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수성가 좋아하네  

    나는 한 때 공직선거에 출마하면서 내가 자수성가(自手成家)하였음을 자랑거리로 내세웠다.
    ‘자수성가’라는 말은 쓰지 않았지만, 집안이 가난하여 고학하다시피 하며 공부한 사실을 강조하였다. 그렇게 가난을 겪어봤기 때문에 서민의 애환을 누구보다 잘 알고, 그렇기 때문에 서민의 대변자로 적임이라고도 했다. 두메산골 출신으로 고생 끝에 일류대학교를 나와 유력 신문에서 기자생활을 하고 공직선거 후보로 나왔으니 ‘자수성가’ 이미지를 파는 것이 전혀 터무니없는 일은 아니었다.
     
    “개천에서 용 났다”고 내 입으로 떠든 적은 없지만, 산간오지 출신인 나를 두고 농반진반(弄半眞半)으로 “개천에서 용 났네” 하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결국 용은 못 되고 이렇게 이무기로 살아가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때의 ‘자수성가’ 타령이 참 치기어린 짓이었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남이 나를 자수성가한 사람이라고 추켜세우더라도 그런 칭찬에 우쭐해서는 결코 안 될진대, 스스로 자수성가의 이력을 앞세우는 것은 더더욱 낯간지러운 것이다. 남이 나를 자수성가형이라고 말할 때에도 거기에 반드시 긍정적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자수성가한 사람에게 장점만 있는 게 아니라 단점도 있기 때문이다.
     
    자수성가라는 말 자체에 나쁜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 자수성가(自手成家)란 물려받은 재산이 없이 자기 혼자의 힘으로 집안을 일으키고 재산을 모은 것을 말한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움을 딛고 출세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 것이다. 그런 사람의 성공 스토리를 입지전(立志傳)이라고 하고, 그렇게 성공한 사람을 입지전적 인물이라고 한다. 이런 사람들의 이른바 성공신화는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꿈을 심어주기도 하고, 선거 때는 표를 모으기 위한 선전도구로도 활용된다.
     
    자수성가한 사람에게는 상반된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난다.
    자수성가하였기 때문에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보는가 하면, 자수성가하였기 때문에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보기도 한다.
    예컨대 박완서는 《미망》에서 “사업에서 독자적으로 이룩한 자수성가의 경력이 모든 이에게 그런 신뢰감을 주었다”고 말한다. 그런 그가 《오만과 몽상》에서는 “그는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자수성가하여 대기업의 사장이 되었다. 크게 못할 노릇 한 건 없어도 맨주먹으로 자수성가하려니 동기간이나 처가붙이 돌볼 겨를이 어디 있었겠나?”라고 묻는다. 고난의 터널을 통과한 만큼 자수성가형 인물 특유의 믿음직한 면이 있는 반면에,  맨주먹으로 일어섰다는 자만과 독선으로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남의 말을 듣지 않는 면도 있는 것이다.
     
    ‘자수성가의 모순’ 또는 ‘자수성가의 패러독스’라고나 할까? 나 자신도 그 점에서 예외가 아니다.
    지금은 용기가 많이 줄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나 스스로를 “위기에 강한 남자”라고 생각했다. 보통 때는 다른 사람보다 크게 나은 게 없을지 몰라도 위기가 닥치면 진면목이 드러나고 빛을 발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오기와 근성’으로 무엇을 이루는 데는 한계가 있고, 설령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진정한 성공, 진정한 행복이라고 할 수는 없다. 대개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기 때문에 그렇고, 마음의 여유 없이 한 가지를 이루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하곤 하기 때문에 그렇다. 나는 나 스스로를 겸손하고 온정이 많으면서도 속은 단단한 외유내강형이라고 생각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수성가형 대통령들
     
    자수성가형 인물의 단점은 역대 대통령들 중에서도 드러난다.
    대학의 문턱을 밟아 보지도 않은 채 사법고시에 합격했고 그 후 인권변호사와 ‘청문회 스타’를 거쳐 대통령이 되었던 어느 대통령은 걸핏하면 막말로 국민들을 힘들게 했다. 그는 말로써 국민에게 용기와 힘을 불어넣어 주는 게 아니라 반대세력을 야멸치게 공격함으로써 국민들을 분열시켰다. 교양과 덕, 절제와 신중함은 그에게 없었다. 자수성가한 사람의 한계였는지도 모른다.
     
    그 후 새롭게 대통령이 된 사람도 성장기에 청소부를 하면서 학비를 벌어 대학을 졸업했고 대기업의 최연소 최고경영자가 됐다는 자수성가형 인물이다. 전임 대통령이 워낙 국민을 실망시켰기에 신임 대통령에 대한 기대가 컸으나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용인술에 있어 적재적소의 원칙을 지키기보다는 ‘의리’와 ‘충성’을 중시하며 제 사람 챙기기에 급급하다 보니 국정운영이 반환점을 돌아서고도 난맥상을 면하지 못한다. 역시 입이 가벼워 자주 구설수에 오른다. 자기 주변이 단정하지가 못하다. 임기응변에 능하나 철학이 부재하며 부지런하나 전략이 없다. 상술이나 수완에 비하면 덕망이나 품격이 아쉽다. 어쩌면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인물의 한계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자수성가형 대통령들이 연달아 국민을 실망시키자, 앞으로는 엘리트 집안에서 구김살 없이 자란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자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내 힘으로 일어섰으니 내 힘으로 뭐든 할 수 있고, 내 방법으로 성공했으니 다른 방법은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자수성가형 대통령의 폐해가 너무 크다고 한다. 그러니 좋은 집안에서 제대로 된 가정교육을 받고 올바른 가치관 혹은 신앙을 물려받은 사람을 국가지도자로 선출할 때가 됐다는 것이다.
     
    내 고향 청송군도 자수성가한 정상배에 의해 적지 않은 상처를 입었다.
    초등학교 졸업장도 없이 객지에서 사업을 일으켜 졸부가 되었던 어떤 사람은 민선군수 한 번으로 만족하지 않고 뇌물공천을 받으려다가 덜미가 잡혀 옥고를 치렀는데 그 일로 인해 그 자신만 멍이 든 게 아니라 청송군의 이름이 더럽혀졌다.
    역시 어린 나이에 객지에 나가 갖은 고생 끝에 졸부가 되었던 어떤 사람도 분에 넘치는 민선군수 자리를 탐내어 돈을 뿌렸고, 당선은 됐지만 1년도 안 돼 좌초하고 말았다. 자수성가한 사람 중에는 그 내면에 열등감 혹은 콤플렉스가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에 기어이 출세하고야 말겠다는 야망과 권력욕, 출세욕에 사로잡히는 사람들이 있는데 두 민선군수의 추락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사실은 그들보다 그들에게서 돈을 받고 공천해 준 국회의원에게 더 큰 잘못이 있지만, 어쨌든 그 두 사람의 사례는 자수성가형 인물의 양면성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는 퍽이나 젊은 나이에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자리에 내정된 어떤 사람이 또 자수성가형 인물로 꼽혔다. 그에게서도 인격의 향기보다는 배금주의와 권력숭배의 악취가 먼저 다가온다. 자수성가한 사람의 가장 큰 위험성은 스스로가 정말 자수성가했다고 착각하는 데에 있다. 나도 한 때 그런 부류였으나 지금은 내 부모와 형제자매, 선생님, 친구, 그리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도움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음을 알고, 뒤늦었지만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간다.

    문태준 시인은 언젠가 신문 칼럼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 힘으로 모든 일이 원만해졌다고 우쭐거리며 뽐내는 이들이 간혹 있으나 그것은 참으로 교활하면서도 모태(母胎) 없는 양 구는 격이다. 나의 원만과 충일과 환대에는 다른 이들의 도움이 들어있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겸손(humility)이란 “내 인생에서 성취한 것들은 나 혼자 이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의 덕택에 이룩한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며, 그 반대말은 교만(pride)이다. 그에 따르면 ‘자수성가(自手成家)’는 없고 ‘신수성가(神手成家)’, ‘타수성가(他手成家)’, 혹은 ‘합력성가(合力成家)’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난 요즘 누가 자수성가했다고 스스로 떠드는 사람을 만나거나 자수성가한 사람을 영웅시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속으로 “자수성가 좋아하네” 하며 혼자 웃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