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일보 25일자 오피니언면 '포럼'란에 이재교 변호사가 쓴 '민주평통을 트로이목마 만들려는가'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현 정권이 요즘 보이는 행태는 아무리 봐도 말기 증상이다. 국정에 전념해도 바쁠 대통령이 뜬금없이 개헌을 화두로 꺼내더니 요즘은 방송이나 회의에서 말잔치에 여념이 없다. 대통령 자문기구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김상근 수석부의장의 발언 역시 말기 증상이 아니고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김 부의장은 지난 23일 오는 7월 출범하는 제13기 자문위원 중 절반을 ‘진보’인사로 채우고 나머지는 보수·중도적 인사로 채우겠다고 공언했다.

    평통자문회의 의장인 노무현 대통령의 정의에 따르면, 진보는 “고쳐가며 살자”는 자세고, 보수는 “합리적 보수, 따뜻한 보수, 별놈의 보수 갖다놔도 보수는 바꾸지 말자”는 자세라고 한다. 그렇다면, 김 부의장이 진보인사를 50%밖에 채우지 않겠다는 방침은 큰 잘못이다. 민주평화적인 통일에 관해 대통령의 자문에 응하는 헌법기관에 ‘보수’인사를 포함시키는 것은 현재의 분단 상태를 바꾸지 말자는 사람을 위원으로 위촉하겠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김 부의장 역시 “민주·평화·통일은 진보적·전향적·미래적 가치이지 보수적 가치는 아니다”고 보는데, 그렇다면 자문위원 전부를 언필칭 ‘진보’인사로 채워야지 단 한 사람인들 보수인사를 넣으면 안 되지 않겠는가.

    김 부의장의 진의는 ‘코드’인사로 평통을 채우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노 대통령의 임기가 다 돼 자문회의를 친북인사로 채워서 오는 대통령선거에 이용하고, 새 정부에서도 코드화된 통일정책을 유지하는 트로이목마로 삼겠다는 저의로 의심할 수밖에 없다. 김 부의장이 민주평화통일이 ‘진보’만의 가치라고 강변하는 것을 보면, 억측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평통자문회의는 모두 1만7000여명의 자문위원으로 구성돼 전국 방방곡곡은 물론 해외에도 지부가 있는 방대한 조직이어서 악용하고 싶은 유혹이 들만도 하다.

    평통은 헌법에 근거를 둔 기관으로서 통일정책 전반에 관한 자문·건의를 하는 게 주된 기능이다. 그런데 진실한 평통위원들에게는 외람된 말이겠지만, 평통이 그동안 역대 대통령에게 무슨 정책을 얼마나 건의하여 정책에 반영했는지 모르겠다. 평통의장인 노 대통령조차도 지난달 26일 열린 평통상임위에 참석, 당시 건의받은 내용이 “아주 구체적인 특별한 내용 이외에는 정책기조가 똑같은 방향에 서 있는데, 왜 같은 말씀을 또 반복하실까, 이런 의문이 생긴다”고 토로했을 정도다.

    평통의 상근직원만 68명이고, 지난해 예산이 130여억원에 이른다. 예산의 대부분은 인건비와 회의 개최비 등에 지출되고, 본연의 업무인 통일정책 개발을 위한 예산은 기본사업비 전체가 그 비용이라고 보더라도 21.5%인 28억원에 불과하다. 그리고 평통은 출범 이후 지금까지 지역 유지의 명함 장식용에 불과하다는 혹평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현 집권세력은 역대 정권의 평통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런데 정권을 잡자 2년 전에는 75%를 물갈이하여 집권세력의 전리품으로 삼으려 한다는 의혹을 사더니 이제는 노골적으로 코드가 맞는 ‘진보’인사로 채우겠다고 나서기에 이르렀다.

    평통을 트로이목마로 삼을 바에는 폐지하는 게 낫다. 통일정책 개발과 집행을 위해서라면 통일부와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있고, 정책연구라면 통일연구원이 있으며, 여론 수렴이라면 인터넷 매체가 널려 있다. 헌법기관이라지만 설치하지 않을 수도 있는 임의기관이므로 폐지하더라도 위헌이 아니다. 전직 대통령의 상왕(上王) 논란으로 인해 1989년에 폐지된 국가원로자문회의라는 헌법기관도 있다. 현 정부가 실효성도 없고, 정치적으로 악용될 소지가 높은 평통을 폐지함으로써 위원회공화국이라는 오명이라도 벗어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