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장 끝없는 도전 ⑮  

     미 육군장관 태프트(William. H. Taft)가 수행원과 함께 하와이에 도착한 것은 1905년 7월 14일이다.
    7월 초에 국무장관 헤이가 병으로 죽었기 때문에 태프트는 국무장관 서기까지 겸하고 있었는데 필리핀으로 가는 길에 하와이에 들른 것이다.

    「윤목사님이 태프트를 만났답니다.」
    김일국이 밤중에 내 기숙사로 찾아와 말했을 때는 7월 20일이었다. 우리는 기숙사 복도에서 마주보고 서있었다.

    김일국이 상기된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교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은 태프트가 윤목사님께 루즈벨트 대통령과의 면담을 꼭 주선하겠다는 약속을 했고 추천장도 써 주었답니다.」
    「어허, 윤목사가 큰 일을 했어.」

    나는 탄성을 뱉았다. 윤목사란 윤병구(尹炳求)를 말한다. 내가 미국으로 오는 길에 하와이에 들렀을 때 교민들을 모아놓고 기다려준 형제나 같은 친구.
    그때 김일국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하와이 교민들이 윤목사님과 선생님을 교민 대표로 선임했다고 합니다. 곧 윤목사님께서 교민들이 연명한 청원서를 들고 선생님께 오실 것입니다.」
    「아니, 나를?」
    놀란 내가 되물었지만 이해가 되었다.

    호놀루루의 에와(Ewa) 농장에서 내가 열변을 토할적에 함께 울고 소리치던 수백명의 교민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교민들은 나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잘 되었네.」
    마침내 내 목소리도 격정으로 떨렸다.

    루즈벨트와의 면담을 약속했던 휴이 장관이 갑자기 병으로 죽는 바람에 낙담하고 있었던 참이었다. 더구나 러일 전쟁에서 러시아의 패전이 확실시됨에 따라 루즈벨트의 주선 하에 8월에는 뉴헴프셔주 포츠머스 군항에서 러일 강화 회의가 열릴 것이었다. 

    이쪽은 답보 상태인데 반하여 세상은 빠르게, 그리고 나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가뭄의 단비같은 소식이었다.

    「그런데 선생님.」
    김일국이 목소리를 낮추고 나를 불렀다.

    밤 10시 반 가깝게 되어서 복도는 텅 비었다. 내 방에는 지난주부터 기숙인 한명이 들어와 같이 방을 쓰는 터라 밀담을 나눌 장소가 못된다.

    내 시선을 받은 김일국이 말을 잇는다.
    「윤목사가 이곳에 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김윤정이 수시로 아카마쓰를 만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 본 김일국이 목소리를 낮췄다.
    「저도 앞으로는 이곳에 오지 못할 것 같습니다. 김윤정이 선생님한테 감시원을 붙인다고 들었거든요.」
    「당연하지.」
    「김윤정의 정보원 중 한명이 저희 독립협회 회원이어서 정보를 얻을 수 있지만 선생님도 조심하셔야 됩니다.」
    「걱정하지 마시게.」
    「아카마쓰는 미국 서부지역까지 정보원을 보내 조선인 단체의 분쇄 공작을 하고 있답니다.」

    나는 잠자코 머리만 끄덕였다. 지난번 김일국을 데리고 아카마쓰의 사택에 찾아간 다음날 조선인 밀입국자 양시우는 석방되었다. 난데없이 거물 변호사가 나타나 익명의 조선인 후원자 부탁을 받았다면서 양시우를 빼 내었다는데 아무도 영문을 모를 것이었다. 그러나 나하고 아카마쓰 저택을 같이 찾아갔던 김일국만은 짐작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사람마다 다 사연이 있고 명분이 있는 법이지.」
    김일국의 시선을 받은 내가 쓴웃음을 지으면 말했다.
    「알면 알수록 깊이를 모르는 사람도 있어.」

    그러자 김일국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