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장 식민지(植民地) (21)

     「아니, 이게 누구시오?」
    종로 미곡상에서 나오던 나는 뒤에서 들리는 외침에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다음 순간 숨을 삼켰다. 활짝 웃음을 띄고 다가오는 사내는 바로 김윤정이었던 것이다.

    김윤정(金潤晶)이 누구인가? 주미 공사관 서기생으로 있다가 1년만에 대리공사로 승진한 매국노.
    나와 윤병구가 루즈벨트로부터 청원서를 정식으로 대한제국 공사관을 통해 미국무부에 제출하라는 말을 듣고 기뻐 달려갔을 때 본국의 훈령이 없다는 이유로 거부했던 역적. 이놈은 이완용보다 더 더러운 놈이었다. 주미공사관이 폐쇄되자 미국의 동포가 무서워 여장을 하고 귀국했다는 놈.

    그때 다가선 김윤정이 내 위아래를 훑어보며 말했다.
    「박사 학위를 받고 오셨다는 말은 들었소. 그동안 찾아뵐까 했는데 나도 바빠서 말씀이오.」

    김윤정은 말쑥한 양복차림에 뒤에는 일본군 헌병 셋을 이끌고 있다. 경호원을 대동한 관리의 행차인 것이다.

    내가 쓴웃음을 띤 얼굴로 대답했다.
    「소문은 들었소. 일취월장 하고 계시다고 말씀이오.」
    「허, 그렇소?」
    김윤정이 턱을 들고 다시 웃는다.

    지금 김윤정은 경기도 참여관(參與官)이란 관직에 있다. 귀국하고 나서는 태인군수, 인천부윤, 전라북도 참여관 등으로 승진을 거듭해온 것이다.
    내가 머리를 돌려 뒤에 선 배경수를 보았다. 오늘 YMCA에서 먹을 쌀을 사러 나왔던 것이다.

    그때 김윤정이 말했다.
    「그 좋은 박사학위를 갖고 YMCA에서 철부지 아이들이나 가르치다니, 이공께서 마음만 있다면 내가 대학 교수로 추천해 드리리다. 본국의 대학을 원하신다면 그것도 얼마든지 가능하오.」

    나는 잠자코 시선만 주었다.

    김윤정은 1869년생이니 나보다 여섯 살 연상이다. 올해로 44세가 되었는데도 나보다 더 젊고 활기차게 보였다.

    내가 눈만 껌벅이고 있었더니 김윤정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니, 총독부에도 자리가 많소. 이공의 학력과 경력이면 도지사인들 못할 것이오? 내가 앞장서 주선하리다.」

    그때서야 나는 김윤정이 나를 놀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교활한 인간은 워싱턴에서 당한 수모를 지금 갚고 있는 것이다.

    그때 내가 말했다.
    「김 참여관, 부디 조심하시오.」
    말을 멈춘 김윤정이 이제는 시선만 보냈고 내 말이 이어졌다.
    「내가 소문을 들었는데 독립군이 김 참여관을 노리고 있다는 거요.」

    김윤정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놈은 겁이 많다. 내가 공사관으로 들어 올까봐 경비원을 푼 놈이다.

    「그때 김 참여관이 청원서 전달을 거부했기 때문에 합방이 되었다는 사실을 이제는 독립군들도 알게 되었다는 것이오.」
    「그, 그런 억지가.」

    김윤정이 눈을 부릅떴지만 내가 정색하고 묻는다.
    「아니, 그렇지 않소? 총독부 고관들이 그 말을 들으면 김 참여관을 합방 공신으로 더욱 우대하지 않겠소?」
    「이보시오, 이공.」
    「내가 오늘 김 참여관을 보았으니 강의 때마다 김 참여관의 공적을 선전해 드리리다. 내가 미국에서 받은 신세를 갚아 드리지요.」

    그리고는 내가 발을 떼었다. 김윤정이 이를 악물고는 숨도 쉬지 않는 것 같다. 이놈은 욕심도 많지만 겁도 많은 것이다. 공이 탐나지만 청원서 전달을 거부한 소문이 퍼질까봐 노심초사 할 것이다.

    이것이 비겁자의 진면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