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5일자 오피니언면 '시시각각'에 이 신문 김진 논설위원이 쓴 '나폴레옹, 리콴유 그리고 박정희'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나폴레옹은 1769년 지중해 코르시카 섬에서 태어났다. 코르시카는 프랑스 식민지였다. 나폴레옹의 아버지는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전투에서 패하자 식민 지배에 순응했다. 프랑스 총독으로부터 귀족 대우를 받기도 했다. 나폴레옹의 어린 마음을 누른 것은 거대한 식민 권력 프랑스였다.

    열 살 때 나폴레옹은 아버지를 따라 프랑스로 갔다. 프랑스 학교에서 그는 외로운 소년이었다. 프랑스어를 잘하고 싶었지만 그에겐 코르시카 사투리가 붙어 있었다. 그는 자주 울었고 혼자 역사책을 읽곤 했다. 열다섯 살 때 그는 파리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식민 모국(母國)의 심장부에 들어간 것이다.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육군 장교가 되어 혁명 수호에 열정을 바쳤다. 파리의 기숙사에서 혼자 흐느꼈던 코르시카 소년은 식민모국의 황제가 되어 국가와 역사의 발전을 주도했다.

    리콴유는 1923년 동남아의 작은 섬 싱가포르에서 태어났다. 싱가포르는 영국의 식민지였다. 리콴유는 부유한 중국계 집안에서 자랐다. 소년 리콴유에게 영국은 세계의 중심이었으며 그의 꿈은 영국 신사가 되는 거였다. 리콴유는 중국어보다 영어를 잘 했고 식민 정부가 세운 명문 래플스대학에 진학했다. 하지만 42년 초 일본군의 점령으로 그의 세계관은 흔들렸다. 일본의 대담한 속공전에 영국군은 무너져 내렸다. 리콴유의 마음속에선 영국이 무너져 내렸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청년 리콴유는 조국의 미래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는 식민 모국의 심장부 런던으로 갔으며 케임브리지대 법대를 나와 변호사가 됐다. 그는 영국 신사보다는 싱가포르 개혁가의 길을 택했다. 그의 영도력으로 싱가포르는 “아테네 이후 가장 놀라운 도시국가”(필립 무어 전 싱가포르 주재 고등판무관)가 됐다.

    박정희는 1917년 경북 구미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에게 일본 제국주의는 세계의 중심이었다. 그는 사범학교를 나와 초등학교 선생이 됐지만 3년 만에 포기하고 군인의 길로 뛰어들었다. 44년 청년 박정희는 식민 모국의 심장부 일본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갔다. 일본군 소위가 됐고 만주에서 군인 생활을 했다. 일제 시절 박정희는 일왕의 장교였다. 45년 해방된 후 그는 대한민국의 장교가 됐다. 그리고 대통령이 되어 17년간 통치했다.

    인류의 역사에선 많은 이가 식민 지배 국가의 위압적인 숨결을 느끼며 자랐다. 식민 모국은 세계의 중심이었고 거부할 수 없는 거대한 산맥이었다. 물론 저항의 길을 택한 이들도 있다. 이승만이 그러했고 김구가 그랬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은 순응의 길로 갔다. 그런 순응의 길로 떠난 이 중에서 혁명가들이 있었다. 그들은 식민 모국의 심장부로 뛰어들어 자신을 개조하고 훗날 조국을 개조했다. 살무사 새끼가 어미의 사체를 자양분으로 삼듯, 이들은 외로움과 분노를 감추고 식민 모국의 자양분을 빨아들였다. 그리고 그 영양분을 조국과 역사를 위해 썼다.

    내년 8월 친일인명사전이 나온다고 한다. 모두 4700여 명이고 박정희 전 대통령도 들어 있다. 일제 36년은 국기(國基)의 상실이었던 만큼 친일의 기록을 남겨 후세의 교훈으로 삼는 일은 중요하다. 식민지에서 살려면 어쩔 수 없이 식민권력에 순응해야 했을 것이다. 그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해한다는 것과 기록을 남기는 것은 다른 일이다. 혼이 있는 국가라면 그런 기록을 후세에 전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친일(親日)이란 주홍글씨에 숨어 있는 영혼의 고뇌도 기억해야 한다. 자신의 영달이 아니라 조국과 역사를 위해 식민지배에 안겼던 이들도 기억해야 한다. 역사는 참으로 아이로니컬하다. 나폴레옹이 코르시카 섬에서 농사나 지었다면 오늘날의 프랑스가 있을까. 리콴유가 식민 모국을 외면하고 싱가포르에서 소시민으로 살았다면 오늘날의 싱가포르가 있을까. 박정희가 일본육사를 거부하고 시골 초등학교 교사로 남았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