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류‧면접 강화돼 공정성 담보하기 어려울 것”맹 장관 “행정고시는 일제시대 잔재…선진화 추진할 것”
  •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의 딸 유현선(35)씨의 특채과정에서 외교부 소속 면접관이 유씨에게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주는 등 합격을 위한 편의를 봐준 의혹이 사실로 드러난 가운데 고시생들은 유명환 전 외교통상부 장관에게 오히려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암묵적으로 행해져왔던 특별채용을 통한 낙하산 인사에 가까운 ‘인사비리’가 통계수치로 만천하에 밝혀진 것은 물론, 사실상 폐지될 예정이었던 행정‧외무고시 존폐여부 논의도 재점화됐기 때문이다.

    “유 장관을 은인 삼아야…” 정치권‧시민 관심 증폭

    행정고시를 준비하고 있는 이희진(가명‧28)씨는 “처음엔 유 장관 딸 소식을 접했을 때 이러니까 사람들이 특채, 특채 하는구나 싶었다. 몇 년째 책만 파고 있는 나는 뭔가라는 생각에 밤잠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유 장관을 은인으로 삼아야 될 듯하다. 내년부터 시행되는 행시 개편안에 시민들이, 정치권이 관심을 가져주기 시작했다”고 고마움을 전했다.

    행정고시는 내년부터 ‘5급 공채’로 명칭이 변경돼 장기적으로 필요인력의 50%만 이를 통해 뽑겠다는 ‘공무원 채용제도 선진화 방안’으로 변경된다. 이뿐만이 아니다. 외무고시도 2013년 폐지되는 대신 1년짜리 ‘외교아카데미’를 통해 외교관을 뽑게 된다.

    이 같은 개편안들은 특수층의 자녀가 들어가기 대체로 수월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전형방식도 필기고사 대신 서류전형과 면접이 강화되며 석사에 유관기관 경력 2년 정도로 자격을 두고 있다.

    외교아카데미, 심층면접이 사실상 합격 좌우

    외시를 준비하고 있는 김명현(가명‧31)씨는 “특채는 1차가 서류전형이고 2차가 면접이다. 서류전형에서는 개개인의 명백한 프로필이 밝혀지고, 2차 면접에서는 면접관이 청탁이나 여러 가지 외부압력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외무부의 특채인사비리는 서막에 불과하다. 합격의 당락을 좌우하는 3차 과정에서 심층면접이 7일이나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면접이 포함돼 있는 한 공정성을 담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 ▲ 딸 특별채용 의혹과 관련 사의를 표명한 유명환 외교통상부장관이 6일 서울 도렴동 외교통상부에서 열린 실국장회의에 참석한 뒤 청사를 떠나고 있다. 유 장관은 이날 회의에서 딸 특채 문제로 물의를 일으켜 송구스럽다는 뜻을 거듭 밝히고 외교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줄 것을 당부한 것으로 알려졌다.ⓒ연합뉴스
    ▲ 딸 특별채용 의혹과 관련 사의를 표명한 유명환 외교통상부장관이 6일 서울 도렴동 외교통상부에서 열린 실국장회의에 참석한 뒤 청사를 떠나고 있다. 유 장관은 이날 회의에서 딸 특채 문제로 물의를 일으켜 송구스럽다는 뜻을 거듭 밝히고 외교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줄 것을 당부한 것으로 알려졌다.ⓒ연합뉴스

    실제로 현행 외무고시의 경우, 공직적격성 시험(PSAT)와 공인영어점수로 10배수를 뽑은 뒤, 국제법을 포함한 5가지 형태의 지필고사로 최종선발 인원의 1.1배수를, 3차 면접과정(1박 2일 합숙)으로 최종 합격자를 선발한다. 사실상 지필고사가 합격을 좌지우지 한다.

    그러나 외교아카데미의 경우는 1차에 PSAT와 한국사, 공인영어점수, 공인 제2외국어 점수와 더불어 서류평가로 5배수를 뽑는다. 서류평가가 포함된 것을 두고 고시생들은 “1단계 거르기”라고 표현한다. 이어 2차에서는 국제법을 포함한 통합형 지필고사로 2.5배수를 선발한다. 3차로 7일간 치러지는 최종 심층면접에 사활을 걸어야 하는 셈이다. 

    외시생 이선미(가명‧27)씨는 “사실상 서류평가로 스펙과 신상명세가 고스란히 드러난 사람들을 3차 심층면접으로 채용한다. 특채와 다를 바가 없다. 이를 누가 외무고시라고 보겠는가. 학연, 지연, 혈연으로 똘똘 뭉친 외무부 고위 공무원들의 자리 앞에 상사 자식이 면접을 받고 있다면 공정한 심사가 가능하겠는가. 서류전형도 있는데 모를 리 없다”고 꼬집었다.

    ‘현대판 음서제 폐지’ 위한 카페 개설

    사법시험 개편에 대한 불만도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사법고시를 준비하고 있는 김명훈(가명‧33)은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모두 옛말이 돼버렸다. 로스쿨을 졸업하려면 1억원에 달하는 등록금을 내야하는데, 결국은 있는 사람들만 법조인이 되라는 말이다”라며 분노를 표출했다. 사법시험은 2017년부터 완전히 폐지돼 로스쿨 출신만 치를 수 있게 된다.

    고위공직자 자녀의 특채 비리로 촉발된 고시생들의 불만은 집단행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 5일 결성된 ‘현대판 음서제 폐지를 위한 사시·행시·외시 연합 카페’는 이틀 만에 300명이 넘는 회원들이 가입했다. 고시 존폐에 여부에 관한 활발한 토론이 계속되고 있다.

    맹 장관 “다양한 의견 듣겠지만…” 험난한 여정 예고

    이에 정치권의 움직임도 숨 가쁘게 빨라졌다. 6일 한나라당과 행정안전부는 지난달 발표된 ’공무원 채용제도 선진화 방안’을 손질하기로 했다. 민간 전문가 특채 비율을 최고 50%에서 30~40%로 낮추고 특채 비율 확대계획의 유예 기간을 다소 늘리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 특채 면접시험 때 공직자로서의 기본 자질을 가려낼 수 있는 공직적격성 시험(PSAT)을 보도록 하는 방안도 고려중이다.

    그러나 선진화 방안이 큰 변화를 이룰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맹형규 행정안전부 장관은 6일 “행시 개편안은 행정고등고시가 5급 공채로 명칭이 바뀐 것이지 고시 폐지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맹 장관은 이날 국회 행정안전위 전체회의에 참석해 “공청회를 통해 다양한 의견을 듣겠지만 그대로 가는 게 맞다고 본다”면서 “일제 때 고등문관시험의 잔재이고 권위주의적인 것으로 행정고등고시란 이름으로 현재까지 왔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행정고시 개편안이 특정계층을 위한 전유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현장 경험자를 가급적 많이 채용하고 자격요건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등 공정성을 담보하겠다”고 답했다.

    행안부는 ’공무원 채용제도 선진화 추진위원회’를 통해 이런 방안을 정리한 뒤 16일 대국민 공개 토론회를 열어 여론 수렴한 뒤 정부의 개편안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거듭 밝힘에 따라 이를 둘러싼 갈등이 예상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