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장 끝없는 도전 ⑰  

     내가 워싱턴에 도착한 윤병구를 만났을 때는 1905년 7월 31일이다.
    윤병구는 태프트의 추천장을 받은 즉시 하와이에서 달려온 셈이었는데 그 열정이 눈물겨웠다. 한성사범을 졸업한 윤병구는 기독교 목회자로써 하와이 조선인들의 구심점 역할을 한다.


    「형님은 고생이 많으시오.」
    윤병구가 문득 생각난 것처럼 그렇게 말하더니 길게 숨을 뱉았다.


    윤병구와 나, 대사관에서 나온 김일국까지 셋은 스미스씨의 별채 거실에 둘러앉아 있다. 탁자 위에는 태프트가 써준 추천장이 놓여져 있었는데 윤병구는 그것을 보물단지처럼 품고 왔다.


    내 시선을 받은 윤병구가 말을 잇는다.
    「공부하랴, 외롭게 독립운동 하랴, 돈 벌려고 그릇 닦고 교회에서 연설하랴, 보육원에 떼어둔 자식 걱정하랴 몸이 세 개 있어도 모자라겠소.」
    「내 걱정은 말게.」


    그러자 윤병구가 입맛을 다셨다.
    「공사관에서 도와주면 일이 수월할 텐데.」


    그때 김일국이 번쩍 머리를 들었다.
    「김윤정이는 국무성 관리들한테 태프트가 추천장을 써준 것을 오히려 불평하고 있습니다.」
    「당연한 일이야.」
    대수롭지 않게 말한 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김윤정은 이제 대한제국 주미공사관의 대리공사인 것이다. 일본에 외교권을 빼앗긴 상황이라 일본의 지시대로 해야만 된다.


    내가 말을 이었다.
    「그 자는 아카마스의 꼭두각시야. 아카마스의 지시가 없으면 입도 뻥긋 할 수가 없는 자야.」

    그리고 아카마스는 나에게 호의적인 것이다. 그 호의를 당분간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
    아카마스 또한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겠으나 결코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김일국이 조심스러운 표정을 짓고 입을 열었다.
    「가쓰라, 태프트가 지난 27일에 일본에서 비밀 회담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태프트의 필리핀 방문은 그 비밀 회담을 숨기기 위한 위장 방문이라는 소문이 퍼져 있습니다.」


    그것은 워싱턴 정가에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워싱턴에서는 개도 일급 정보를 물고 다닌다는 우스개소리가 떠돌고 있다. 공사관에 근무하면서 영어가 조선말보다 더 능숙한 김일국의 워싱턴 정보가 정보력은 대한제국인중 제일일 것이다.


    윤병구가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그러면서도 나한테는 대통령을 만나도록 추천장을 써주다니. 태프트의 심중을 알 수가 없군.」
    「그것이 외교라는 것일세.」
    쓴웃음을 지은 내가 부드러운 표정을 윤병구를 보았다.


    「가쓰라, 태프트가 필리핀하고 대한제국을 미국과 일본이 서로 나눠 갖기로 합의를 했다고 해도 우린 루즈벨트를 만나야 하네.」
    「그렇지요.」
    건성으로 머리를 끄덕였던 윤병구가 길게 숨을 뱉고나서 나를 보았다.


    「형님, 제가 순진했던 것 같습니다. 태프트가 고마워서 추천장을 받으면서 눈물을 쏟았거든요.」
    「최선을 다 한 것으로 만족해야 되네.」
    했지만 내 가슴에 찬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미 예상은 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그러나 막상 태프트의 추천장을 들고 들떠서 달려온 윤병구를 보자 가슴이 다시 미어졌다. 헛기침을 한 내가 윤병구와 김일국을 둘러보았다.


    「자, 서두르세. 루즈벨트한테 이 추천장을 보내놓고 만날 준비를 해야만 하네.」
    하지만 우리는 비공식 사절이다. 하와이에 거주하는 대한제국 이민자의 대표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