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6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문창극 주필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정치인들의 이합집산이 분주한 걸 보니 다시 선거철이 온 모양이다. 열린우리당의 탈당 사태도 어찌 보면 과거 정치의 반복으로 치부할 수 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의 분열은 과거와는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정권은 진보를 표방하고 권력을 잡았다. 당시 많은 유권자는 변화를 갈망하며 진보를 선택했다. 그러나 지난 4년 진보정권은 국민을 실망시켰다. '진보라는 것이 이런 것이냐'라는 회의가 들게 만들었다. 이런 추세라면 보수주의를 표방하는 한나라당의 후보가 1, 2, 3등을 나란히 할 판이다. 진보 세력의 몰락을 예고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열린우리당의 탈당 사태는 어느 때보다 더 비극적이다. 이 정권의 실패로 인해 한국 정치에서 진보가 영원히 외면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보가 추구하는 합리 이성 평등 공정 등의 가치는 하나의 이상이다. 반면 현실은 이기심과 욕망을 가진 인간들이 모여 살아가고 있다. 이상과 현실의 갈등은 불가피하다. 그렇기 때문에 진보를 꿈꾸는 사람은 현실의 다양성과 복잡성, 이로 인한 이상의 한계를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진보는 이데올로기화되고 포퓰리즘의 도구로 변한다. 이 정권의 약점은 바로 그것이었다.

    진보의 핵심적 가치 중 하나가 평등이다. 그렇다면 진보정권 탄생 후 우리는 좀 더 고른 사회가 되었는가. 대통령조차 양극화가 심해졌다고 말하고, 젊은이들은 일자리가 없어 방황하고 있다. 이 정권은 부자가 밉다고 소리만 질렀지, 가난한 사람들의 실생활을 어떻게 향상시키느냐의 현실에는 접근하지 못했다. 평등을 정책으로 만들지 못하고 이데올로기로 머물게 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최저임금을 시간당 2달러 올리는 것을 놓고 수년간 토론하고 있다. 평등한 사회를 위해 팍팍 올려주면 시원할 텐데 왜 못하는가. 경제에 미치는 파급효과라는 현실을 감안해야 했기 때문이다. 임대주택 많이 짓고, 사회 안전망 넓히고… 진보로서 주장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재원은 세금이고 그 세금이 무거워지면 경제는 동력을 잃는다. 그렇기 때문에 고르게 잘사는 나라를 만든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은 것이다.

    진보의 중요한 가치는 인권이다. 내 나라 인권뿐 아니라 인류의 인권을 걱정해야 하는 것이 진보다. 이 정권은 과거사 정리한다며 긴급조치·인혁당 사건을 비판했다. 진보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왜 남쪽의 과거 인권유린에는 거품을 물면서 북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재의 인권유린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못하는가. 진보는 합리를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사회악을 미워한다. 그런데 왜 이 진보정권에서 서민을 울리는 '바다이야기' 도박이 판치게 만들었는가. 교육은 진보의 중요한 수단이다. 누구에게나 공정한 기회를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수재들이 과외비가 없어 성적을 올리지 못한다면 그들의 성적 향상을 위해 방과 후에라도 애써야 하는 게 참스승이다. 학생들을 빨치산 기념식에 동원하고, 북한을 이상사회인 양 교육하는 게 이 시대의 진보를 표방한 전교조 선생들이고 이들을 방치하는 게 진보정권이다. 반면 가난한 대학생에게 대부하는 학자금은 비싼 이자를 받아도 눈을 감는다.

    왜 이 나라에는 친북 진보만 있고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애국 진보는 없는가. 왜 가난한 사람의 현실을 개선하기보다는 이들을 이용하려는 야심가 진보만 판치는가. 왜 머리로만 진보를 생각하고 실제로는 귀족생활을 갈망하는 위선자 진보만 그득한가. 왜 한국에서는 반미·친중을 해야만 진보라고 하는가.

    한국의 진보는 이 질문에 답해야 한다. 개헌으로, 남북 정상회담으로 판을 흔들어 선거에 이긴들 가짜 진보는 가짜일 뿐이다. 탈당해 신당을 만든다고, 대통령 후보를 여기저기서 구걸한다고 진보가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또 한번의 기만이다. 지금은 진보가 왜 실패했는지를 먼저 곰곰이 성찰해야 할 때다. 그 반성 아래 새로운 진보철학을 만드는 것이다. 진보는 반드시 필요한 가치다. 그렇기 때문에 건강한 사회에서는 진보와 보수가 비슷한 세력 균형을 이룬다. 한국의 진보는 진보다워져야 한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건강한 사회를 위한 균형이 필요하다. 구호나 이데올로기로서의 진보가 아니라 세심하고도 현실적인 정책으로서의 진보가 나와야 한다. 그렇게 되면 흩어졌던 지지자들도 자연히 모일 것이다. 그래야 진보도 살고 나라도 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