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머리말

    “이승만 박사의 정치사상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받으면, 명확하게 대답하는 사람들이 드물다.
    이승만 박사의 정치에 관한 발언과 행적을 종합적으로 관찰하면, 그의 정치사상을 사회주의라고 말할 수는 물론 없고, 자유주의나 민주주의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는 국민경제활동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주저하지 않았으며, 그가 집권기간 중에 취한 여러 가지 조치들은 민주주의 원칙에 반하는 것이 많았다.

    이승만 박사의 정치사상은 일단 민족주의라고 하면 대체로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민족주의는 독자적인 사회 조직·운영 원리를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민족주의 속에는 다양한 하위 유형이 존재하기 때문에, 어떤 정치인의 사상을 그냥 ‘민족주의’라고 말하는 것은 정밀성을 결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필자는 이승만 박사의 정치사상을 민족통합주의(national integralism)라고 말한다.

    민족통합주의는 민족주의 운동의 주체세력과 그들이 표방하는 민족사회의 조직·운영원리를 기준으로 3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부르주아 민족주의(bourgeois nationalism)이다. 부르주아 민족주의는 민족자본가 및 그들과 유착된 지식인들이 운동을 주도하며, 사회의 조직·운영원리로서 자유주의를 추구한다. 부르주아 민족주의에서는 민족구성원들의 자유를 극대화하는 것을 중시하며, 민족구성원들 가운데 경쟁에서 패배한 사회적 열등분자들에 대한 배려를 거의 하지 않는다. 부르주아 민족주의는 독립을 방해하는 외부의 적이 사라진 후에는 민족내부의 분열을 초래하기 쉽다.

    둘째는 프롤레타리아트 민족주의(proletariat nationalism)이다. 프롤레타리아트 민족주의는 노동자·농민 및 그들을 동정하는 지식인들이 운동을 주도하며, 사회의 조직·운영원리로서 사회주의(사회민주주의, 민주사회주의, 공산주의를 모두 포괄하는)를 추구한다. 프롤레타리아트 민족주의에서는 민족구성원들의 사회·경제적 평등의 실현을 중시하며, 경쟁에서 승리한 사회적 우월분자들에 대해 강력한 견제를 가하려 한다. 프롤레타리아트 민족주의는 때로는 식민지·반식민지 지역에서의 공산주의 혁명운동의 외피에 불과할 경우도 있다. 

    셋째는 통합적 민족주의(integral nationalism)이다. 이 통합적 민족주의를 민족통합주의라고 부른다. 민족통합주의는 초계급적 관점을 가진 지식인과 활동가들이 운동을 주도하며 사회의 조직·운영원리로서 협동체주의(corporatism)을 추구한다. 민족통합주의에서는 민족구성원들의 화합, 자유와 평등의 균형, 공동이익 등을 중시하며, 사회적 우월분자들의 능력발휘를 고무하는 동시에 사회적 열등분자들에 대해 온정적으로 배려한다. 민족통합주의는 사회적 열등분자들을 온정적으로 배려하는 것이 사회적 우월분자들의 의무라고 주장한다. 민족통합주의는 또 민족공동체의 내적 변화는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아닌 ‘위로부터의 개혁’을 통해 이루어지기를 요구한다. 민족통합주의는 민주정과도 결합 가능하고 독재정과도 결합 가능하다. 특히 민족공동체 혹은 국민공동체가 위기에 처할 때는 독재(권위주의적 독재나 전체주의적 독재)와 결합하기 쉽다.
     이하의 서술 내용은 이승만 박사의 민족통합주의의 구체적 내용을 시기별로 정리한 것이다.

    2. 독립운동시기의 이 박사의 민족통합주의

    이승만 박사의 민족통합주의 사상은 그가 1904년 옥중에서 저술한 『독립정신』의 여러 페이지에서 단편적으로 표명되고 있다.

    그는 “자주와 독립은 인간의 타고난 권리라 할 수 있다. 세상에서 높다 낮다, 귀하다 천하다 하는 것은 사회적 환경에 따라 구별하는 것이나, 하나님의 원리로 볼 때 귀하고 높은 자나 약하고 천한 자 모두 귀와 눈과 입과 코는 물론 팔 다리를 가지고 태어난다. 하나님은 누구나 자기 일을 하고, 자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도록 똑 같은 모습으로 창조하셨다”고 주장했다. (이승만 저, 김충남/김효선 편,『풀어쓴 독립정신』, 서울: 청미디어, 2008, 93쪽). 그는 또 “모든 사람들이 힘껏 일하고 공부하여 성공할 수 있도록 자유의 길을 열어놓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에게 스스로 활력이 생기고 관습이 빠르게 변하여 나라 전체에 활력이 생겨서 몇 십 년 후에 부유하고 강력한 나라가 될 것이다. 자유를 존중하는 것은 나라를 세우는 근본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풀어쓴 독립정신』, 408쪽).


    그러면서 이 박사는 “사람은 모두 평등하게 태어났으나 노력하는 데 따라 사람의 가치가 달라지는 것이다. 똑같이 태어났더라도 도덕과 품행을 잘 닦고 무언가 이룩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롭게 한다면 송시열이나 허목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풀어쓴 독립정신』, 171쪽). 아울러 그는 양반과 상민를 나누는 신분제도의 철폐를 거듭 주장했다.(『풀어쓴 독립정신』, 172-173, 406-407쪽)

    이 박사의 이러한 말들은 그가 모든 인간의 평등한 탄생과 자유를 주장하면서, 동시에 자주적 노력의 결과 성취되는 결과의 불평등을 인정했음을 의미한다.

    이 박사는『독립정신』에서 전체가 부분보다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점을 역설했다. 그는 사회구성원들은 상호의존관계에 있으며, 사회가 혼란하면 구성원들은 불안한 처지에 놓이게 되고, 사회가 번영하면 구성들도 풍요를 누리게 되므로 국가를 잘 살게 하는 것이 곧 자기 집을 잘 살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풀어쓴 독립정신』, 182쪽). 그에 따르면,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는 개인의 권리를 제한해야 하며,(『풀어쓴 독립정신』, 194쪽) 국민은 국가에 해로운 일은 하지 말고, 국가에 이롭고 나에게도 이로운 일은 해야 하며, 나라의 주권을 보호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한 일이 있으면 자신의 직업도 포기하고 재산도 헌납하며, 다른 사람들도 권유하여 그것이 반드시 성사되도록 노력해야 한다.(『풀어쓴 독립정신』, 388-389쪽). 이 박사는 또 “나라에 해로운 일은 누구나 반대해야 한다. 나라를 위해 이로운 일이 있으면 모두 한 마음으로 나서야 한다. 나라를 위하는 일을 할 때에는 부모형제 간의 천륜도 돌볼 수 없는 줄 알아야 하며, 실천해야 한다.”라고도 말했다.(『풀어쓴 독립정신』, 401쪽).

    이 박사는『독립정신』의 여러 지면에서 입헌군주정으로의 개혁을 주장하면서, 그런 개혁이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아닌 ‘위로부터의 개혁’에 의해 이루어지기를 주장하고, 황제로부터 상민에 이르는 모든 민족구성원들이 합심단결하여 국가의 자주독립을 확립할 것을 촉구했다.

    이 박사는 독립운동 기간 중 계속해서 독립운동세력들 간에 파벌투쟁을 하지 말고 모든 독립운동세력이 단합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을 주장했다. 이 박사는 상해 임시정부 구성원들이 파벌싸움으로 날을 지새우는 것을 보고 그들을 외면했다. 이 박사가 독립운동 기간 중 민족통합주의 원칙을 지켰다는 점을 말해주는 중요한 증거로는 다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자신을 부당하게 탄핵한 상해임시정부를 부정하거나 별도의 임시정부를 만들지 않고 임시정부의 부당한 결정에 복종한 것이다. 이 박사는 1925년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으로부터 부당하게 탄핵을 당하여 임시대통령 직을 박탈당했다. 당시 임시정부 구성원들 가운데는 이 박사에 대한 임시정부 의정원의 탄핵이 부당한 조치라고 판단하고, 이 박사에게 쿠데타로 임시정부의 대통령직을 되찾거나 이 박사의 독립운동 거점인 하와이에 별도의 임시정부를 설립할 것을 권고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임시정부 구성원인 조소앙은 1925년 5월 이 박사에게 서한을 보내서 이 박사가 지시를 내리면 쿠데타를 일으켜 임시정부 의정원의 결정을 뒤엎을 용의가 있으며, 그런 것을 하기 싫으면 차선책으로 하와이에서 의정원을 소집하여 별도의 임시정부를 수립하라고 권고했다.(유영익 등,『이승만 동문 서한집』하, 서울: 연세대학교출판부, 2009. 312-313쪽.) 임시정부 의정원이 취한 탄핵의 부당성이나 당시 이 박사가 가지고 있던 역량에 비추어 볼 때, 조소앙의 권고 중 쿠데타는 성공시킬 수 없더라도 하와이에 별도의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것은 가능했다. 그러나 이 박사는 조소앙이 권고한 두 가지 조치 중 어느 하나도 취하지 않았다. 독립운동의 분열을 초래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박사는 의정원의 탄핵을 수용하고, 탄핵 당한 후에도 임시정부의 일원으로 행동하면서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보냈다.

    이 박사가 독립운동을 전개함에 있어서 통합주의 원칙을 준수했음을 입증해주는 또 하나의 증거로는 미국 뉴욕에서 한인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함에 있어서 공산·사회주의자들과 함께 할 것인지 여부를 묻는 윤치영의 질문에 대해 그들과 함께 하라고 지시한 이 박사의 답변을 들 수 있다. 이 박사는 1928년 2월 윤치영에게 보낸 편지에서 “물질과 정신 양 방면에서 민중단결을 완성하는 것이 우리 광복사업의 제일보라고 생각합니다. 공산·사회주의자들과 함께 하는 것에 찬성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여러 동지들의 생각과 차이가 별로 없습니다.…주의의 풍조에 흔들려서 유산계급과 무산계급을 구별하여 우리 민족을 상호분리케 하는 것은 독립운동을 방해하는 것이니 그것을 다 정지하여 포용과 상호 돕고 보호함으로써 우선 민족대단결을 이룩하여 우리 민족의 생명인 독립을 완성하자”고 말했다.(『이승만 동문 서한집』상, 92-93쪽. 인용문은 원문을 현대어로 풀어쓴 것임.)

    독립운동 과정에서 이 박사의 통합주의는 그가 의도한 만큼 실천되지는 못했다. 그는 특히 1930년 후반 이후 공산주의세력에 대해 강한 반대입장을 취했다. 그는 독립운동에 있어서 좌우합작에 대해 소극적 태도를 취했고, 조국이 해방된 후에 만일 좌우연립정부를 구성해야 한다면 그런 좌우연립정부에 참여하느니 차라리 정계를 은퇴할 작정임을 그의 측근에게 피력할 정도였다. 이 박사의 이러한 반공태도 강화는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반대 입장 때문이 아니라, 공산주의자들이 소련에 맹종하고 독립운동 내에서 분열공작을 치열하게 전개하는데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  

    3. 건국과정에서의 이 박사의 민족통합주의

    이 박사는 대한민국 건국과정에서도 민족통합주의 원칙을 실천했다. 이 박사는 귀국 후 가진 최초의 기자회견에서 “우리의 합동통일에 대한 기술을 국외에 보일 필요가 있다.…자주독립의 제1보는 통일 단결 이 두 가지 뿐이다.”라고 말했으며,(우남실록편찬회,『우남실록』,서울: 열화당, 1976, 308쪽.) 뒤이어 가진 국내 정치인들과의 면담에서도 “합동통일을 유일한 방법 수단으로 하여 자주독립의 조급한 실현을 도모할 것만이 우리에게 맡겨진 절대한 과제라는 것을 믿고 오직 이 길을 위하여 단합하는 전진이 있기만 바랄 뿐입니다”라고 말했다.(『우남실록』, 313쪽.)

    이 박사는 이러한 민족통합을 위해 공산당에 대해서도 포용적인 태도를 표명했다. 그는 조선독립촉성중앙협의회 준비모임에서 “공산주의든지 민주주의든지 서로서로 악수할 점이 있으면 지금은 무조건 악수하고 나갑시다”라고 말했고,(『매일신보』1945, 10, 25.) 한 방송연설에서 “나는 공산당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주의에 대하여도 찬성하므로 우리나라의 경제대책을 세울 때 공산주의를 채용할 점이 많이 있습니다”라고도 말했다.(『우남실록』, 314쪽.)

    이 박사의 이러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은 친일파를 먼저 숙청하자고 고집하며 끝내 독촉중협에서 이탈했다. 그러자 이 박사는 조속한 자주독립실현을 위한 정치세력 통합노력이 공산당의 방해로 실패한 데 분노하여 강력한 반공입장을 천명했다. 이 박사는 1945년 12월 19일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이라는 방송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한국은 지금 우리 형편으로 공산당을 원치 않는 것을 우리는 세계각국에 대하여 선언합니다. 이왕에도 재삼 말한 바와 같이 우리가 공산주의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오, 공산당 극좌파들의 파괴주의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소위 공화국이라는 명칭을 조작하여 국민 전체에 분열상태를 타인에게 선전하기에 이르다가, 지금은 민중이 차차 깨어나서 공산에 대한 반동이 일어나매 간계를 써서 각처에 선전하기를 저들이 공산주의자가 아니요 민주주의자라 하여 민심을 현혹시키니 이 극렬분자들의 목적은 우리 독립국을 없이 해서 남의 노예로 만들고 저의 사욕을 채우려는 것을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입니다.…이 분자들과 싸우는 방법은 먼저는 그 사람들을 회유해서 사실을 알려주시오.…시종 고치지 않고 파괴를 주장하는 자는 비록 친부형이나 친자질이라도 원수로 대해야 할 것입니다.”(『서울신문』 1945, 12, 21.)

    이 박사의 이러한 반공입장은 정치세력의 단합을 파괴하는 ‘분열지향적 반공’이 아니라, 공산당이 정치세력의 단합을 파괴한데 대한 반발로써 취해진 ‘통합지향적 반공’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박사는 북한 공산세력과 연대하면서까지 대한민국의 건국을 방해한 김구 선생에 대해서도 설득과 포용 노력을 인내심 있게 전개했다. 김구 선생이 이 박사가 제시한 국민의 선거에 의한 정부수립 노선에 반대하고, 북한 공산정권과 남북협상을 전개할 때, 이 박사는 최후까지 김구 선생의 남북협상 참여를 만류하려고 노력했다. 이 박사는 김구 선생에게 남북협상을 하려면 남한에서 선거가 끝난 후에 자기와 함께 하자고 설득하기도 했고, 나중에는 선거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면 김구 선생의 남북협상을 방관하겠다는 입장을 천명하면서 김구 선생을 끌어안으려 했다.(양동안,『대한민국건국사』, 서울: 현음사, 2001, 431-432, 480-481쪽) 이 박사는 또 건국초기 김구 선생이 대한민국의 정당성을 크게 훼손하는 여러 가지 활동을 전개해도 그를 관용하며 함께 일하기를 권유했다.

    이 박사의 민족통합주의는 그가 제시한 새로 건국될 국가의 기본정책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 박사가 1946년 2월에 행한 ‘모범적 국가를 만들자’란 제목의 방송연설에 잘 나타나있다. 이승만은 이 연설에서 새로 건국될 나라가 취해야 할 기본정책 32개항을 제시했다.(『우남실록』, 382-384쪽.) 그 주요 내용을 정치 경제 사회의 3개 부문별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정치에 있어서 민주주의: 모든 국민의 평등, 18세 이상의 모든 남녀의 투표권과 피선거권 보유, 언론 집회 종교 출판의 자유, 정치운동의 자유 보장, 영장 없는 체포 금지,  가정의 보호, 법원의 영장 없는 재산침해 금지, 여행과 물품운송의 자유보장.

    ▲경제에 있어서 수정자본주의: 중요한 공업, 광업, 삼림, 은행, 철도, 통신, 운수 등과 모든 공익기관 등의 사업을 국유로 발전시킴, 모든 상업을 정부검열 하에 두어 소비자와 산출자와 무역자에게 균등한 이익 담보, 고리대금 금지, 쌀과 생필품의 가격상한제 실시, 빈궁한 국민은 면세하고  소작인에 대한 추가징세 금지하며 대농장에는 상속세 중과.

    ▲사회에 있어서 복지주의: 의무교육제 실시(의무교육비 정부부담), 국민의 문화생활 경비 정부부담, 모든 근로자에 대한 직업보장, 최저임금제 실시, 근로자의 생계보호, 모든 근로자와 농민의 의료비 정부 부담, 14세 이하 남녀의 노동금지, 성인 남자 노동자는 1일 8시간(모든 여성과 16세 이하 남자는 1일 6시간)이상의 노동 금지, 임산부에 대해 모든 의약과 사회적 보조를 제공, 생계를 위한 활동 보호.

    이 박사는 ‘모범적 국가를 만들자’에서 3개 부문 외에 토지개혁과 일제잔재 척결에 관한 정책도 제시했다. 토지개혁과 관련해서는 적몰한 토지는 농민에게 분배할 때 유상으로 분배하고 그 토지대금은 국민을 위한 자금으로 사용함, 큰 농장은 그 지역 농민 다수가 나누어 경작하게 하고 그 토지의 가격은 매년 분할하여 지주에게 상환하도록 함, 모든 몰수 토지는 다시 분배하되 토지소재지 거주 농민이 경작하게 하고 먼 곳에 거주하는 지주에게 주지 않음 등을 제시했다. 일제잔재 척결과 관련해서는 법률 사회 교육 등 모든 기관에서 일본 제국주의 독소를 제거할 것,  일본인이나 친일반역자들이 보유한 재산을 몰수하여 국유화할 것 등을 제시했다.

    4. 집권기간 중의 이 박사의 민족통합주의
     
    이 박사는 집권 후 사회의 열등한 계층에 대해 지속적으로 매우 온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 박사는 1948년 9월 30일에 발표한 최초의 시정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민생문제 해결에 있어서 항상 나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은 농민과 노동자의 생활 향상이 염원이니 정부는 농민과 노동자의 생활향상을 위하여 시급한 대책이 있습니다. 전자〔농민을 지칭〕에 있어서는 헌법의 조항에 의하여 앞으로 토재개혁법이 제정 시행될 것이며 토지개혁의 기본목표는 전제적 자본제적 토지제도의 모순을 제거하여 농가 경제의 자립성을 부여함으로써 토지생산력의 증강과 농촌 문화의 발전에 기여할 것이므로 먼저 소작제도를 철폐하여 耕者有其田의 원칙을 확립할 것이나 농민대중이 원하는 바에 의하여 정부는 균등한 농지를 적당한 가격 또는 현물보상의 방식으로 농민에게 분배할 것입니다.…또 후자〔노동자를 지칭]에 있어서는 헌법의 정신에 의거하여 이익균점의 권리를 보유하게 될 것이며 기타 사회보험제도를 창정 실시하여 그 처우가 심히 개선될 것입니다.”(국사편찬위원회, 『자료대한민국사』 8, 과천: 국사편찬위원회, 1998, 528-536 쪽에 게재된 이승만 대통령의 시정연설문 중에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이 박사의 온정적 배려는 그의 집권기간 중 기회 있을 때마다 표명되었다. 1950년대 중반에 발표된 다음의 담화도 이 박사의 그러한 태도를 잘 말해주고 있다. 

    “우리 민국정부가 가장 중요히 보는 것은 농민과 노무자들이니 그것은 이 사람이 제일 수가 많고 이 사람들 없이는 나라의 토대가 없고 그 결과로는 이전 군주시대 모양으로 위에 벼슬하는 자와 부자가 나라를 차지하고 대중은 그 사람들 심부름으로 얻어먹고 살게 됨으로 우리가 대중인민으로 토대삼아 그들의 안전과 평균한 이익을 누리게 할 것을 정부의 기본적 원칙으로 지켜 나오는 바이다. 농민에 대해서는 토지개혁법을 만들고 지주들의 땅을 개척해서 얼마씩 얻어먹든 것을 폐지하고 지주 땅을 나누어서 여러 농민들이 각각 얼마씩 맡아서 자기들 일 년 양식을 제해놓고 나머지를 정부 세납 등을 해갈 수 있을 만치 만든 것이다.…그 다음 노무자들로 말하면 우리나라에서 제일 불공평한 대우를 받고 정당한 생활을 못해오든 사람인데 이 대중을 덩어리로 만들어 권리 보호하는 노동단체를 전국적으로 조직해서…노무자에 억울한 일이 있거나 불법한 차별대우가 있을 때에 노무자를 보호해서 평균한 조처를 할 수 있게 하였고 그것이 못되면 필경은 대통령에게라도 호소하게 하여 공정히 보호하려고 한 것이다.”(‘농민과 노동자 문제에 대하여’ 『대통령 이승만박사 담화집』제2집, 226-227쪽.)

    농민과 노동자를 중요시하는 이 박사의 사고는 담화로만 그치지 않고 실제 행동을 취해졌다. 이 박사가 농민을 위해 취한 가장 대표적인 조치는 농지개혁이다. 이 박사는 개인적으로 耕者有其田의 원칙을 일찍부터 강조해왔고, 그에 따라 농지개혁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이 박사가 초대 내각을 구성하면서 사회주의자인 조봉암을 농림부장관에 기용한 것부터 농지개혁에 대한 그의 적극적인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 박사는 정부가 농지개혁을 추진하기 전에 개인적으로 농지개혁을 주장했다.

    노동자들에 대해서도 이 박사는 각별한 애정을 표시했다. 이 박사는 해방 직후부터 우익 노동운동단체의 조직을 적극 지원했으며, 건국 후에도 대한노총에 대해 많은 배려를 했으며, 자유당 창당과정에서 노동운동 대표들을 많이 기용했다.

    사회적 열등분자에 대한 이 박사의 온정주의는 집권당을 농민과 노동자의 정당으로 조직하고, 당명도 처음에는 勞農黨으로 정하려는 데까지 발전했다. 이러한 이 박사의 생각은 새로운 집권당의 창당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담화들에서 잘 드러난다. 이 박사는 새로운 집권당의 창당 논의가 시작될 때 “정당을 대부분 노동자와 농민들과 기타 근로대중으로 구성하되 실로 민국의 주인이 되는 대다수 국민의 권위와 공익을 보호해서 민주제도의 보장이 되어 혹 권력을 잡아서 전제주의를 사용하거나 압제적 구습을 행하려는 자의 수중에 정부가 들어가지 않을 것을 보장”(‘신당조직에 관하여’『담화집』제1집, 62쪽)하라고 당부했다. 이 박사는 새로운 집권당 창당 작업이 본격화된 시점에서는 농민과 노동자를 중심으로 조직된 새로운 정당의 성격을 재력가나 소수의 정치 엘리뜨에 대항하는 조직으로까지 규정하는 다음과 같은 담화들을 발표했다.

    원래 민주국가는 백성이 다스리는 나라이며 백성은 그 나라의 대다수의 민중을 가르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농민과 노동자와 기타 貧難한 남녀가 대다수이므로 이 사람들이 정당을 일우어서 헌법을 지지하며 헌법을 따라서 나라를 자기들이 다스리게 하므로 혹 권위자나 재력가 등의 소수분자들 수중에 정권이 빠지지 않게 하므로 민주정체를 영구히 보호해서 전민족의 자유평등상 행복을 영구히 잃지 말자는 것이 우리 주장이다.…우리 대중인민의 일심합력으로 나라에 큰 세력의 토대가 서서 자유 평등권을 다같이 누리게 하자는 것이니…극소수인물의 권위자들이 정권을 잡아서 대중인민의 자유와 이익을 빼앗아 害國害民하는 폐단을 막고…오직 국가의 권위와 민중의 권리를 도모하고 보호함으로 정부는 영구히 우리 국민전체의 수중에서 소수 분자에게 뺏기지 말게 하자 ( ‘새 정신의 정당조직’『담화집』제1집, 63쪽.)

    이번에 우리가 새로 정당을 만드는 목적은 勞民 농민대중을 대표하는 정당을 만들어서 민주국가의 영구한 토대로서 정권이 이 사람들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자는 것인데 본래에는 명칭을 노농당으로 정하려 하였으나 필경은 고쳐서…자유당으로 한 것이다. …민주정체의 목적은 그 나라 대다수 국민이 정권을 주장해서…민중의 뜻을 따라 정치를 해나가는 고로 소수분자들이 아무리 지식과 세력과 재력이 많을지라도 다수민중의 추대를 받지 못하고는 정부에 나설 기회가 없는 고로 정부에 벼슬을 구하려는 사람은…자기 재력과 기능을 민중을 위하여 사용해서 공동복리를 도모하는 까닭으로…이것이 민주주의의 복스러운 점일 것이다.(‘정당에 관한 설명’『담화집』제1집, 65쪽.)

    실제에 있어서는 이 박사의 자유당은 농민과 노동자 계층을 대변하는 정당은 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 박사가 집권당을 농민과 노동자들이 주도하는 정당으로 조직하려 했던 것만은 분명하며, 자유당 국회의원 중에는 정치와 직접 관련되지 않은 농민운동이나 노동운동을 전개했던 인사들이 상대적으로 많이 충원되었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집권기간 중 이 박사는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아파했다. 이 박사는 6·25전쟁 시 피난민들이 식량을 구하지 못해 굶어죽고 있다는 보고를 듣자 곧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며, 기아에 허덕이는 피난민들의 구제를 위한 정부의 비상조치를 강구했다.

    정부에서 우리 이재동포들에게 힘자라는 데까지는 도와나가는 중이요 외국인들도 이재민을 구제하기 위하여 도와주고 있는 중이니 이런 실정을 보아서 굶는 사람이나 얼어 죽는 사람이 없어야 할 것인데 각각 자기에게 여유 있는 힘이 없는 것을 이유로 보고만 있으면 외국 친구들이 우리를 도웁는 기회와 보람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이 말하는 나부터 기왕에 등한히 한 것을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는 바이며 이제 이 형편을 전국적으로 조사할 것이니 모든 동포는 이 긴급한 일에 다 서로 도웁기를 결심하고 어데서든지 급히 곤궁에 빠진 동포를 보고 아는 대로 사회부나 대통령비서실로 알려서 어떤 방식으로던지 한사람이라도 더 구제하고 살아가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니 일반 동포는 이 일에 성심과 우리의 동포된 情誼를 다하기로 노력하기 바라는 바이다.(‘먹을 것 없는 동포가 없도록 전국민이 적극 보호하라’『담화집』제1집, 259쪽.)

    피난민들의 굶주림에 대해 일찍부터 적극적인 대책을 취하지 못한 대통령 자신이 부끄럽다고 말하면서 굶어죽는 사람을 보면 대통령비서실에라도 즉각 연락을 취해달라는 호소는 국민의 고통에 대해 이 박사의 마음 아파하는 정도를 잘 말해준다. 이 박사는 언젠가 생활고로 일가족이 집단 자살했다는 신문기사를 보고서는 측근들에게 “이거…이승만이가 죽인거야, 정치를 잘못해서…. 내가 죽인거나 다름이 없지. 모두들 잘 살라고 이 고생인데 죽긴 왜 죽어….”라고 한탄했다고 한다.(동아일보 편, 『비화 제1공화국』 6, 서울: 홍자출판사, 1975, 312쪽.)

    5. 맺는 말

    이 박사는 이처럼 사회적 약자에 대한 온정적 배려를 기반으로 하여 전체 국민이 단결할 것을 추구하는 자신의 통치노선을 일민주의(一民主義)로 명명했다. 일민주의에서의 일민은 국민이 ‘모두 동등한 복리와 동등한 권리를 누리는’, 그리고 일체의 분열 없이 ‘단결과 합동심을 발휘하는’ 하나의 국민(one nation)이라는 뜻이다. 19세기 영국의 유명한 보수주의 정치인 디스렐리(Benjamin Disraeli)는 부자는 온갖 호사를 누리나 가난한 사람들은 빈곤과 질병의 고통 속에 사는 19세기 중반의 영국 사회를 ‘한 나라 속의 두 개 국민’이라고 비판하면서, 정부가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 온정적인 정책을 취하여 하나의 국민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박사의 일민주의는 바로 이러한 ‘하나의 국민 보수주의(one nation conservatism)’의 전통을 계승한 명칭이라 할 수 있으며, 민족통합주의 사상을 담고 있는 명칭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모든 국민이 동등한 복리와 권리를 누리면서 단합하도록 하려는 이 박사의 민족통합주의는 안타깝게도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이 박사의 민족통합주의가 실패하게 된 최대의 원인은 이 박사의 완고한 성격과 6·25전쟁으로 인해 그의 민족통합주의가 민주주의와 결별하고 독재와 결합한 데 있다. 

    이 박사 시대의 정치사를 일별해보면 이 박사는 완고한 성격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이 박사의 완고성은 특히 인사정책에서 심하게 나타났다. 건국초기에 국회의원의 압도적 다수가 반대하는 이윤영을 두 번이나 국무총리에 지명한다든지, 정계에서 평판이 좋은 인물들은 절대로 기용하지 않는 것이라든지 예스맨만 중용한 것 등은 그의 완고성을 나타내는 증거들이다. 이러한 완고성은 이 박사의 정치적 지지기반을 축소시켰다. 특히 정치 엘리트층과 여론 지도층의 지지를 상실케 했다. 대의정치에서 집권자가 정치엘리트 층과 여론지도층의 지지를 상실하게 되면 자기의 의사와 희망을 민주주의 원리에 따라 관철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집권자가 한번 민주주의 원리를 이탈하게 되면, 그것이 상습화 된다. 

    나라가 건국된 지 2년도 못되어 발발한 6·25전쟁은 국정을 민주주의의 원리에 따르지 않고 운영할 수 있는 수많은 구실을 제공했다. 뿐만 아니라, 전쟁에서 대패하여 국가의 멸망이 눈앞에 다가와 있는 상황에서 민주주의의 원리를 지키는 것은 집권자나 국민에게 다 같이 어려운 일이었다. 따라서 6·25전쟁은 자연스럽게 이 박사의 민족통합주의가 독재와 결합하도록 만들었다.

    민족통합주의가 독재와 결합하면 일시적으로는 큰 피해를 초래하지 않지만(국가존립을 위해 효율성을 발휘할 수도 있지만), 그런 결합이 장기화 될 경우 필연적으로 국가재난을 초래한다. 민족통합주의와 독재의 결합이 장기화 되면 필연적으로 부패가 동행하게 되며, 부패와 독재는 국정운영의 비효율성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민족통합주의가 추구하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온정적 배려나 국민의 단결을 실천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 박사는 농민과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도록 하고 국민이 단결하여 나라의 자주 독립과 발전을 추진해나가기를 희망해서 민족통합주의 사상을 추구했지만, 그의 집권말기에는 사회적 약자들의 어려움이 매우 심각해졌고, 국민은 분열되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