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이 만드는 세상, 세상이 만드는 사람
    --역사는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이루는 것--

     한 일간지에 “남기고 싶은 이야기”라는 칼럼이 신설된 것이 나의 청소년기가 아니었나 싶다. 그 때도 어쩌다 흥미롭게 읽는 일이 있었고 그 주인공들이 겪은 시대적 아픔과 개인적 역경, 그리고 그것을 딛고 자신을 세우고 나라에 공헌한 의지력 등에 감명을 받기는 했지만 그 배경이 되는 시대가 나에게 생소하고 그 인물이 겪은 사건, 그와 경쟁하고 협력했던 동시대인들이 낯설어서 크게 실감이 나지 않고 흥미가 덜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는 “남기고 싶은 이야기”나 “나의 삶, 나의 길”, “나의 이력서”등의 주인공들이 내가 살면서 이름을 접해 온 인물들이고 그 이력서에 기록된 사건들 또한 내가 들어 본, 또는 나의 삶에도 영향을 미친 사건들이어서 실감이 훨씬 강하고 흥미진진하다. 뿐만 아니라 내가 나이를 먹으면서 인생이라는 것이 의지력과 상황의 대결이고 우연과 필연이 교차하는 드라마임을 깨닫게 되니까 진폭이 컸던 분들의 인생의 매 고비가 내 일처럼 아슬아슬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 정말 사람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격언과 같이 얼마나 많은 인물들의 피와 땀, 그리고 정성이 오늘날 한국을 만든 것인가를 절감하게 된다.

    국민 소득 100불 이하에서
    2만불로 도약한 역사의 주역은
    독특한 성격과 개성을 가진 거인들이다

     “Truth is stranger than fiction” (사실은 허구보다 기이하다, 즉 소설에서는 터무니없다고 여겨질 일들이 현실에서는 왕왕 일어난다) 이라는 말이 있는 것 같이 우리 현대사의 인물들의 삶은 정말 소설 이상으로 파란만장하고 우여곡절이 많다.  일인당 국민소득 100불 이하에서 2만불로의 성장을 한 생애에 겪은 나와 달리 오늘날 젊은이들은 부모, 조부모 세대의 어른들의 역경과 그 극복의 과정이 너무나 딴 세상의 이야기 같아서 그 드라마에 자신을 이입할 수가 없고 또 흥미조차 느끼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나라에도 초상화박물관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영국에 가면 세계적인 박물관, 미술관들이 전부 무료로 개방되어서 너무나 신바람이 난다. 그런데 내가 영국에서 대영박물관이나 국립미술관보다도 더 즐겨 찾는 곳이 국립 초상화박물관이다. 국립초상화박물관에 가면 영국이라는 나라를 만들고 역사를 엮은 수많은 인물들과 함께 영국의 역사가 생생히 살아난다.
     
     영국은 초상화예술이 일찍부터 발달했기 때문에 박물관에 있는 대부분의 초상화들이 실물을 모델로 그린 것이어서 개성이 뚜렷하게 전해져온다. 초상화박물관에는 영국의 역대 왕과 여왕들을 비롯해서 거물 정치가들, 학자, 군인, 건축가, 과학자, 문인, 예술가등 다양한 분야에서 영국을 강국으로 만든 거인들의 독특한 성격과 개성을 느낄 수 있는 초상화가 즐비하다.  그래서 그런 인물들이 서로를 자극하고 견제하면서 엮어 간 영국 역사를 입체감있게 새길 수가 있다.

    한국현대사의
    인물초상화 박물관을 만들자

     우리에게 역사가 대부분 ‘충신’과 ‘간신’의 대립으로 빚어지는 것으로 인식되는 반면에 영국인에게 역사는 ‘위인’과 ‘악당’들의 대결이 아닌, 남다른 점, 뛰어난 점도 있으면서 동시에 결함도 많은 다양한 인물들이 얽혀서 빚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영국의 역사는 다이내믹하고 흥미진진하다. 초상화박물관에서 영국인은 누구나 영국역사에 인물이 참 많았다는 자부심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면서 그 인물들을 고고한 성인이나 위인으로서 보다 바로 우리의 이웃이나 우리 자신일 수 있는 사람들로 느낄 수 있어서 나도 열심히 노력하면 언젠가 초상화박물관에 들어갈 수 있다는 희망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우리나라도 초상화예술이 일찍이 출현하기는 했으나 극히 일부의 사대부들이 이용했을 뿐이고 보편화되지 않아서 남아있는 초상화가 극소수이다. 그래서 역사적 인물의 초상화박물관을 만들기는 어렵지만 현대사의 중요한 인물들의 초상화박물관이라도 마련되었으면 좋겠다. 사진이 주가 되겠지만 가끔은 캐리커처나 초상화도 포함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자라는 세대들이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참으로 많은 인물들의 피와 땀과 추진력과 창의력으로 이루어 진 것이고 역사란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이루는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역사 속의 자신의 자리를 설정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주: 이글은 (재)한국선진화포럼 http://kfprogress.org 제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