁을 벌인 혐의(국가보안법 위반)로 구속 기소된 한충목 한국진보연대 공동대표에게 징역 1년6월 및 자격정지 1년6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韓씨는 親北·反美 성향 좌파단체 실무책임자로 왕성히 활동해 온 인물이다. ▲2005년 9월 인천 자유공원 맥아더동상 파괴를 기도한 ‘통일연대’ 집행위원장을 비롯해 ▲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 공동운영위원장, ▲ ‘미군장갑차여중생故신효순,심미선殺人사건범국민대책위(여중생범대위)’ 공동집행위원장, ▲ ‘이라크파병반대비상국민행동’ 공동대표를 맡는 등 그의 활동이 곧 남한의 친북·반미 운동 그 자체였다.
     
     韓씨는 급기야 북한의 지령을 받으며 반미투쟁을 벌인 혐의로 지난 해 7월 기소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21일 법원은 “韓씨가 2006년 4월 통일연대와 북한 민족화해협의회(민화협)의 교류 논의를 명목으로 북한을 방문해 통일전선부 소속 공작원과 회합하고 지령을 수수한 혐의(회합ㆍ통신 등)에는 ‘전반적으로 통일부의 승인을 받은 의례적 활동에 포함된다’는 취지에서 무죄를 선고했다(以上 연합뉴스 보도)”고 한다.
     
     어이없는 것은 바로 전날 국민행동본부 徐貞甲 본부장에 대한 항소심 판결이다. 서울고법 형사5부(재판장 안영진)는 20일 徐본부장에 대해 2004년 10월4일 국가보안법死守국민대회에서 폭력 시위를 방조한 혐의(특수공무집행방해치상 등)로 징역 1년6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징역 1년6월!
     
     대한민국 파괴에 매진(?)해 온 從北주의자의 反국가 활동에 대한 형량과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쳐온 老애국자에 대한 형량이 같았다.
     
     법원은 徐본부장에 대해 폭력 시위 방조 운운했지만 記者도 끝까지 참여한 10·4국민대회는 평화집회였다. 참가자들 대부분 한국 사회 주류층이었고 60~70대 노인이 주류를 이뤘다.
     
     오히려 집회 당시 경찰은 ‘평화행진을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깬 채 노인들을 향해 물대포를 쏘고 방패와 워커로 때려댔다. 이 과정에서 부상자가 속출하자 몇몇 시민이 흥분해 피켓 등을 집어던졌지만 큰 소동은 없었다. 그러나 법원은 10·4국민대회를 폭력집회로 몰고 당시 대회장도 아닌 徐본부장을 상대로 징역 1년6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해 버렸다.
     
     고시를 패스한 명문대 출신 법조인들을 만나보면 놀라울 정도로 무식한 자들이 한 둘이 아니다. 6법 전서를 달달 외웠을 뿐 대한민국의 성취와 북한정권의 사악함에 대해선 깜깜이다. 책 줄이라고 읽어봐야 진보연 하며 ‘브루스커밍스’나 ‘태백산맥’ 정도를 눈동냥 한다.
     
     넋 나간 이 땅의 청년엘리트들 필사적으로 가르치고 바로잡지 않는 한 작금의 통탄할 상황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徐본부장 판결 직후 한 줄의 성명도 내지 않는 한나라당을 보며 국가관 不在, 정의감 缺乏의 精神的 위기를 더욱 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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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再錄: 2010.7.1 記] 北지령 받은 혐의 한충목의 화려한 활동들
     
     
     경찰과 국가정보원은 중국 등지에서 북한 관계자들과 만나 「맥아더 동상 철거 투쟁」 「주한미군 철수 투쟁」 등에 대한 지령을 받고 활동한 혐의로 한충목 공동대표, 최영옥 자주통일위원회 부위원장, 정대연 前 집행위원장 등 한국진보연대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수사를 벌이고 있다.
     
      수사 관계자에 따르면 이들은 2004년부터 2007년까지 중국 선양(瀋陽) 등지에서 2~3차례 북한 통일전선부 관계자들을 만나 『맥아더 동상 철거 투쟁을 진행하라』 『주한미군 철수 투쟁을 가열 차게 진행하라』는 등의 지시를 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수사를 받고 있는 한충목氏 등은 親北反美(친북반미) 성향(소위 NL계) 좌파단체 實務責任者(실무책임자)로 왕성하게 활동해 온 인물들이다.
     
     <전국연합·통일연대·6.15남측委·겨레하나·여중생범대위·국보법폐지국민연대 집행위원장, 진보연대 공동대표>
     
      대표적으로 한충목氏는 ▲南北연방제를 공개적으로 주장해 온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집행위원장, ▲2005년 인천 자유공원 맥아더동상 파괴를 기도했던 「통일연대」집행위원장을 맡았었다. 통일연대는 密入北(밀입북)한 한상렬 목사가 이끌었던 단체이다.
     
      韓씨는 ▲전국연합-통일연대-민중연대를 계승한 「한국진보연대(진보연대)」가 2007년 출범하자 운영위원장을 맡았으며, 현재는 진보연대 공동대표로 활동 중이다. 진보연대는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불법폭력 촛불집회를 주도한 단체로 지목됐었다.
     
      韓씨는 ▲2002년 3월20일「한총련 합법적 활동을 위한 범사회인 대책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 ▲2001년 2월12일「한국청년단체협의회(한청)」 창립 당시 고문을 맡아, 한총련과 한청 등 利敵團體(이적단체) 활동에도 관여해왔다.
     
      이밖에도 韓씨는 ▲6.15공동선언실천 남측, 북측, 해외위원회 중 「6.15남측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 자격으로 중국과 북한을 오가며 소위 남북교류에 앞장서왔다.
     
      또 김일성대학 등 對北지원에 앞장서 온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겨레하나)」 상임집행위원장도 맡았었다.
     
      그는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 공동운영위원장, ▲「미군장갑차여중생故신효순,심미선殺人사건범국민대책위(여중생범대위)」공동집행위원장, ▲「이라크파병반대비상국민행동」공동대표 등을 맡아 각종 좌파성향 집회의 司會(사회)도 도맡다시피 해왔다. 2002년 11월29일 이른바 「국가보안법 장례위원회」 준비위원도 맡았었다.
     
      韓씨는 국보법 위반 등의 혐의로 4차례 구속된 바 있다. 인터넷 민중의 소리 2006년 2월16일자 기사는 『한충목 통일연대 집행위원장이 구속된 것은 총 4번』이라며 『그 중 세 번이 4~5개월 구속 후 집행유예로 나왔고, 나머지 한 번은 92년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결성과 범민족대회를 주최했다는 이유로 3년형을 선고받아 만기 출소했다.』고 소개했다.
     
      한충목씨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하면 아래와 같다.
     
     <연방제통일 주장하는 전국연합 실무 책임자>
     
      韓씨가 집행위원장 자격으로 실무를 책임져 온 전국연합은 1991년 설립 이래 2007년 진보연대로 소위 발전적 解消(해소)될 때까지 『주한미군 철수·국가보안법 철폐·평화협정체결·연방제통일』을 공개적으로 주장하며, 국내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反美집회를 주도해온 단체이다. 이 단체 자료집에 따르면, 2006년 한 해 전국연합은 약 800 차례의 집회·시위, 기자회견 등 행사를 치렀다고 나온다. 800여 차례면 최소 하루 2~3건의 활동을 했다는 것이 된다.
     
      전국연합은 2001년 9월22~23일 충북 괴산군 보람원수련원에서 가진 소위「민족민주전선일꾼전진대회」에서 『3년의 계획, 10년의 전망, 광범위한 민족민주전선 정당건설로 자주적 민주정부를 수립하여 연방통일조국을 건설하자』고 결의했다. 聯邦制(연방제)실현을 다짐한 이날 결의는 「9월테제」 또는 「군자산의 약속」으로도 불린다. 당시 자료집에서 「연방통일조국 건설」의 개념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연방통일조국 건설은 △북한의 社會主義(사회주의) 혁명역량과 미국의 제국주의 세력의 대결에서 社會主義 혁명역량이 승리하고, 남한 내 民族民主(민족민주)전선역량이 親美(친미)예속세력의 대결에서 민족민주전선역량이 승리한 뒤, △남한 내 民族民主 전선역량의 反帝(반제)투쟁이 북한의 社會主義 혁명역량이 승리의 기선을 잡은 反帝(반제)전선에 加勢(가세)·結集(결집)하는 양상으로 전개될 것이다.》
     
      《6·15공동선언 이후 정세는 「조국통일의 大사변기」로 규정할 수 있다. 가까운 시일 안에 「낮은 단계의 연방제통일」이 실현되고 향후 10년을 전후하여 「자주적 민주정부」가 수립됨으로써 「연방통일조국」을 완성할 수 있는 승리의 길이 열린 것이다. 「낮은 단계의 연방제」가 실현이 되면 駐韓美軍(주한미군)철수 등 反美자주화가 비약적으로 촉진되고, 南側(남측)지배세력이 급속히 약화되는 가운데 民族民主운동세력의 주도아래 諸(제)민주역량을 결집하여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을 함으로써 「연방통일조국의 완성」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요약하면, 소위 조국통일은 「낮은 단계의 연방제통일」→「자주적 민주정부수립」→ 「연방통일조국의 완성」으로 진행되며, 이는 북한의 社會主義(사회주의) 혁명역량에 加勢(가세)·結集(결집)하는 형태로 이뤄질 것이란 주장이다.
     
      북한의 사회주의 혁명역량에 가세하고 결집하는 형태의 통일은 무엇일까? 상상은 독자의 몫이다.
     
     <맥아더동상 파괴 기도 단체 집행위원장>
     
      韓씨가 집행위원장을 맡았던 통일연대 역시 『주한미군 철수·국가보안법 철폐·韓美동맹 파기·615선언 실천』을 주장하며 전국연합과 同一(동일)한 노선을 걸어온 조직이다.
     
      左派회의체인 전국연합이 頭腦(두뇌)라면 통일연대는 민중연대와 함께 좌파진영의 양 날개(兩翼) 역할을 해왔다. 통일연대는 전국연합, 민중연대와 함께 反美운동을 벌여왔는데, 2005년 9월11일 인천맥아더동상 파괴폭동 당시 『맥아더는 학살의 원흉, 戰爭(전쟁)미치광이』라며 일련의 미군철수 성명을 발표했다.
     
      통일연대는 북한정권을 맹목적으로 비호해왔다. 예컨대 통일연대는 2006년 3월21일 유럽의회 제출 의견서를 통해 『국제사회는 인류의 인권향상을 희망한다면 우선적으로 美國의 반인권 행태를 저지하기 위해 힘을 기울여야 한다』며 이렇게 북한정권을 옹호했다.
     
      『미국의 對北적대정책이 지속되는 과정에서도 북은 자체적인 인권 향상을 위한 노력을 지속해오고 있다. 유엔의 각종 인권 규약을 비준하고 국제사회와 평등한 인권대화의 폭을 확대하고자 노력해왔다...이러한 北사회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8-9년 전 식량난이 발생하던 시기에 국경을 넘어온 사람들의 검증되지 않은 증언을 앞세워 국제적 반북여론을 조장, 북을 고립시키고 대북적대정책의 명분을 축적하려하고 있다.』
     
      통일연대는 2005년 2월14일부터 16일까지 서강대에서 「제6회 북한인권난민문제 국제회의」(이하 국제회의)가 열리자, 가두선전까지 벌이며 소위 『북한인권회의의 「害惡(해악)」』을 알리는 선전에 나섰다.
     
      당시 통일연대는 보도자료를 통해 『이번 국제회의의 서울 개최는 한반도의 평화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反인권적이고 反통일적인 국제회의가 될 것이 명확하다』고 주장했다.
     
      韓씨는 같은 달 14일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 2층 대강당에서 열린 「제6회 북한인권 난민문제 국제회의」에 반대하는 80개 단체 공동 기자회견의 사회를 맡았다.
     
      韓씨는 이틀 뒤인 16일 서울 美대사관 부근 정보통신부 앞에서 당시 국제회의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에도 참석, 『미국이 재정지원을 하면서 국제회의를 배후조종하는 등 對北(대북)압살모략책동을 펼치고 있다는 사실을 국민들에게 효과적으로 폭로하고 여러 단체들과 연대함으로서 북한인권법안의 심각성에 대한 공감을 얻어낸 큰 성과를 낳았다』고 말했다(출처 : 통일뉴스).
     
      통일연대의 사무처장인 민경우氏는 국가보안법상 간첩 혐의로 두 차례나 실형을 받았던 인물이다.
     
      閔씨는 1997년 간첩 혐의로 구속됐다가 1999년 대통령 특사로 석방됐다. 그는 5년 뒤인 2003년 다시 간첩 혐의로 구속돼 징역3년6개월 형을 선고받았지만, 형기의 3분의 1을 채울 무렵인 2005년 8월15일 刑집행면제 특별사면과 함께 복권을 받았다.
     
      閔씨는 2003년 당시 『북한 공작원 박용으로부터 활동지시 및 활동자금을 받으며 국가기밀을 탐지·수집·전달하고 국가보안법철폐, 주한미군철수, 조국통일3대헌장, 전민족대단결10대강령, 북한식연방제통일방안의 실천투쟁을 전개해왔으며, 통일연대 결성 등을 북한에 지속적으로 보고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한충목氏는 2004년 8월24일 통일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민경우 처장 사건은 의도와 계획을 가지고 공안세력이 6.15 공동선언에 타격을 주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라며 『구형 10년도 인정할 수 없지만 만약 실형을 선고한다면 이는 6.15 공동선언을 전면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도저히 묵과할 수 없으며, 남북 간의 공동행사를 하기보다는 국가보안법 전면 철폐투쟁을 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다』고 주장했다.
     
     <『南으로든 北으로든 휴전선 반드시 돌파할 것』>
     
      韓씨는 2000년 9월14일 밤 한양대 대운동장 본무대에서 비전향左翼囚(좌익수) 북한 송환을 환송하는 행사의 사회를 맡았었다.
     
      2000년 8월16일 민중의 소리 보도에 따르면, 우용각이라는 송환자는 고별사를 통해서 『대립과 분열을 넘어 연공(連共. 편집자 註 : 공산주의와의 연대)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조국통일 3대헌장 기치 들고 새로운 길을 열어나가야 한다』며 『민족민주세력의 단결을 이루고 통일전선체를 강력히 묶어세워 반통일 세력을 극복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 『우리가 북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통일을 이루기 위한 시작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살아가겠다』며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는 북한의 구호를 인용해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 이 말에는 승리의 철학이 담겨 있다. 조국통일 그날 까지 힘차게 전진하자.』고 주장했다. 「조국통일 3대헌장」이란 김정일이 밝힌 대남적화(赤化) 원칙으로 「조국통일 3대원칙」, 「고려민주연방공화국창립방안」, 「전민족대단결 10대강령」을 가리킨다.
     
     
      韓씨는 국가보안법 철폐와 주한미군 철수를 맹렬히 주장해왔다.
     
      그는 2004년 12월13일 통일연대가 주최한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에서 「자주통일운동, 2004년 결산과 2005년 전망」이라는 주제의 월례토론회에서 『내년을 「자주통일의 원년」으로 삼자는 남북의 공통인식 아래, 지난 달 23일~25일 금강산에서 남북해외 실무회담을 가졌다』고 말한 뒤 이를 위해 국가보안법 철폐와 『반미운동이 본격적으로 주한미군의 撤收(철수) 문제로 다가가야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라고 주장했다.
     
      이어 『내년 8월 14.15일에는 남북 공동행사로서 국토순례대행진 행사를 가지고 南으로든 北으로든 휴전선을 반드시 돌파하겠다』고 강조했다.
     
      韓씨는 2005년 1월14일 통일뉴스 인터뷰에서 북한이 신년사에서 제시한 대남구호인 소위 「3대 공조」와 관련, 『統一(통일)운동하던 이들이라면 누구나 다 인식하고 실천하던 것을 확인해준 것』이라며,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어 북한이 제안한 소위 주한미군철수공대위와 관련, 『한미합동 군사훈련 저지, 미군범죄를 조사하고 그 책임을 묻는 일, 평택미군기지 확장과 광주 패트리어트 미사일 배치에 대한 전면적인 투쟁을 통해 주한 미군을 근본적으로 淸算(청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지난 60년 미군 强占(강점)을 끝장내는 방향으로 힘차게 나아가야 한다』고 했다.
     
      韓씨는 수많은 反美집회의 사회자로 실무자로 활약해왔다. 대표적인 행사 몇 가지만 소개해보자.
     
      그는 2005년 8월15일 경희대에서 열린 소위 「조국광복 60주년 자주평화통일을 위한 결의의 밤」 행사의 사회를 맡았다. 통일연대, 민중연대, 민노당이 공동주최한 이날 행사에서 나온 소위 『민족통일선언』은 소위 『미국의 「전쟁책동」과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 주한미군 撤收(철수) 투쟁 등 반전평화 운동을 벌여 나갈 것,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 오는 11월 부시 방한 반대 투쟁 및 비정규 권리보장 입법쟁취』 등을 결의했다.
     
      韓씨는 2007년 8월15일 중앙대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 환영, 을지포커스렌즈 연습 중단, 주한미군 撤收(철수) 자주통일 결의대회」의 실무기획과 사회를 맡았다. 그는 당시 통일뉴스 인터뷰에서 『대회 내용은 민족대단결, 주한미군 철수, 한미합동군사훈련 저지, 평화협정 체결, 국가보안법 철폐 등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통일과제들이 많이 남아 있어 각계각층의 결의와 실천이 필요하다는 판단이다』고 밝혔다.
     
      이날 대회에서 범민련남측본부는 『우리는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최대 걸림돌인 주한미군을 철거시키는 집행관으로 살아나갈 것이며, 당면하여 을지포커스렌즈 훈련을 막아내고 9.8미군 강점일을 전국방방곳곳에서 미군철수의 대함성이 울려 퍼지게 할 것』이라고 결의했다. 이어 『6.15공동 선언을 역행하는 한나라당을 비롯한 反통일세력들을 埋葬(매장)하기 위한 투쟁을 적극적으로 펼쳐 6.15공동선언 이행이 확고한 대세가 되게 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일성대학 지원한 겨레하나 실무책임>
     
      韓씨의 소위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 자격으로 중국과 북한을 오가며 소위 남북교류에 앞장서왔다.
     
      그는 ▲2004년 11월23~25일 금강산 6.15공동선언 발표 5주년 실무접촉, ▲2005년 4월9일 중국 심양 「6.15공동선언실천을 위한 남북해외공동행사준비위」 실무접촉, ▲2005년 6월14일~16일 평양 「6.15공동선언실천을 위한 남북해외공동행사준비위」 참가, ▲2005년 12월9~10일 중국 심양 「6.15공동선언실천을 위한 남북해외공동행사준비위」 실무접촉, ▲2006년 4월27일 금강산 「6.15공동선언실천 남북공동위원회」 실무접촉, ▲2006년 6월14~17일 광주 「6.15민족통일대축전 행사위원회」 실무책임, ▲2006년 12월21~23일 평양 「6.15공동선언실천 남북공동위원장 회의」 참석, ▲2007년 4월14일 개성 「6.15공동선언실천 남북공동위원회」 실무접촉, ▲2008년 4월2일 금강산 「6.15공동선언실천 남북공동위원회」 실무접촉 등 숱한 남북공동행사에 참석해왔다.
     
      韓씨는 2004년 2월11일 설립된 겨레하나의 운영위원장을 맡아 對北지원에도 앞장서왔다. 겨레하나는 「국보법폐지 국민연대」의 일원으로서 국보법 폐지를 위한 여론몰이를 해왔다. 2004년 11월9일 「시사교양 Q&A」라는 자료에서는 『직장에서, 농촌에서, 거리에서, 학교에서, 동네에서 국보법 폐지를 호소해야 합니다』라며 『지금은 국보법 폐지에 국민적 사력을 모을 때』라고 주장했다.
     
      겨레하나는 북녘교육현대화를 명분으로 金日成(김일성)종합대학을 지원해왔다. 이 단체의 金日成종합대학 지원은 2004년 7월1일 북한과의 교육현대화사업 합의서 채택으로 시작됐다. 당시 최병모 회장과 북한 민족화해협의회 부회장(조평통서기국 부장) 정덕기는 『6.15공동선의 정신에 따라 우선 북한의 대학현대화 협력사업을 협의한다』는 요지로 합의했다.
     
      2006년 2월17일 서울 성공회 서울교구 강당에서 열린 「겨레하나 2006년 정기총회」에서 배포된 자료집에 따르면, 겨레하나는 金日成종합대학에 학생복지후생용품 등 약 6억 원 상당의 물품을 지원했다. 겨레하나측은 같은 달 2월20일 서울 정동 배제빌딩에서 「남북교육교류협력추진위원회(추진위)」을 출범시켰다. 이날 배포된 자료집은 추진위가 겨레하나를 통해 같은 해 4월과 9월, 총 40억 원 규모의 교육기자재를 金日成종합대학 등에 지원할 방침이라고 밝혔었다.
     
     <『민중총궐기를 단행할 것』>
     
      韓씨는 자신의 이념을 실천키 위해 소위 『민중총궐기』를 주장해왔다.
     
      그는 2006년 7월14일 통일뉴스 인터뷰에서 『전체 운동진영에서는 「11월 중순에 민중총궐기를 준비」하고 있는데, 이번 8.15대회가 민중총궐기 투쟁을 준비하고 결의하는 장이 될 수 있도록 한다』고 했다. 같은 해 10월1일 민노총 3층 회의실에서 「민중총궐기 투쟁을 위한 諸(제)단체 대표자회의」를 열어 같은 해 11월11일을 D-Day로 한 「2007범국민행동의날準備(준비)위원회」를 공식 구성했다. 韓씨는 이 자리에서 진보연대 상임운영위원장 자격으로 『오늘을 시작으로 전국 시군구에서 조직위원회를 243개를 조직하겠다』고 주장했다.
     
      韓씨가 주장한 『11월11일 민중총궐기』는 시민들의 참여 부족으로 사실상 선동에 실패했다. 그러나 진보연대 등 소위 『민중총궐기』를 선동하던 주역들은 2008년 정권 교체 이후 「광우병 촛불亂動(난동)」을 통해 마음껏 역량을 과시했다. 달걀로 바위 치듯 진행돼 온 끈질긴 선동이 100일 넘게 서울 도심 한복판을 무정부 상태로 몰고 간 불법폭력 촛불집회로 결실(?)을 맺게 된 셈이다. 韓씨는 「광우병 촛불난동」을 주도한 진보연대의 실무책임을 맡았었고, 이듬해에는 진보연대 공동대표가 됐다.
     
      韓씨의 일관된 선동의 목표는 소위 6.15선언 이행이었다. 2009년 1월30일 북한 조평통이 성명을 발표하자, 그는 『북측이 계속해서 6,15. 10.4선언을 함께 이행하라고 주문했지만 이명박 정부가 이를 거부하면서 남북대결 구도로 만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명박 정부가 지금이라도 대결정책을 포기하고, 6.15.10.4선언을 지지하고 남북화해협력 정책으로 빠르게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