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후 네시 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정수용은 술에 취해 있었다.

    「어, 너 왔냐?」
    짐 안으로 들어선 정기철에게 몽롱한 표정으로 묻더니 곧 머리를 떨구고는 졸기 시작했다.

    거실의 TV는 광고 방송을 하는 중이었는데 음소거를 시켜서 사람들이 물고기처럼 입만 쩍쩍 벌리고 있다.

    정기철이 소파에 앉아 정수용을 바라보았다.
    정수용은 옆쪽 벽에 등을 붙이고는 두 다리를 쭈욱 뻗었다.

    물론 방바닥에는 빈 소주병 두 개, 세워진 소주병이 한 개 놓여졌다. 안주는 김치 보시기가 하나, 환기가 안된 집안에서 썩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정수용은 정기철이 일하러 나간 15일동안 청소 한번 안했을 것이다.

    이윽고 정기철이 입을 열었다.
    「아빠, 엄마한테 헤어지자고 했다면서?」

    정수용이 머리를 조금 들었다가 내렸다. 그러나 감은 눈은 뜨지 않는다.

    정기철이 다시 물었다.
    「이혼하고 집 나가려고 그랬어? 설마 어머니하고 민화를 내보내고 아빠 혼자 여기서 살려는 건 아니지?」
    「......」
    「꼭 그렇게 엄마 가슴에 칼을 꽂는 말을 해야겠어? 이혼 하는게 뭔데? 헤어지는 거 아냐? 헤어지려고 마음먹었다면 그냥 떠나면 되는 거 아냐?」
    「......」
    「이 집 보증금 2천 빼내서 술 마시려고 한거야? 그렇다면 안되겠어. 내가 못하게 말릴테니까.」
    「......」
    「아빠, 여기.」
    하고 정기철이 가방에서 서류 봉투를 꺼내 정수용 앞으로 다가가 술잔 옆에다 놓고 돌아왔다.
    「내가 15일동안 아파트 공사장에서 벽지 공사를 해서 번 돈이야. 2백 2십 벌었는데 2백 넣었어. 그것 갖고 나가. 이 집은 엄마하고 민화한테 넘겨주고.」
    「......」
    「아빠, 나 나갈게. 휴가가 사흘 남았는데 딴데서 쉬고 귀대할 거야. 그동안 아빠도 이 집을 떠나줘.」
    「......」
    「그게 엄마나 민화한테 도움이 될거야. 더 이상 엄마 괴롭히지 마. 이혼하자고 할 필요도 없는 일야. 떠나면 되는 건데 끝까지 어리광 부리려고 그래?」

    정수용이 가만있었으므로 정기철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현관으로 다가가 신발을 신고 나서 허리를 폈다. 정수용은 그 자세 그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두 다리를 길게 뻗고 등은 벽에 붙인 채 머리는 숙여졌다. 두 팔은 늘어져서 잠이 든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정기철이 다시 말했다. 
    「아빠가 가만있겠다면 우리가 아빠 돌봐줄게. 내가 제대하고 나서 아빠 돌아가실때까지 돌봐줄 자신이 있어. 잘 생각해.」

    그리고는 정기철이 밖으로 나왔다. 아직 햇살이 퍼져있는 오후였다.
    당장 갈 곳이 없었지만 발을 뗀 정기철은 아파트를 나왔다.

    아버지한테 할 말은 다 했어도 가슴은 더 답답해졌으므로 정기철은 어금니를 물었다.
    그 순간 정기철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는 주머니에서 접혀진 쪽지를 꺼내었다. 그리고는 핸드폰을 들고 쪽지에 적힌 전화번호를 누른다.

    핸드폰을 귀에 붙인 정기철은 신호음을 듣는다. 신호음이 세 번 울리고 나서 여자가 응답했다.
    「여보세요.」
    「저, 아파트 공사장에서 만났던 정기철입니다.」

    오윤수씨의 딸 오연희에게 전화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