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끝내 전하지 못한 '아버님 전상서'

    내가 고향 땅을 마지막으로 밟은 것은 6·25가 나던 해의 겨울이었다. 그해 초겨울, 나는 평안북도와 평안남도 일대에서 중공군과 전투 중에 있었다. 11월 하순 어느 날, 나는 연락병 홍인곤(洪仁坤) 하사에게 군용 트럭과 군용 열차를 번갈아 이용하여 약 400리 떨어진 내 고향 집에 가서 편지를 전해주고, 아버님의 답장을 받아오라고 시켰다. 내가 아버님께 보내는 편지에는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았다.

    내 생사문제에 대해서 아버님께서 많이 걱정하고 계실 터인데, 건강하게 잘 있으니 마음 놓으시라는 것, 어린 시절 강냉이밥, 조밥, 감자 등으로 가난하게 끼니를 이어가면서도 자식들을 정직하고 근면하고 쓸모 있는 사람으로 키우시려고 늘 애써 오신 아버님의 노력과 고생에 대해 오늘 이렇게 성장한 나의 가슴은 메어진다는 것, 아버님의 생신이 음력으로 5월 11일인데 매년 이날이 돌아올 때마다 평생을 고생하시며 고기반찬에 쌀밥을 제대로 못 잡수시는 가난을 겪으실 아버님을 떠올리며 38선 이남에서 북녘을 바라보며 슬퍼했다는 내용,

    이 편지를 들고 가는 홍인곤 하사는 중대 연락병이니 나에 대한 소식은 홍하사로부터 더욱 상세하게 들으시라는 것, 이번에 홍 하사 편에 보내는 돈은 이번 달에 탄 월급이니 이 돈으로 쌀과 고기를 사서 많이 잡수시라는 것, 무엇이 잡수시고 싶으신지 그것은 홍 하사 편을 통해 알려주시면 그것들을 구해서 보내드리겠다는 것, 큰아버님과 그 외 동네어른들에게는 따로 편지 올리지 않으니 잘 말씀드려 달라는 것, 아우 탁용(卓鎔)이 인민군에 끌려갔는지 여부가 궁금하다는 것, 부디 안녕하시라는 인사글끝을 맺었다.

     

    ◆ 믿을 수 없는 큰 아버님의 답장

    내가 순천(順川) 방면으로 부터 평양으로 이동한 날인 1950년 12월 4일 초저녁, 고향집으로 연락 보냈던 홍인곤 하사가 돌아왔다. 홍 하사가 내미는 큰 아버님의 편지에는, 아버지가 지난 음력 7월 그믐날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이 담겨있었다. 쏟아지려는 눈물을 모질게 참았다.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사적인 일로 전투지휘관이 눈물을 보이기가 싫어서였다. 야간 방어시가전을 할 수 있게 중대배치를 끝내고 중대지휘소를 할당받은 후 나는 방에 들어가서 문을 잠시 잠그고 눈물을 쏟으며 아버지의 명복을 빌면서 울었다.

    파죽지세의 중공군은 평양시 외곽에 이미 와 있었다. 그들이 지금이라도 시내로 쳐들어오면 마주 싸우던가, 아니면 상급지휘관의 명령이 있을 때 철수를 하던가 하여야 했다. 전투지휘관이 슬픔에 잠겨 울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슬픔에 싸여 저녁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마치고 마음을 가다듬은 후, 상부로부터 내려오는 중공군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를 계속 EE8 군용전화로 하달 받으며 밤을 보내고 있는데, 안방에서 노인의 기침 소리가 자주 들려왔다. 나는 옆방에서 잠시 가면(假眠)을 취하고 있는 홍 하사를 깨워서 노인을 사랑방으로 모시고 오라고 했다.

    나이는 예순셋, 나의 아버지보다는 한살이 아래였다. 나는 그 노인에게 육군 캐러멜 한 갑과 화랑 담배 한 갑을 드렸다. 노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화제가 내 아버지 이야기로 돌아가자 나는 그만 낙루(落淚)하고 말았다.

    ◆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찾은 부모님의 무덤

    이로부터 7일 후인 12월 11일 오전 10시경, 나는 시변리에서 아침 겸 점심식사를 한 뒤 서쪽으로 약 70리 떨어진 금천(金川)읍을 향하여 도보행군을 하고 있었다. 시변리를 떠나서 20여리를 걸어가면 한석봉(韓石蜂)의 출생지이며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구이면(口耳面) 덕안리(德安里)가 나온다. 덕안리를 지나서 한참가면 서위고개에 다다른다. 이 고개를 넘어서 좀 더 가면 내가 살던 우봉리 고우봉동이다.

    서위고개 마루터기에 올라서니 꿈속에 그리던 산하가 눈앞에 펼쳐졌다. 내려다보니 삼산리(三山里), 송정리(松亭里), 우봉리, 원명리(圓明里), 소학리(巢鶴里) 등 모두가 옛 모습 그대로 였다. 해발 760미터의 대둔산, 717미터의 수룡산(秀龍山) 등이 수려한 자태로 경기도와 황해도를 갈라놓으며 높이 솟았고, 성불사(成佛寺)의 말사인 원명사(圓明寺)가 있는 원명산과 옛 고을의 주산인 국사봉(國士峰)이 소년시절의 기억을 되살려 주었다.

    서위고개를 막 내려가는데 SCR 300 무전기를 통하여 송정동에서 행군을 멈추고 차기명령을 기다리라는 상부의 명령이 하달되었다. 송정동은 면소재지이며 우봉인민학교가 있는 곳이다. 나는 예하 각소대장들과 중대선임하사관에게 송정동 우봉인민학교에 가서 행군을 멈추고 휴식하며 차기명령을 기다리라고 지시한 다음, 송정리 주막동 언덕고개를 넘어 우리 집이 있는 고우봉동으로 향했다.

    주막동 고개를 넘으면 바로 그 고개 밑이 고우봉동의 일부인 관청 마을이다. 이 관청마을은 그 옛날 1천여 년에 걸쳐 현청이 서있던 터다. 이곳에서 나는 조카뻘 되는 30대 후반의 마을 친척을 만났다. 그 친척은 나를 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산기슭 언덕에 잔디를 갓 입힌 둥근 무덤이 있었다. 절을 하고 무릎을 꿇은 뒤“아버님, 제가 왔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시던 큰아들이 여기 왔습니다”하고 말하였으나 고이 잠드신 아버님은 대답이 없었다.

    불효자식의 군복 위에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잠시 후 일어서니 친척 조카가 내 어머니 산소를 이곳으로 옮겨와 아버지와 합장을 하였다고 알려주었다. 기쁜일 보다는 슬픈 일을 더 많이 겪으시며 짧은 생애를 마치신 어머니, 삶을 마감하실 때 어린 아들을 머리맡에 앉혀놓고 차마 감기지 않는 눈을 겨우 감으셨을 가엾은 어머니, 이승에서는 불행이 많았으나 저승에서는 아버지와 함께 편안히 계시기를 빌었다.

    봉분 위의 잔디들을 좀 다진 후 나는 하직인사를 드리며 재배를 올리고 고향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관청 마을 논두렁길 끝에서 빙고(氷庫)골로 들어가는 오른쪽 언덕에 서있는 20여 그루의 고목(古木) 굴에 살고 있는 크낙새들은 변함없이 고목사이를 날아다니고 있었다. 옛 고을 관리들의 집이 모여 있던 아사동(衙舍洞)을 지나, 큰 회의장이 있던 논달동(論達洞)에 가서 나는 고향집으로 들어갔다. 동생과 제수가 반갑게 방문을 열고 달려 나왔다. 나는 미혼인데 동생은 벌써 결혼해서 생후 몇 개월 된 어린 아들까지 두고 있었다. 동네 분들이 모여와서 반가운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다.

    ◆ "불효자를 용서하세요" 실향민들의 애타는 소원

    그러나 그런 만남도 잠시뿐 나는 송정리 송정동 우봉인민학교로 가야만 했다. 고향집을 나설 때, 동생 가족과 동네 청년들이 나를 따라 송정동으로 향했다. 내가 우봉인민학교에 도착하자 새로운 명령이 하달됐다. 오늘 저녁 군용트럭들이 송정동에 도착하는 대로, 그 군용트럭들에 분승하여 경기도 삭녕(朔寧)과 구화(九化) 중간에 있는 판교동으로 이동하라는 것이었다.

     

  • ▲ 지난 2월 14일 경기도 파주시 임진각에서 실향민들이 합동차례를 지내고 있다. ⓒ 연합뉴스
    ▲ 지난 2월 14일 경기도 파주시 임진각에서 실향민들이 합동차례를 지내고 있다. ⓒ 연합뉴스

    적어도 하루쯤은 고향에 머물면서 옛 발자국을 따라 내가 다니던 백마인민학교(옛 백마보통학교)에도 가보고, 여러 어른들도 찾아뵙고, 옛 친구들도 두루 만나 어린 시절의 이야기 꽃도 피우고, 앞날에 우리들이 할 일에 대한 의견들도 교환하며 회포를 풀고 싶었으나 전투지휘관으로서의 긴박한 임무는 그런 시간적 여유를 허용하지 않았다.

    달빛 없는 어두운 밤, 이별의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다. 동생과 그의 가족, 그리고 동네 사람들은 우봉인민학교에서 나와 헤어져서 집으로 돌아가기도 하고, 남쪽을 향하여 초라한 짐 보따리를 들고 피난길에 나서기도 했다.

    고우봉동 사람들은 아주 순박한 농민들이었다. 흙벽으로 된 농가에서 태어나 땅을 파서 땅에서 나오는 농산물을 먹고 흙냄새를 맡으며 살다가 늙어서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을 보내는, 밭이나 논이나 산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것으로만 믿는, 농토에 얽매여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자기 농토를 버리고 빈손으로 타향을 향해 떠난다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었다. 계절마저 추운 겨울이니 고향을 버리고 정처 없는 피난길을 떠난다는 것은 정말로 어렵고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36세대가 사는 고우봉동과 7세대가 사는 이웃 궁동(宮洞)에서 이시무, 이철남, 이장식, 민원기, 이필남, 민형기, 이계순, 이탁용, 이기만, 이응남, 이주원 등의 11명과 이들의 처자식 10명이 남쪽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밤 9시 반 경, 나를 태운 군용트럭이 판교동을 향하여 움직이기 시작했다. 낮 세 시간, 밤 네 시간, 짧았던 고향방문은 이렇게 해서 얼떨결에 끝나버렸다. 그 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북녘의 고향 산천. 그때 그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이 그리운 고향을 가볼 수 있는 때가 금년일까, 내년일까, 혹은 5년 후일까? 그렇게 기다리는 가운데 반백년의 세월은 애타게 흘러가고, 몸은 늙어서 하나씩 둘씩 세상을 떠나고 있다.

    해마다 추석이 되면, 임진각 분향소에 가서 북녘을 향해 분향하고 망배(望拜)하면서 부모님 산소에 성묘하러 못 가는 불효자식의 딱한 신세를 한탄하던 나의 동생도, 한을 품은 채 이미 저 세상으로 떠나고 말았다. 부모님 산소에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야 할 내 고향. 가고 싶은 내 고향. 생전에 그 소원이 이루어지는 날이 과연 올 것인가? 눈길을 돌려 산 밑을 내려다보니 임진강은 태고로부터 형성된 물줄기를 따라, 실향민들의 애타는 소원을 알리도 없이 무심하게 소리 없이 유유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 ▲ 지난 2월 14일 경기도 파주시 임진각에서 실향민들이 합동차례를 지내고 있다. ⓒ 연합뉴스

    <6.25와 베트남전 두 死線을 넘다>

    [도서 출판 기파랑]

    주소 : 서울 종로구 동숭동 1-49 동숭빌딩 301호
    전화 : 02-763-8996 (편집부)
    홈페이지 : http://www.guiparang.com/
    E-mail : info@guipar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