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투쟁(鬪爭) ③ 

     세상을 바꾸겠다는 의욕은 있었지만 의지가 받쳐주지 못한 것 같다.
    또한 세상 앞에서 내 존재는 미약했다.

    수잔 크로포드가 상하이로 떠난 후에 나는 한동안 상심했다.
    소중한 사람은 떠난 후에야 그 진가를 알게 된다던가?
    뚜렷한 길이 보이지 않았던 내 개혁 운동의 나날에서 수잔은 한줄기 빛 역할을 해 온 모양이었다.

     그동안 독립협회는 마침내 고종황제가 헌의6조(獻議六條)를 받아들이도록 했지만 관민공동회를 일으켜 압박 한 것에 대한 부작용이 컸다.
    고종은 외세, 즉 일본이나 러시아보다 독립협회를 왕권에 대한 가장 위협적인 존재로 의식하게 된 것이다.

    헌의6조란,
    1. 관민이 협력하여 외세의 의존 없이 왕권을 공고히 한다.
    2. 철도, 광산, 석탄, 산림, 차관, 차병과 외국과의 조약은 중추원 의장과 각 부 대신이 서명하지 않으면 시행할 수 없다.
    3. 재정은 탁지부에서 관할하고 다른 곳의 간섭을 받지 않으며 예산, 결산은 만민에게 공개한다.
    4. 중죄인은 피고가 자복 한 후에 공판에 회부한다.
    5. 황제는 정부의 과반수 동의를 얻어 칙임관을 임명한다.
    6. 중추원 개조안인 장정(章程)을 시행할 것.

    이것은 결국 왕권의 제한을 목표로 한 것이다.
    지금까지 임금은 재정은 물론이고 외국과의 조약에도 전권을 행사해왔다.
    그 과정에서 부정과 뇌물이 성행해 온 것이다.

    11월 초순의 어느 날 아침,
    내 은신처로 기석(奇石)이 달려왔다.
    급했는지 양복 바지에 짚신을 신었다.
    서둘러 방으로 들어온 기석이 윗목에 앉자마자 말한다.

    「나으리, 익명서(匿名書)가 떴습니다!」

    그때 박무익이 방으로 들어섰다.
    박무익은 잠자코 옆쪽에 앉았고 기석의 말이 이어졌다.
    「오늘 새벽에 미국 공사관으로 대여섯장이 뿌려졌는데 아마 모든 공사관에 던졌을 것입니다.」
    「내용이 무언데?」

    박무익이 묻자 기석이 길게 숨부터 뱉는다.
    「독립협회가 뿌린 격문(檄文) 형식입니다. 고종황제를 폐위시키고 대한제국을 공화정으로 이끌어야 하며 대통령에는 박정양, 윤치호는 부통령, 독립협회 간부는 각부 대신으로 임명해야 된다는 것이오.」

    단숨에 말한 기석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나는 보았다.
    방안은 잠깐 정적에 덮여졌다.

    나는 그야말로 목을 졸린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듣고 난 첫 느낌은 기가 막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순간 모골이 송연할 정도의 두려움이 덮쳐왔다.

    대반역(大反逆)이다.
    그러나 이 말도 안되는 익명서를 무시할 수가 없다.
    고종이 이 익명서를 읽는 것을 떠올리면 온 몸이 굳어졌다.

    임금은 격분할 것이다. 익명서 내용이 날조된 것이라고 믿더라도 치를 떨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세습 전제 군주의 한계다.

    지난번에도 초대 독립협회 회장이었던 안경수의 고종 퇴위 운동이 적발되었을 때 의정부참정 조병식이 독립협회 간부들을 모두 역모로 몰아 잡으려다 실패했었다.
    그 때문에 조병식이 독립협회의 역공을 받아 면직되었다가 석달만에 다시 복직이 되지 않았던가?

    내가 굳어진 얼굴로 말했다.
    「조병식이 짓이군.」
    「황국협회장 이기동이하고 합작(合作)이요.」

    박무익이 앓는 소리처럼 말을 받았을 때 내 입에서 저절로 말이 나왔다.
    「임금이 바라던 사건일지 모르겠군.」

    놀란 둘이 시선만 주었고 나는 앞쪽 벽을 노려보았다.
    독립협회의 개혁을 막으려고 보부당 떼를 모아 황국협회를 만들어놓은 임금이다.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