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민일보 18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이진곤 주필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북한의 핵실험에 민족적 긍지를 느끼는 남한 동포들이 있다고 들린다. “이참에 미제(美帝) 숨통을 끊어놔야 한다. 그것이 우리 민족을 구하는 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민족에 대한 참으로 대단한 신뢰다. 그래도 농담이었을 것이다. 아무려면 진심으로 그런 황당한 말을 했을까. 민족에 대한 환상은 위험하다. 남북의 주민이 한 겨레이지만 그 사이에는 무기(武器)의 밀림이 존재한다. 군사적으로만 말하자면 민족지상주의자들이 친애해 마지않는 북한은 여전히 적이다. 그것도 아주 위험한….

    북한 당국의 핵실험 강행으로 조성되고 있는 국제적 제재 분위기에 대해 친북(거북하다면 용북容北 으로 하든지) 인사들이 걱정하는 것은 이쪽 겨레의 안전이 아니다. 혹 햇볕정책,평화번영정책에 차질을 빚을까봐 안절부절 못하는 빛이다. 집권당 안에서까지 그 같은 기류가 강하게 흐르고 있는 게 현실이다.

    열린우리당 의원 둘, 민주노동당 의원 하나, 이렇게 셋이 일전에 금강산을 다녀왔다며 공동성명을 냈다. 거긴 평온하던데 왜 국제사회와 우리 국내에서 이렇게 시끄러운지 모르겠다는 투다. ‘북측 인사’의 말도 전했다. 핵실험은 ‘미국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고 하더란다. 안전이 보장되면 한반도는 비핵화할 것이라거니, 이는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라거니 하는 말도 어김없이 듣고 왔다.

    국회의원이라는 분들이 성명을 통해 전했던 그 대단한 언급의 주인공은 물어보나 마나다. 관광객이 거기서 말 한 마디라도 나눌 수 있는 북측 인사는 안내원뿐이다. 갈수록 태산이라고 이분들은 “우리의 심정은 1948년 4월19일 분단을 막기 위해 38선을 넘었던 김구 선생의 마음과 다르지 않았다”는 데까지 갔다. 코미디로 듣기에도 간지럽다.

    엊그제는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이 현대아산 본사를 방문, 금강산 관광사업에 대한 적극적 지원 의지를 밝히며 주먹 불끈 쥐고 ‘파이팅’(어느 신문이 표현하기로)을 외치는 모습이 보도됐다. 오는 20일엔 개성공단을 방문할 예정이고 다음달 18일엔 관광 시작 8주년을 맞아 금강산에 가는 것도 고려하겠단다.

    잘못 이해하고 있는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햇볕정책이니 포용정책이니 하는 것은 정권의 대내용 구호일 뿐이다. 북한측이 그걸 ‘햇볕’ ‘포용’으로 인식하고 고마워할 때나 대북용으로도 효용이 있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으로서는 오히려 남한 당국에 시혜를 베푼다고 여길법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노벨상을 수상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으니 생색을 낼 만도 하지.

    지원을 계속하면 언젠가는 태도를 바꿀 것이라고 여긴다면 어림없는 착각이다. 이는 국가 차원의 투기이거나 도박이다. 한나라당 최경환 의원이 17일 재정경제부 국정감사에 앞서 배포한 자료에는 DJ정부 이래 남한에서 3조5000억원의 현금이 북한에 건네진 것으로 추정됐다. 그 돈으로 평화를 샀는가? 돌아온 것은 한반도에 거주하는 7000만명의 목숨을 인질 삼은 핵공갈이다.(김대중 전 대통령이 분노를 표시할 상대는 미국이나 남한 내 북한 비판자들이 아니라 정상회담의 의의를 있는 대로 퇴색시켜버린 김정일 위원장일 것이다)

    대북 화해정책을 추진하는 것은 당연히 바람직하다. 다만 국민을 오판하게 하는 무지개 꿈을 섞어 넣는 것은 위험하다. 남북 당국이 함께 추진해야 할 것이 민족 화해협력 사업이다. ‘햇볕’이니 ‘포용’이니 해가며 포장을 화려하게 할수록 비용은 늘어난다. 북한측이 자존심 값을 얹어서 받으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이 핵무기로 우리의 안보까지 책임져줄듯 기염을 토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우리 내부에서조차 그런 황당한 기대를 하는 것은 어깃장 놓기로도 이제는 그만 하자. 괜히 역성들어 한 걸음씩 주춤주춤 물러서줄수록 그들은 더 바투 다가서게 마련이다. 폭력 과시를 생업으로 삼고 있는 상대에게 보여주는 비실 웃음은 완력시위와 협박을 부추기는 신호가 된다. 어설픈 민족주의 자랑도 그만 좀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