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 12일자 오피니언면 '시론'에 강규형 명지대 교수가 쓴 '보수가 지금부터 넘어야 할 산'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이명박 후보와 ‘새로운’ 보수는 수많은 악재에도 불구하고 예상을 뛰어넘는 압승을 거뒀다. 이회창 씨의 15%를 더해 보수진영이 63.8%가 넘는 표를 얻었다는 것은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진보에 비해 뿌리 깊지 않아

    돌이켜 보면 2002∼2004년은 진보진영의 전성기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시기는 낡고 저질적인 진보가 판을 치던 시기이기도 했다. 대한민국 정통성은 부정됐고, 불법 시위는 난무했으며, 맹목적 친북반미 정서는 최고조에 달했다. 어떤 이는 시대착오적 구호가 난무하던 그때를 ‘한국판 문화혁명’의 시기라고도 했다. 오죽하면 중도보수의 유명 논객과 신자유주의의 대변자가 공히 “진보의 시대나 진보정권이 10년은 더 갈 것”이라 체념했겠는가. 그즈음 한 재벌 총수는 우파단체에 대한 지원을 금지하고, 다른 재벌 총수는 진보 비정부기구(NGO)에 “몇 십억 원 정도 지원”하며 잘 보일 것을 검토하라 했단다.

    “달도 차면 기우나니.” 그러나 혁신우파를 주창하는 뉴라이트의 등장으로 상황에 변화가 생겼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집권세력의 무기력이 더해지면서 너무 쉽게 보수정권이 등장했다. 이번에도 역시 역사는 인간의 상상력을 뛰어넘었다. 그러나 새로운 보수정권이 승리에 도취해 있을 수만은 없는 몇 가지 난관이 존재한다.

    첫째, 한국 보수는 건전한 숙성 과정이 짧고 약하다. 신보수를 제외하고는 시대정신을 잘 파악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정권을 되찾는다는 열의에 불타 진보세력에 대한 비판에는 강했으나, 정권 쟁취 이후의 장기 청사진이 아직은 불투명하다. 더구나 승리에 도취해 급속히 기득권 세력으로 변할 위험성도 있다. 그래서 정권 교체로 인해 생긴 전선 변화에 따라 새롭고 더 강한 진지(陣地)를 쌓아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진보건 보수건 수구세력과 맞서는 건전세력을 육성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 “노망난 국민”이나 “못된 국민” 탓만 하며 정신 못 차리는 진보세력이 지금은 무너져 내리고 있지만, 결국 폐허 위에서 새 진지를 쌓을 것이다. 그들은 뿌리가 깊기에 시간이 지난 뒤 업그레이드돼서 돌아올 것이다. 또 그래야만 건강한 견제세력으로 기능을 할 수 있다.

    그러면 한국의 보수는 대비가 돼 있는가? 아쉽게도 그들의 뿌리는 얕다. 지지부진한 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와 박정희기념사업회의 활동을 보면 이런 우려는 현실이 된다. 변변한 우남 기념관이나 박정희 자료관 하나 만들지 못하는 보수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특히 한국 보수는 밑으로부터의 문화, 가치, 사회운동을 가일층 강화해 나가야 한다.

    기대 못 채우면 지지 빠질 것

    둘째, 기대 수준의 폭발이다. ‘흠 많고 약점 많은’ 후보를 이렇게 압도적으로 당선시킨 것은 시대정신이기도 하지만, 당선인이 이끌 새로운 체제에 대한 기대가 크기 때문이다. 새 정권은 많은 것을 약속했다. 특히 경제는 확실히 살려 놓겠다고 했다. “노무현 정부가 국민 모두를 못살게 했다면, 이명박 정부는 국민 모두를 잘살게 만들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올해 세계 경제는 흐림을 예보하고 있다. 경제는 물론 교육, 사회, 대북관계 등 쉽게 풀 수 있는 문제는 하나도 없다. 새 정부가 각 분야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경우 신보수 정권에 대한 지지는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이며, 아울러 한국 보수의 기반도 같이 무너져 내릴 개연성이 있다.

    가장 행복한 순간이 당선인 시절이라 한다. 소풍 갔을 때보다 가기 전날 김밥 쌀 때가 더 즐거운 것과 같은 이치리라. 그러나 ‘새로운 보수정권’이 마냥 행복감만을 느끼기에는 상황이 녹록지 않다. 이제는 기쁨을 뒤로하고 이런 문제들을 냉정히 직시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