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조광동 재미 언론인 ⓒ 뉴데일리
    ▲ 조광동 재미 언론인 ⓒ 뉴데일리

    미국에서 가장 신뢰받는 언론인이란 영예를 얻었던 월터 크론카이트(Walter Cronkite)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그가 65세로 은퇴한 1981년까지 20년간 월터 크론카이트는 미국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면서 미국 여론의 나침판 역할을 했습니다. 한때 그의 신뢰도가 73%였습니다. CBS-TV 앵커맨이었던 크론카이트의 저녁 6시30분 종합 뉴스를 들어야 식사를 시작했다는 말을 할 만큼 이 시간이 되면 주부들도 저녁 손을 놓고 크론카이트 방송을 들었습니다. 미국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일이었고, 어쩌면 이러한 기록을 깰 수 있는 언론인이 다시 나올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월터 크론카이트 만한 인격과 지성과 객관성을 가진 언론인이 나올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현재의 시대와 앞으로의 시대가 크론카이트 같은 언론인을 허용할 수 없을 만큼 세상이 변하고 언론 문화가 변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월터 크론카이트는 텔레비전이 막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시대에 앵커맨으로 등장한 뒤 미국 텔레비전 저널리즘의 방향을 제시했고, 앵커맨의 틀을 만들었습니다. 크론카이트가 국민들의 신뢰와 존경을 받았던 핵심은 철저하게 객관적으로 보도하는 자세와,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인격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의견을 말하는 논평가 이기를 거부하고 늘 객관적인 기자이기를 고집했고, 이 고집이 그를 미국 최고의 언론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기자의 자세가 그를 신뢰할 수 있는 언론인으로 만들었고 때로는 미국 역사의 방향을 바꾸기도 했습니다.
    월남전이 한창일 때 수 주간 직접 전쟁터에 나가서 취재를 한 뒤 돌아 와 종합 보도를 하면서  크론카이트는 베트남 전쟁은 더 이상 승리할 수 없는 전쟁이고 여기서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말을 아주 완곡하고 간접적으로 말했습니다. 기자는 기사에서 자기 의견을 말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고수했던 크론카이트가 나라를 위해 자신의 원칙을 깬 이 논평은 월남전의 방향을 바꾸는 결정타가 됐습니다. 이 방송을 청취하던 린든 존슨 당시 대통령은 "내가 크론카이트를 잃었으니 미국의 중심을 잃었다" 면서 가슴을 쳤습니다. 그 때 텔레비전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고뇌하던 존슨 대통령의 사진은 한 언론인의 신뢰와 존경이 얼마나 막강했는지를 웅변해 주는 역사적 기록입니다. 월터 크론카이트는 린든 존슨 대통령과 같은 텍사스 출신이었습니다. 

    객관적 보도와 이것을 뒷받침하는 인격과 함께 월터 크론카이트는 이것을 빛나게 할 수 있는 풍모와 목소리를 가졌습니다. UPI 통신 기자로 언론계에서 성장한 크론카이트는 나이가 들면서 그의 중후하고 너그럽게 보이는 얼굴과 묵중한 목소리로 미국의 안방과 미국인들의 가슴을 지배했습니다. 그의 신뢰 이미지가 워낙 높아서 정치에 대한 유혹도 컸습니다. 한 때 민주당에서는 그를 대통령 후보로 영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으나 크론카이트는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그의 대답은 "내가 정치의 길로 가면 내가 지금까지 보도한 것에 대한 신뢰성과 순수성을 의심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선례는 후배 언론인들에게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고 언론인의 긍지와 신뢰를 실추시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여기에 월터 크론카이트가 미국 최고의 언론인이 된 정신과 철학의 요체가 있습니다. 

    크론카이트가 걸어 온 언론인의 삶을 보면서 저는 착잡한 갈등을 오랫동안 했습니다. 신문기자를 시작할 때 바르고 정직하고 공정한 언론인이 되겠다고 다짐했으나 결국 저는 불편부당하고 객관적인 언론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운동가적 언론인"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과거 한국 정치는 기자가 기자의 자리에 있을 수 없게 하는 불행한 시대 상황을 만들어 주었고, 기자 이전에 언론자유와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국민의 소임에 우선해야 한다는 시대의 소리를 외면할 수 없게 했습니다. 저도 이 시대의 소리에 따라 언론자유운동에 참여했고, 이 길은 결국 저를 "운동가적 언론인"(Activist Journalist)으로 만들었습니다. 언론계를 떠났다 다시 돌아 왔을 때 저는 이미 순수 언론인의 동력과 이미지를 잃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미 "객관적 언론인"이 아니라 세상과 사람을 비판하는 논평가의 땅위에 서 있었습니다.
    자기 주장과 신념을 말하는 기자는 이미 기자가 아닙니다. 의견과 주장을 말하는 기자는 논평가, 칼럼니스트, 논설위원이지 기자가 아닙니다. 논평가와 칼럼니스를 편의상 언론인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언론인이 아닙니다. 언론인의 생명은 치우치지 않고, 세상의 현상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객관자, 관객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저도 이미 그 선을 넘었고, 우리 시대 많은 언론인들, 특히 한국의 언론인들은 언론인의 울타리를 훨씬 넘었습니다. 정직하게 말하라면 오늘 한국 언론계는 언론인이 죽어가고 언론의 근저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월터 크론카이트는 20년간 앵커를 하면서 늘 "That's the way it is."란 말로 뉴스를 끝냈습니다.
    지금까지 방송한 것이 오늘 세상에 있는 뉴스를 종합한 것이고, 세상 돌아가는 내용이라는 뜻입니다. 지구촌의 수많은 뉴스를 선별하는 것도 주관적이고, 그것을 보도하는 방법도 주관적이지만, 최대한의 객관성과 공정성으로 독자와 청취자들에게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 뉴스를 전달하는 것이 기자의 사명이고, 그 자세가 언론인의 생명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많은 한국 언론은 세상의 뉴스를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기자와 편집자가 전하고 싶은 의견을 섞고 각색하는 의도성이 있는 기사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That's the way it should be.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기사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객관적이고 공평무사하려고 노력해도 어려운 것이 객관적 기사를 전달하는 것인데, 기자가 의도성과 동기성을 가지고 기사를 쓰면 그 기사의 왜곡성과 허위성은 산불처럼 됩니다. 이런 기자들이 쓰는 기사는 기사가 아니라 선전문, 선동문이 됩니다. 이러한 현상은 후진국일수록 심하고, 독재국가, 이념국가 일수록 큽니다. 한국에서 가장 심했던 시대가 유신시대와 전두환 시대였고, 지금 세계에서 가장 심한 곳이 바로 북한입니다. 

    그런데 한국이 민주화가 되고 선진국 대열로 가는 첨단시대에 선전문, 선동문을 쓰는 언론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언론 자유를 외치던 사람들이 과거의 독재 유산과 거기에 동조했던 기득권  언론을 개혁한다는 명분으로 운동적 언론인들로 변했습니다. 여기에 좌파 이념주의자들이 진보 이념을 구현해야 한다는 목적으로 정치적 의도와 동기를 언론에 접목시켰습니다. 결국 정의를 실현한다는 이름으로 언론의 정신을 훼손시키고 있습니다. 그 가장 대표적인 것이 MBC의 광우병 보도였습니다. MBC의 PD 수첩이 제작한 광우병 기사는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만든 기사였고 왜곡성과 허위성이 명약관화했는데도 문화방송은 막무가내였고, 이 방송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떼를 지었습니다. 

    얼마 전 검찰이 MBC 기사에 허위성과 왜곡성이 있다는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PD 수첩 제작에 참여했던 어느 PD 작가의 이메일을 공개했습니다. 이 글에서 PD 수첩 광우병 프로그램에 참여한 작가는 "이명박에 대한 적개심이 하늘을 찌를 때라" 광우병 프로그램 제작에 "광적으로 일을 했다"고 썼습니다. 광우병 프로그램을 제작하는데 무슨 "필이 꽂혀서 방송했다"는 말을 하면서, 아직 아무개 "정치인을 못 죽였으니 교육의 백년지대계를 위해 서둘러 제거해야 한다"고 덧 붙였습니다. 이러한 광적인 분노와 광적인 편견이 결국 MBC PD 수첩을 한국 언론의 수치작품으로 만들었습니다. 

    당사자인 PD 작가는 이러한 내용을 공개한 국가 기관과 이것을 쓴 언론을 상대로 민형사상 고소 등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다 동원하겠다면서 이메일 공개는 "사생활을 침해하는 심각한 인권유린"이라고 분노하고 "너무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올 지경"이라고 말했습니다. 인격을 유린당한 것은 한국 언론이고, 어이가 없어야 할 사람은 광우병 광기에 휘둘린 국민들인데 PD 작가는 적반하장의 냉소를 던지고 있습니다. 이 PD 작가의 분노와 냉소를 들으면서 이런 인격과 광기가 왜곡된 보도를 제조하고 가공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의도적으로 왜곡된 기사를 만든 당사자가 잘못을 반성하고 사과하면서 고치려는 자세가 아니라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들을 향해 적의와 냉소를 보이는 것은 너무 치졸한 적개심입니다. PD 작가는 이메일 공개를 사생활 침해라고 말하고 있지만, 편지가 발송되어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갔으면 이미 사생활 영역을 벗어난 것이고 그 편지는 증거가 됩니다. 사생활을 최대한 보장하는 미국에서도 당사자의 이메일을 뒤지는 것은 불법이지만 자기 손에서 떠난 이메일이 유출된 것은 증거로 채택될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언론자유가 성역처럼 간주되지만 기자가 의도성을 가지고 비판했으면 명예훼손죄가 성립됩니다. 명예훼손의 핵심은 비판에 악의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문화방송의 PD 작가는 적의에 찬 편지를 통해 광우병 기사가 악의성이 있고 고의성이 있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했습니다. 

    한국 방송 언론의 문제점은 이런 사람들의 의도성과 악의성이 프로그램으로 현실화 될 수 있다는 시스템과 그런 의도성을 허용하는 언론 풍토입니다. 언론인으로 훈련되지 않고, 언론과는 거리가 먼 작가나 PD들이 언론인 역할을 하면서 언론의 본질을 휘젓고 있습니다. PD와 작가가 보도와 논평의 영역에 뛰어든 것은 잘못 된 것입니다. PD와 작가는 프로그램을 기획 구성하고 윤색 각색하는 언론 기술자들이지 공정하고 정확한 사실 보도를 생명으로 하는 언론인이 아닙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려는 의도를 가졌더라도, 그것을 프로그램으로 재구성하고 작가를 동원해 생각과 언어를 다듬는 것만으로 이미 사실이 왜곡될 가능성이 예고됩니다. 여기에다 이념과 적개심과 의도성까지 가미되면 왜곡은 필연성이 되고 MBC 광우병 수첩 같은 것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에서 한국 방송을 들으면 기자와 앵커가 객관적 보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주장을 가미시켜서 사설과 칼럼을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인 2세들과 미국인들을 위해 영어로 번역하면 한국 방송의 편파성과 주관성을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MBC의 광우병 왜곡 보도를 통해 한국 언론에 반성의 기운이 일어나야 합니다. 자성과 자정을 통해 일그러진 언론 풍토를 교정하고 기자는 언론인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야 합니다. PD가 보도 영역에 개입되는 것을 제도적으로 시정하고, 기자가 운동가적 언론인으로 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피디 저널리스트와 액티비스트 저널리스트들이 언론계 주류에서 떠나거나 자세를 바꾸어야합니다. 이들이 주류 언론에서 활동하면 한국 언론계가 더욱 감정적이 되고 편파적이 됩니다. 이들은 극단주의 풍토를 더욱 심화시키고 갈등의 골을 깊게 합니다. 운동가 언론인들은 역사에 공헌하는 영역이 있지만 이들이 언론의 중심에 서면 언론이 만신창이가 됩니다. 독재시대에는 운동가적 언론인이 언론의 정신을 살리고 용기를 주었지만, 지금 시대는 언론 정신을 죽이고 언론 풍토를 정글화 시키고 있습니다. 

    운동가 언론인의 특성은 다른 사람 의견에 귀를 막는 것입니다. 상대의 생각이 아무리 일리가 있어도 듣지 않고 감정적으로 대합니다. 운동가 언론인들은 귀를 열고, 눈을 뜨고, 왜 월터 크론카이트가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고 신뢰받는 언론인이 되었는지를 성찰해야 합니다. 미국이 혐오스럽고 미국 언론인이 싫더라도 자성과 자정의 거울로 삼아야 합니다. 운동가 언론인들은 자기 정의의 새장에서 나와 다른 세상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