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장 격랑속으로 (28)

     「임금이 제 백성을 믿지 못하다니.」

    제국신문에 써낸 내 사설은 격렬했다.
    황제가 외국인 용병을 고용한 것을 비판 한 것이다.

    그것을 읽은 아버지는 크게 진노했다.
    족보를 품고 다니시면서 양녕대군 15대손이라는 자긍심이 없었다면 진작 탈진해 무너지셨을 아버지. 내가 배재학당에 뛰어들지 않았다면 나도 그와 비슷한 전철을 밟게 되지 않았을까.

    아버지가 나를 앉혀두고 소리치듯 말했다.
    「대불경(大不敬)이다! 어찌 임금을 이렇듯 대한단 말이냐!」

    사랑채 밖에서 듣고 서있을 아내가 놀라 오금이 저렸을 것이다.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조금 다르실까?
    문득 가슴이 뜨거워진 나는 머리를 숙여보이고는 방을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마루 앞에 우두커니 서있던 아내가 몸을 돌렸다.

    저녁 9시쯤 되었다. 
    대문을 나왔지만 동네 마실을 가는 줄 알았는지 복례도 묻지 않았다.

    초가을의 저녁 9시면 어둡다.
    갈 곳을 정하고 나온 것이 아니어서 느린 걸음으로 골목을 벗어난 순간이었다.

    뒤쪽에서 인기척이 들렸으므로 나는 머리만 돌렸다.

    어둠속에서 사내 하나가 다가오고 있다.
    어두운 색 양복 차림이었는데 머리도 잘랐다.
    장신이다.

    긴장한 내가 걸음을 조금 늦췄을 때 사내의 손에서 번쩍이는 물체가 들어났다. 칼이다.
    어둠속이었지만 흰 칼날은 선명하게 드러났다.

    눈을 부릅뜬 나는 몸을 돌렸다. 뛸 작정이었다.
    그러나 가슴은 절망감으로 내려앉고 있다.
    사내와의 거리가 대여섯걸음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위는 조용했고 골목에는 둘 뿐이다.

    나는 소리를 지를 생각은 일어나지 않았다.
    소리쳐도 늦었다는 계산보다는 구원을 외치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내가 한발짝 발을 뗀 순간, 뒤에서 둔탁한 충격음이 울렸다.
    그러더니 낮은 신음이 들린다.
    상반신을 돌린 내가 다시 뒤를 돌아보았을 때였다.
    나는 담장에 비스듬히 기대 쓰러진 사내와 그 앞에 선 또 하나의 사내를 보았다.
    그 사내는 손에 장검을 쥐었다.

    「서방님, 저올습니다. 박무익입니다.」

    어둠속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에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 했다.

    「아, 박형.」
    어금니를 문 내가 한걸음 다가섰을 때 박무익이 말했다.

    「이 곳은 저한테 맡겨주시고 댁으로 들어가 계시지요.」

    「내가 집 앞에서 기다리겠소.」
    식구들이 알면 대소동이 일어날 것이었기 때문이다.

    박무익은 장검을 사내의 목에 붙이고 있었는데 담장에 등을 붙인 채 주저앉은 사내한테서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대문 앞에서 기다린지 30분이나 되었던 것 같다. 어둠속에서 박무익이 다가왔다.

    「서방님, 놈은 황국협회에서 보낸 자객이었습니다.」
    앞에 선 박무익이 어둠속에서 흰 이를 드러내 보였다.

    「선금으로 은 열냥을 받았고 서방님을 해치고 나면 다시 스무냥을 준다고 했다는데요. 그리고,」
    다가선 박무익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현장에 일본도 하나를 버려두고 오기로 했다는군요.」

    박무익의 두 눈이 별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다.

    이번에는 내가 머리를 끄덕이며 웃었다.

    「다행이군. 황국협회놈들도 내가 일본 추종자가 아니라고 믿는 것 같으니 말이오.」

    「서방님은 사방에 다 적이올시다.」

    그래놓고 박무익이 입맛을 다신다.
    「오늘 밤 구사일생 하셨습니다.」

    나는 그때서야 박무익에게 인사도 안했다는 것을 깨달았다.