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년간의 억류생활 끝에 남겨진 '반항의 정신' 응어리

    그 후 28년의 세월이 격동하는 풍파 속에 거칠게 지나갔다. 5년간의 억류생활을 후진공산국가에서 치르고 돌아온 후, 나는 나 자신을 정신적으로 아무런 병이 없는 정상인이라고 믿었는데 담당의사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곧 총살시키겠다는 공산 베트남 측과 북한 측의 공갈·협박, 그리고 때로는 웃으면서 내미는 회유의 당근, 5개월간의 연금에 이어진 4년 7개월의 옥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가이따우(=인간개조)를 하지않고 죽을 각오로 버티고 또 버티며 저항했다. 그런 가운데 나는 반항의 정신 응어리가 생겼다.

    그로인해 가볍기는 해도 오래 갈 정신병에 걸려있다는 것이었다. 병이 완치되려면 아마도 5년쯤 걸릴 것이니, 최소한 1년간은 공무원 신분을 가진채 병가(病暇)를 얻어 쉬라는 것이 의사의 권유였다.

    석방되어 귀국함과 동시에 서울대학교병원에 입원하자 내 주치의는 한용철 박사였다. 내과·외과·치과·피부과·이비인후과의 각종 치료를 받으며 입원중이던 병원을 나와서, 통원치료로 전환하게 된 것은 1980년 5월 중순의 일이었다. 내가 없는 5년간, 아내가 어린것들을 데리고 이리저리 이사하면서 고생끝에 용케도 압구정동 신개발지역에 중형아파트 하나를 마련해 놓아, 나는 그곳의 가족 품으로 돌아갔다.

  • ▲ 꿩이 하늘을 날고 있다 ⓒ 연합뉴스
    ▲ 꿩이 하늘을 날고 있다 ⓒ 연합뉴스

    - "생지옥에 빠진 꿩을 구해야겠다"

    초여름의 향기가 가벼운 바람을 타고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 방안에 있는 사람의 후각을 자극하는 어느날, 어디선가 “꺽꺽, 꺼덕, 꺼덕…” 하는 꿩소리가 내 고막을 흔들었다.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아내는 시장에 장보러 갔으며, 나홀로 집에서 꿩 우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서울시내 아파트 밀집지역에 꿩이 있을리가 없다. 의사가 말한대로 정말 내가 정신병에 걸려 허깨비 소리를 들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베란다에 나가서 서있는데 또 “꺽꺽, 꺼덕, 꺼덕”하는 소리가 들렸다.

    환청이 아니었다. 구정초등학교 방향에서 분명히 꿩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아파트를 나와서 구정초등학교로 갔다. 구정초등학교 본관 건물 동쪽 모퉁이에 굵은 철선으로 엮은 꿩장이 있었고, 그 속에 암수의 꿩 두 마리가 갇혀 있었다.

    생지옥의 나락에 빠진 자에게는, 사람이건 꿩이건 가리지 않고 구원의 손길을 뻗어야한다. 이것이 인(仁)과 박애와 자비를 합한 대애(大愛)인 것이다. 생지옥을 경험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 누가 그토록 처참한 아픔을 이해 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비몽사몽 상태에 취해 꿩을 자유천지로 날려 보내야 한다고 작정하여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꿩장 문은 꼭꼭 닫혀 있었다. 꿩의 재주와 힘으로는 열 수 없도록 바깥부분에 빗장장치가 되어 있었으나, 자물쇠는 채워지지 않은 상태였다.

    - 서울 한복판, 초등학교에 갇힌 꿩은 행복할까?

    나는 문에 다가갔다. 이때 아이들이 몰려왔다. 정신이 번쩍 들어 꿩장 문을 열지 않았다. 1년간의 병가를 받아 쉬어야 한다는 의사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나는 순박한 초등학교 어린이들과 함께 꿩을 들여다보았다. 꿩은 꾸베이때부터 사람들 손에서 길들여 자라서인지 사람들을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고 먹이를 쪼아 먹었다. 꿩에게 먹이를 충분히 주며,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자연과 동물에 대한 산 교육을 시키기 위해 학교 선생님들이 꿩을 사육하고 있는데 대해 이해를 하기로 했다. 제한된 공간에서나마 꿩이 날개를 펴서 날아도 보고, 배불리 먹고 꺼덕, 꺼덕, 꺼덕 즐거운 노래도 많이 부르며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면서, 나는 아파트 건물들의 서쪽에 있는 배 밭으로 발길을 돌렸다.

    구정초등학교 정문을 나와 오른쪽으로 90도 방향을 꺾었다. 동사무소를 지나 언덕길을 올라가서 좀 걸어나가면 넓은 길이 나온다. 그 길을 건너면 배 밭이었다. 지금은 압구정동 현대백화점이 서 있고, 상가 건물들이 즐비하다. 또한 현대아파트 건물들이 콘크리트 숲을 이루며 수십 동이 빽빽하게 들어선 금싸라기 지구로 변했지만, 그때는 미개발 배밭이었다. 불도저가 투입되기 전이라서 낮은 산도 있고, 높은 언덕도 있는 자연의 풍치가 남아있는 곳이었다.

    나는 흙을 밟으며 소릿길 산책로를 걸었다. 내 앞을 가로막는 철창도, 붉은 담벼락도 간수도 없었다. 비 내린 후의 초여름 맑은 하늘과 땅은, 울어버린 후의 양심(良心)과도 같이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나는 자유와 평화를 만끽하면서, 5월에 돋아나는 배나무 어린잎의 향기를 풍기는 맑은 공기를 가슴 가득 들이마셨다가 내뿜었다.

     

  • ▲ 꿩이 하늘을 날고 있다 ⓒ 연합뉴스

    <6.25와 베트남전 두 死線을 넘다>

    [도서 출판 기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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